신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4장,일꾼의 자세

호리홀리 2015. 6. 9. 11:28

일꾼의 자세

 

   

고린도 교인들은 분란 속에서 서로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바울에 대한 부정적 비판들이 있었다(9:3).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9:2, 고후 11:5). 언변이 좋지 못하고 용모가 신통치 않다는 비난도 받았다(고후 10:10).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무능하여 요를 받지 못한다는 엉뚱한 비방까지 있었다(고전 9:14-15, 고후 11:8). 이러한 인간적 판단 속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군이기에 하나님께 충성하여 그분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 인간들의 판단은 별반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군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에 대한 충성이다(1-2절).

 

 그래서 나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바울이 자신을 돌아볼 때 별로 자책할 것은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의 판단도 주께 옳다함을 얻는 기준은 아니다. 나도 나를 판단치 못한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진실에 입각한 심판을 하실 때가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3-5절).

 

 

 함부로 심판하지 말라. 특히 귀가 엷어 사람 말 듣고 마구 판단하여 그 사람에 대해 죄 짓지 말자.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판단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매사를 잘 분별하는 올바른 판단력을 가져야만 한다. 적절한 분별력과 판단력이 없는 신자는 건강한 것이 아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쉽게 그릇된 길에 빠진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의 사고 능력은 오히려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항상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 한다. 문제는 성급한 마음의 판단에 기초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 심판의 말이나 행위를 밖으로 함부로 내어놓는 것이다. 마태복음 7:1-2를 염두에 두자.

 

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자.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더구나 주의 뜻대로 주의 일을 하다 보면 비판을 받는 것은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평하려고 노력해야 된다(롬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그러나 목적 없는 화평이 지선(至善)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필요한 핍박도 받고 비난도 당하고 모함도 겪으며 어쩔 수 없는 오해도 받게 되어있다. 화평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다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내내 사로잡혀 살아서는 안 된다.  중심을 보시면서 정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야 된다.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4절).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 바울에게는 별 것 아니라 했다(3절). 나도 나를 판단 못한다. 진정한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항상 내 속을 살피자(시 51:10, 시 139:23-24).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신경은 쓰되 지나치게 쓰지 말자.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옳은 일을 하고 바른 편에 서며,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자.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과 사도의 고난(6-13절)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과 비판의 중심에는 ‘교만한 마음’이 놓여 있었다. 바울은 여기서 그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교만을 지적하고 그와 대조되는 자세로서 자신과 사도들의 고난의 삶을 보여준다.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를 본으로 삼과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겸손한 자세를 갖고 교만하지 말라(4:6).

 여기서 사용된 ‘교만하다’(fusiow)라는 단어는 콧김이 훅훅 새어나오는 모습(puff up)을 가리킨다.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가 그들에게 있어서 본으로 제시되었다. 어떤 모습을 말하는가? 둘 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셨다. 둘은 각자의 일을 하면서 동역자가 되었다. 그리고 각자의 일에 충실했다. 상대방의 일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에서 겸손하게 자신의 일들을 한 것이다.

바울과 아볼로의 예를 통해 고린도인들이 배워야 할 것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다(1:19, 31; 2:9, 16; 3:19, 20). 인용된 구약 말씀의 주 내용은, 인간 지혜에 대한 자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이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서로 대적하여 교만하지 말라. 자기가 잘났고 상대방은 형편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어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된 자세를 풍자(諷刺, sarcasm)로 지적한다(7-13절).

 너의 존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잘 생각하라.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본래 네 것이었던 양 자랑을 하는가(7절)?

 

이들의 교만에 대한 풍자(8절).

이들은 스스로 부요하며 왕노릇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8절). 이것은 고린도의 철학적 지혜의 오만을 지적하는 풍자이다. 이들의 이상적 인격과 가치관 및 생활양식이 당대의 철학적 풍토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자기 교만을 행사하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있었다. 교회의 분란을 일으켰던 일부 고린도교인들은 이런 종류의 세태에 쏠려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복음적 인간, 십자가의 도에 부합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당대의 문화와 가치관이 복음의 문화 및 가치관과 충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조되는 사도의 삶(9-13절)

반면 사도의 모습이 무엇에 비교되었는지 보라. 원형 경기장에서 죽기 위해 끌려나온 사람들과 같다고 했다. 경기장에 입장하는 행렬의 끝에 위치한 구경거리로서의 모습이다. 무기를 든 병사들이 앞에 가고 그 뒤에 누더기 옷을 입은 비참한 모습으로 맹수의 먹이가 되기 위해 끌려나오는 원형경기장의 죄수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웃고 떠들며 조금 있으면 벌어질 맹수 대 쓰레기 인생의 혈투를 기다리는 관중들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바울과 사도들의 모습이다. 10절은 고린도 교인들과 사도의 모습을 역설로 비교하고 있다.

11-13절의 고난 리스트를 주목하라. 배고픔, 목마름, 헐벗음, 매맞음, 정처 없음, 노동에 찌듦, 축복하면서 치욕을 당함, 참으면서 핍박을 당함, 권면하면서 비방을 당함. 그래서 가만히 보니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이다(고후 11;23-29와 비교).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 이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에게 장려된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사야 53장에서 묘사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다.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의 삶이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것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후에 상급이 큰 사람의 현재이다.

 

바울이 이러한 풍자를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당신들처럼 잘 먹고 잘 살고 교만한 것이 복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좇아가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다.

명분과 위신을 중요시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교회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을 정의해서는 안 된다. 학벌을 중시하는 한국적 사고가 교회를 지배해서도 안 된다. 상류 사회의 인간적 품위나 자기 과시가 교회에서 고개를 내미는 것도 아름답지 못하다. 물질적인 과다가 인간성의 평가기준으로 등장해서도 안 된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이다. 언제든지 다시 거두어 가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평준화된다. 자기 주제를 모르고 왕년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오히려 눈총을 받는 것이 인간관계의 현실이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자기 자랑과 교만을 버리고 오직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한 고난, 타인을 위한 희생적 사랑, 해야 할 일을 위해 수욕과 어려움을 마다 않는 충성으로 특징 된다. 고린도의 자칭 현인들의 삶이 우아하고 품위 있어 교만한 전시용 삶이라면 그리스도의 일군 된 사도의 삶은 온갖 더러운 일을 감당하는 3D 직종의 소모품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삶은 우아한 전자가 아니라 바닥 인생 같이 보이나 대속적 사랑이 그 동기가 된 후자이다. 

 

바울을 본 받는 자가 되라(14-21절)

 

이제 어투를 바꾸어 다른 차원에서 호소를 한다. 바울은 이렇게 세상의 쓰레기가 된 자신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권한다(16절). 내 말이 조금 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비의 마음을 갖고 간절히 권한다.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은 자신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했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는 것도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된다. 바울을 본 받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식과 같은 디모데를 보냈다 한다. 디모데는 가서 어떻게 바울이 자신이 가르치는 바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올바른 행실을 지도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17절). 바울이 가르쳐 남기려 하는 것은 이론보다 삶이다(14-17절).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럴 듯 한 말이 아니라 파워이다. 경건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그렇다면 만물의 찌꺼기가 되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능력은 고난에 있다. 능력은 순결에 있다. 능력은 십자가에 있다. 능력은 헌신과 희생에 있다.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21절의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이 될까?

 

 

 

 심판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주님 안에서 충성을 다해 내게 주어진 일을 할뿐이다. 사람을 심판하지 말고 사랑하라. 사람들의 판단에 지나치게 좌우되지도 말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로서의 진(옳음)과 선(좋음)과 미(아름다움)가 비성서적인 것이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이래야 한다’고 내가 주장하는 내용들, 그런 주장에 근거한 나의 성품, 그러한 주장에 기초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 등이 이 세상이 제공한 문화적 가치관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의 경우 말을 듣고 행실을 보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확신에 차 있는데 성서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과도 상관이 없다. 왜 종종 그런 가치관들이 교회의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하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길을 가야 한다.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대속적 고난의 삶이 진정으로 따라야 할 모델이다. 교만하지 말자. 자랑하지 말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진심으로 사랑하자.  사람은 겸손할 때 아름답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