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7장,성도의 결혼관

호리홀리 2015. 6. 9. 13:07

 

 

 “너희의 쓴 말”(7:1a)이란 그들이 보낸 편지에 담겨있던 내용을 가리킨다. 그들이 남녀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저들의 주장: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바울: 홀로 있으면 음행하기 쉽다. (구설수에도 쉽게 말린다). 결혼하라. (남녀가 결합하여 사는 것, 이것이 창조의 질서이다. 오직 부활 때나 이 혼인관계가 없어진다). 그리고 결혼한 사람들은 열심히 사랑하라. 사랑은 피차간의 의무이다. 내 몸은 내 아내의 것이고 내 아내의 몸은 내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쓰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서로 종노릇’하라는 뜻이다. 상대방을 내 소유처럼 쓰기 위해 멋대로 하는 것은 이 명령에 위배되는 것이다. 부부관계에도 이웃사랑의 원리가 적용된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육체관계에서조차 ‘대속적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좌우지간 바울은 ‘십자가의 원리’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다).

 

 

 같이 살면서 따로 자는 일에 대한 바울의 원칙. 원칙은 분명하다. “분방하지 말라.” (괜히 남편 내 쫓아서 소파에서 자게 하지 마세요). 기도를 위해 필요하면 해도 좋다. 그러나 길지 않게 하라. 그리고 분방은 명령이 아니라 ‘권도’, 즉 ‘양보차원의 허락’(concession)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허용하는 것이지 명령이 아니다(기도를 핑계 대고 분방하는 것이 바울이 보기에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독신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바울은 분명히, 절제상의 문제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의 창조세계 질서임을 밝혔다. 그러나 바울처럼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은사라 했다. 바울은 독신으로 지내면서 정욕과 음란을 절제할 수 있는 은사를 갖고 있었다고 자부한다. 자신과 같은 독신의 동지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이다. 사람은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각기 다른 은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독신의 능력도 은사이다.

 

   

“혼인하지 않은 자들”은 “혼인 상태가 아닌 남자들”(the unmarried)을 뜻하며 좀더 구체적으로는 결혼했다가 아내와 사별한 홀아비들을 가리킨다. 이혼남이나 총각을 위한 권면은 각기 11절과 25-38절에 별도로 주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과부’와 같은 부류로서 ‘홀아비’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을 위한 바울의 권고는 자신과 같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절제를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되거든 결혼을 하라고 권한다. 가슴이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는 것보다는 혼인하는 것이 낫다. 무슨 의도인가?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성결을 유지하고 마음의 안정을 갖는 것을 중요시했다. 결혼하여 성적인 만족을 취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안정된 상태에서 경건과 신실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혼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고린도 공동체에 이혼을 한 경우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현실로서 이혼한 사람들에게 별다른 심판의 언어를 구사하지는 않는다. 이혼했으니까 공동체에서 추방하라든지(참고, 5:13), 교제의 관계를 갖지 말라든지(참고, 5:11) 하는 엄격한 심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양자택일의 권면으로 대신한다. 어차피 이혼한 사람이라면 다시 결합하던지 그냥 그대로 홀로 지내라고 한다.

이혼율이 50 퍼센트를 넘어간다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적용해 본다. 분명히 최선은 이혼하지 않는 것이다. 이혼은 적극적으로 막아야 하며 이를 위한 선포와 교육, 상담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이혼이 이미 이루어진 현실인 경우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자꾸 심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혼 경험자들은 이미 상처를 받을 만큼 받은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혼자들의 경우 마음의 고생은 더 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돌봄의 대상일 경우가 많다. 물론 그렇지 않고 이혼을 친구와 만났다 헤어지는 것처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행실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재혼한 것이 현실이 된 사람들에 대해 바울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첫 남편과 결합하던지 홀로 살게 하기 위해 다시 갈리라고 했을까? 즉 두 번째 이혼이 되는 상황을 요구했을까? 아닐 것이다. 역시 이들에게도 그대로 최선의 현재 혼인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것을 권고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과거의 이력보다 현재의 올바른 행위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이혼을 가슴아파 하시지만 현재의 결혼 상태를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14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역(逆)의 전염(傳染)’이다. 이런 경우 일반적 시각은 오염(汚染)에의 염려이다.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이 접촉하면 정결한 것이 부정해진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역전염(逆傳染)의 가능성을 역설한다. 정결한 것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때 그것에 접촉한 부정한 것이 오히려 깨끗해질 수 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다가 몰래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 치유를 얻었던 여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눅 8:43-50).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신의 배우자를 구원에 이끌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 배우자가 이혼을 강력하게 요구할 경우에는 갈릴 것을 허락하고 있다. 이 경우는 혼인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신앙과 배우자 중 택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신앙을 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이 쉽게 이혼하기 위한 핑계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 역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배우자를 가졌다 해서 믿는 배우자가 이혼을 주도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전도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16절). 어쨌든 누군가와 혼인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 혼인상태를 깨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나머지는 모두 차선이거나 애석한 일이거나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보전하면서 그 상태의 최선을 이루어 갈 것을 장려한다.

 

 

이어서 바울은 사회적 신분을 바꾸려고 너무 괘념을 하지 말라고 권한다.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그대로 자신의 신분을 보전하라 한다. 노예는 노예로, 자유인은 자유인으로 남아있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동을 위한 노력을 일체 하지 말라는 보수적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급진적 자유론에 입각한 권면이다. 외면에 보이는 사회적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울이 가르쳤고 초기 교회의 세례식에서 암송되었던 선포가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7-28).

 

유대인-헬라인, 종-자유인, 남-녀는 당시 인간을 나누는 세 가지 뚜렷한 구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는 순간 이런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모두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a).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다 자유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다 그리스도의 종이다(고전 7:22).

 

 

이렇게 별 의미 없는 세상 신분에 너무 괘념하여 그것이 삶의 모든 것을 결정짓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너무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맥을 같이한다(마 6:24-35). 할례자가 되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보다 중요하여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다(19절). 사회적 신분을 바꾸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일’이다(24절).

이러한 대 전제 아래서 가능한 좋은 방향으로 기회가 닿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그것을 취하는 것은 기꺼이 할 일이다. 노예 상태에서 자유민(ekeleutheros = freedman)이 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말라(21절). 자유인이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23절).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신분 상승이나 부의 기회가 정당하게 주어질 때 그것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러한 상승이동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일 수 있다(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후자가 잘 되면 전자가 잘 안 되어도 성공적인 삶이다. 그러나 전자만 이루어지고 후자가 없으면 실패한 삶이다. 이것은 자유인에게나 노예에게나 마찬가지다.

   

처녀(parthenos)의 결혼에 대한 질문이 고린도인들로부터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역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권면을 한다.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종으로서 주는 의견이라고 말하고 있다(25절). 즉 이에 대해서도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다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다른 부분에서 확실하게 명하는 부분은 주의 계명에 입각한 것들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역시 여기서는 좀더 의견에 가깝다.

 

(1) 여기서 ‘처녀’(parthenos)로 분류된 여성은 미혼 처녀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혼, 즉 정혼이 되어 있는 여성이다. 개역성경의 ‘처녀 딸’(36절, 37절)은 헬라어 원문의 것이 아니라 상황의 추정에 의한 의역이다. 개역성경은 36-37절의 행위의 주체를 처녀의 아버지로 보았지만 헬라원문에서는 구체적으로 그렇게 주어가 되는 남성의 신분을 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 번역은 36-37절의 행위 주체를 약혼남으로 본다.

(2) 개역성경 본문 7:26의 ‘임박한 환난’은 좋은 번역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이 곧 주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바울이 주의 재림을 항상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가 바로 임박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도적같이 임할 것이기 때문에 항상 대비하는 자세를 기본 원칙으로 했을 뿐이다(살전 5:2-6). 원문 enestosan anagke를 그대로 직역하면 된다. 원문의 헬라어는 ‘현재의 필수적 의무’를 뜻한다. 같은 단어 anagke는 9:16에서도 ‘부득불 할 일’로 번역되었다. 이를 굳이 환난이라고 번역할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29절의 ‘때의 짧아짐’도 그 때에 대비한 긴장의 유지 차원에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