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사도행전26장,파레시아

호리홀리 2015. 6. 8. 10:22

 

 누가의 핵심은  파레시아(παρρησίᾳ)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그의 사역 그리고 죽으심 이것들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복음”이다. 복음에 대한 정의가 다 다르겠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복음의 핵심은 부활신앙이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신앙이 존재할 수 없다. 바울도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부활신앙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 부활신앙은 참으로 기독교의 핵심 중 핵심이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을 통해 성령을 언급하고 교회가 확장되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이 부활에 그의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26장의 바울 재판내러티브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행전 26장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1) 바울의  변명(2-11)

(2) 바울의  회심(12-18)

(3) 부활에 대한 종이며 증인으로서의 바울의 사역(19-23)

바울은 드디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1) 바울은 일관성이 있는 연설 즉 재판관을 향한 발언(2-3)과 사건의 진술(4-18)그리고 사건의 증거를 제시(19-23)하는 순서로 그의 변호를 진행해 나간다.

바울은 재판관을 향한 의례적인 찬양(2-3)으로 그의 부활의 대한 증거를 시작한다. 다음 그는 예루살렘에서 보낸 자신의 유년기를 상기시키며(4),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나오는 많은 잠재적인 증인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자신의 바리새인 생활을 피력한다.(5)

당시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미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소망은 의인의 몸의 부활과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동시에 회복되는 것이었다.(6-7) 이에 대한 이야기로하여 부활에 대해 있음직하지 않다고 하는 가정에 반박하면서 청중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상기시키고, 부활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유대인의 소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증거했다.(8)

바울은 계속하여 하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어떻게 자신을 회심케 했으며, 그리고 나사렛 예수가 진실로 메시아임을 깨닫게 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먼저 바울은 자신이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음을 고백했다.(9)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소중한 고백의 한 형태인 바울의 간증을 보게 된다. 간증의 구조는 간단히 변화되기 전과 변화된 후의 생활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다.   

‘가편투표’는 비공식적인 결정을 내릴 때도 사용될 수 있었다. 바울은 아마 공회의 회원이 되기에는  나이가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 형성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이러한 투표는 불법적인 것이며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바울의 이야기는 한때 그가 동조했던 그의 고소자들을 반로마적인 색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10)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이 강제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저주하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도록 만들었다고 그의 변증을 펼쳐 나간다.(11)

분명 바울은 자신을 변증하고 있지만 색채는 분명히 드러난다. 바로 ‘복음’인 것이다.  누가는 바울의 재판을 통해 재판과 그때의 상황적 역사적 자료를 섬세하게 제공하지만 그의 관심은 오로지 복음에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드디어 바울은 간증의 핵심인 “어떻게 해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는지?”예수를 만난 거룩한 순간을 생생히 전달한다. 먼저 그는 예수의 소리를 듣게 되고 곧 반응을 보이게 된다.    구약이나 유대 전승에서는 그러한 계시를 받았을 때 땅에 엎드러지는 것이 흔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그의 이러한 체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즉 부활의 확실한 증거자로로 그의 믿음의 발판이 된다.(14)

예수님은 바울을 부르시는데 마치 선지자를 부르시듯 바울을 부르시며 상속자가 될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상속자이시다.(15-18) 우리는 누가의 이 기록을 통해 장차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믿음을 보게 된다. 즉 부활하신 주님을 절대 신뢰하기 때문에 담대히 선포할 수 있는 바울이다.

이젠 법정의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누가는 마지막까지 부활신앙에 대한 주제를 흐리지 않고 바울을 통해 부활신앙과 그 연속성으로 바울의 사역을 잘 그려내고 있다.(24-32) 베스도의 첫 마디 "바울, 너는 미쳤다“(24) 베스도에겐 구원의 놀라운 능력이 그저 하찮고 어리석어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위대성을 다시한번 실감한다. 참으로 주님은 지혜자들에게 그분의 진리를 숨기셨다. 

바울의 변증은 드디어 극에 달했다. 그는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의 연설을 듣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인 되기를 원하는 궁극적 자신의 목표를 말하면서 복음을 향한 열정을 불태운다(29)

  바울의 변증을 통해 누가의 궁극적 핵심이 복음에 있음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결국 모든 변증적 수사학적 장치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뼈대는 고대 수사학적 변증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 내용은 부활신앙에 기인한다. 

     

부활신앙과 파래시아는 과연 어떤 관계일까? 부활신앙의 결과는 바로 담대함이라는 것이다. 본문 8절을 보라! 바울은 철저히 부활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가 있다. 그리고 26절을 보라 바울은 어떠했는가? 그때“파레시아(παρρησίᾳ)라는 어휘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문맥적 상황을 볼 때 “담대함”의 의미가 적당할 것이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유대백성들 앞에서, 그리고 베스도 앞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그렇게 담대히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부활의 대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이 말은 결국 부활신앙은 담대함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함께 하듯 복음과 부활신앙 그리고 담대함은 함께한다.

   

기독교의 핵심은 부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 부활신앙은 초대 공동체의 핵심가치였다. 고로 우리는 신약과 관계한 모든 글들의 기본토대를 부활과 연관시켜 읽을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활신앙의 당연한 결과인‘파레시아’이다. 현대는 기독교의 소중한 유산인 이 파레시아를 상실한 것 같다. 이는 부활신앙의 부재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마태복음(17:17)과 누가복음(9:41)을 통해 당시를“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 책망하실 때와 같이 오늘의 세대 향하여 주님은 다시한번 부활의 기쁨을 잃어버린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고 계실지 모른다.

 

 

 

 '파레시아'


신앙인의 삶과 행동에서가장 중요하고 무게있게 다루어져야 할 단어를 하나 뽑는다면, 그것은 단연 '파레시아'이다. 이 단어는 다름 아닌 '확신'과 '담대하게 말함'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단어가 구체적으로 토론되지 못했음은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온갖 비리와 갈등과 자기만족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앉아서 갖가지 이득과 영달을 위해서, 신앙의 중요한 마디까지 팔아버리는 부정직하고 비성경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 반성이나 회개를 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탄식하기도 하고 비아냥거리기가 일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그러나 바꿔 말하면,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고 반복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신앙인들이  잠들어 있고, 자기 자신과 긴밀하게 연관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부정의와 싸우고,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담대함을 보이라고 훈계한다 이처럼 강하게 도전하는 단어가 바로 '파레시아'라는 말이다.

 

 

'파레시아'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모두 40회 등장한다 (명사형 31회, 동사형 9회). 그 가운데 사도행전에는 12회 나오고, 요한복음서에는 9회 나온다. 특히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파레시아'는 사도들의 복음 선포와 관련되고, 바울의 경우에는 재판상황이라는 지극히 왜소해질 수 있는 환경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사실 1세기 지중해 문화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수치에 해당했다. 그러나 바울은 도리어 '파레시아'라는 반대개념을 사용한다. 이 경우 누구도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칼 바르트(K. Barth)의 80회 생일 (1966. 5. 10) 기념논문집,제목은 파레시아. 전반부의 10편의 논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Die Freiheit des Wortes Gottes)로, 후반부의 l1편의 논문은 '응답의 자유'(Freiheit zur Antwort)로 이 책은 분류되어있다. 이처럼 명명된 이유가 다름 아닌 바르트의 생애가 '파레시아'의 실현하려고 애쓴 삶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헬라어 사전류를 찾아보면, '파레시아'는 말하는 '자유'와 '확신'과 '신뢰' 그리고 '말의 권위' 등을 의미하며, 또한 '용기와 담대함'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파레시아'가 쓰여진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파레시아'는 정치적 개념으로서 대중 앞에서 무엇인가를 말할 권리를 의미했다. 이 말은 아테네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그러므로 헬라인들은 그들만이 이같은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므로 이 권리는 노예나 피난민에게는 당연히 주어지지 않았다.
 
 2) '파레시아'는 정치적 측면에서 개인적 측면으로 전환된다. 즉 철학적인 도덕을 뜻한다. 이같은 전환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발견되는데, 그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진리를 위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을 파레시아라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소크라테스도 역시 '파레시아'의 하나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디오게네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파레시아'라고 답했던 것이다. 즉 현자의 재산이 바로 '파레시아'인 셈이다.

 

 3) 개인적인 관계에서 우정을 뜻했다. 에피큐러스 학파의 멤버들은 서로 서로에게 참으로 솔직했다. 즉 우정의 표현수단으로서의 '파레시아'인 것이다. 솔직하게 충고해 주고 비판할 수 없는 상태는 진정한 우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약을 해석하는데 이 단어가 왜 중요한가? 사도행전의 예들을 증심으로 살펴보자. 사도행전에서 이 '파레시아'는 베드로가 담대하게 말하는 2:29에 처음 나온다. 4:11이하에는 산헤드린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복음을 증언하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무식한 자들이라고 중얼거린다. 4:23이하는 사도들이 유다인과 이방인들 앞에서 어찌 그리 담대할 수 있는가를 증거한다. 즉 사도행전에서 '파레시아'는 항상 회당과 유대인에게 설교하는 것과 연관되어 쓰인다. 요한 일서 5:14에서 성도들의 기도 가운데 '파레시아'가 포함되나, 반면 행4:23-31에서는 기도의 결과로서 '파레시아'를 갈구하는 기도를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파레시아'의 전형적인 예는 26:24-26에 나온다. 바울이 이렇게 변명하니,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하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이 대답하였다. "베스도 각하,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맑은 정신으로 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일을 잘 알고 계시므로, 제가 전하께 거리낌없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총독 베스도와 로마제국의 죄수인 바울간의 대화는 '파레시아'가 고위층의 면전에서 사용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귀절 28:31은 저자의 목적을 표현하면서  결론을 나타내는 하나의 전형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바울이 로마에서 연금되어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복음을 담대하게 증언했다.  '파레시아'라는 한 단어만으로 누가가 자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가 여기서 선언하고자 한 바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당시의 세상의 끝이라고 믿어진 로마제국의 심장에서 담대히 선포되고 선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 말고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그리고 또한 누가에서도) 목적했던 바가 또 무엇이었겠는가?  사도행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연히 알게 하는 이 '파레시아'가 신약의  사도행전을 해석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