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사도행전27장,풍랑속에서

호리홀리 2015. 6. 8. 12:08

사도행전 27장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로 향하는 여행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누가 행전의 지리적 구성은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향하다가, 사도행전의 전반부에서는 안디옥과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향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다시 예루살렘을 지향한다. 그것은 유대교와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 누가는 27장에서 세밀한 지리 묘사를 하고 있다. 27장은 그 전체를 지중해의 항해도 한 장으로 나타낼 수 있을 정도이다.

바울은 가이사랴 빌립보 감옥에서 2년여를 죄수로 감금된 상태로 지내다가(24:27) 그의 로마 시민권을 배경으로 한 황제에의 상소로 로마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구금과 재판과 로마행의 배경에는 바울을 로마의 황제와 만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바울은 로마 방문을 원했었다(롬 1:10; 15:22-24). 로마행을 예루살렘에서 출발하는 것에 대해서 지리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예루살렘은 바울이 선교 여행을 다녔던 지역 중에서 로마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다. 예루살렘보다 더 가까운 지역에서 육로와 해로를 통해 로마로 가지 않고 가장 먼 곳 예루살렘에서 해로를 통하여 로마로 가는 여행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는 기상 조건의 어려움만 없다면 당시에 잘 발달된 해상 항로의 여행이 합리적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27장은 풍랑과 파선이 이 내러티브의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더욱 해상 여행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27:1-9

풍랑 속으로

앞 장에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면 27장에서는 장면이 극적으로 전환된다. 비록 죄수의 몸이기는 하지만 바울은 답답한 감옥을 떠나서 망망한 지중해 대해를 여행하게 된다.

27장의 내러티브는 “우리”라는 단어로 시작됨으로써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여행에 동행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라는 단어는 27장에서 두 번 사용된다(26절). 죄수 호송은 백부장 율리오가 맡았고 율리오는 그들이 시돈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 바울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도록 호의를 베푼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 보유자라는 그의 신분이 이러한 율리오의 호의적인 취급과 관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해안선을 끼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현 터키 남단) 연안과 키프로스 섬 사이의 해협을 통과하여 무라에 이른다. 이 항해는 바람을 거스르는 항해로서 여름 내내 지중해로부터 불어오는 서풍 또는 북서풍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해로임을 알 수 있다.

바울 일행은 무라에서 배를 갈아탄다. 갈아타는 배는 당시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이탈리아로 곡물을 수송하는 곡물 수송선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이탈리아를 향한 서향 항해는 계속 불어오는 서풍으로 인하여 더디게 진행되다가 결국 니도 앞에서 애게 해 남쪽을 통과하는 서향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어렵사리 그레데의 남쪽 해안을 따라 미항에 다다른다.

9절의 금식하는 절기는 9월 말에서 10월 초에 거행되는 유대의 속죄일을 의미한다. 당시 지중해의 기상 조건은 9월 15일 경 이후로는 항해가 위험할 정도의 기상이었다. 그리고 11월 1일부터 3월 10일 사이에는 아예 항해가 중지되었다. 바울 일행이 어렵사리 미항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많은 날을 허비했기 때문에 그들은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난(9절) 항해 중지 기간에 접근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항에서 과동하기로 결정했으나 미항은 바위가 많은 작은 항구로서 큰 배가 과동하기에는 부적합했다(12절). 백부장은 중의(衆意)에 따라서 같은 섬의 뵈닉스까지 항해하여 그곳에서 과동하기로 결정했다. 미항에서 뵈닉스까지는 하루 정도가 소요되는 항해 길이다. 선장과 선주는 뵈닉스까지 항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항해 중지를 주장한다. 바울의 의견은 소수의 의견인데다가, 그의 의견은 지중해의 항해술에 관한 한 바울이 따라갈 수 없는 전문가들인 선장과 선주의 판단과 다르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무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던 백부장이다. 이러한 상황적 구도 속에서 바울의 주장의 근거를 두 갈래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 근거는 상식이거나 또는 예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권고는 예언적이다.  남풍이 순하게 불기 시작하자 이들은 이 남풍을 뵈닉스까지의 항해에 알맞은 조건으로 판단하고 미항을 출발하여 그레데 해변을 끼고 출항해 나갔다. 그러나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못되어 섬 중앙으로부터 유라굴로 폭풍이 불어 닥쳤다. 이 폭풍은 북동풍으로서 배를 그레데 섬으로부터 남동쪽 지중해 한복판으로 밀어내는 폭풍이었다. 그래서 일행은 지중해 한 복판의 풍랑 속으로 내던져졌다.

항해의 결정 권한을 쥔 백부장은 바울의 충고를 듣지 않고 항해를 강행했다. 바울의 예언적 충고를 무시했던 백부장은 결국 하나님의 충고를 무시한 것이 되었고 자신을 포함한 276명 전체를 풍랑으로 내몰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27:20-26

풍랑 가운데에서

누가가 묘사하는 풍랑은, 낮에는 해를 볼 수 없고 밤에는 별을 볼 수 없는 암흑의 풍랑이었다. 여러 사람이 먹지 못하였고, 살아날 희망을 버릴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풍랑이었으며, 이 풍랑은 14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풍랑은 먼저 자연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현상은 일찍이 예수님에 의해서 제압당한 적이 있는 자연 현상이다(눅 8:22-25). 그러므로 삶의 희망을 모두 포기하게 만들었던, 바울 일행이 겪어야만 했던 이 풍랑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요소의 개입과 관계가 없는 풍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풍랑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이 여행은 바울로 하여금 로마 황제를 만나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그 계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는 이 풍랑 속에서 바울이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그 풍랑 속에서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라고 표현함으로써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풍랑은 다른 동승자들에게는 절망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절망을 넘어서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며 사명을 재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2년여 전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폭행을 당할 때 주님으로부터 “네가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23:11)”라는 말씀을 들었다. 주님은 절망적인 풍랑 속에서 다시 나타나서 그 말씀을 재확인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이 풍랑은 바울의 로마 입성을 위한 신앙 강화 훈련이요, 재헌신 훈련이요, 지옥 서바이벌 훈련이었을 것이다. 복음을 품고 가는 전도자의 길은 이처럼 험난한 길이다.

칠흙 같은 풍랑 속에서 주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서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24절)”라고 말씀하시면서 바울의 사명을 재확인시켜 주시는 동시에, 이 풍랑으로부터의 구원 계획을 알려주신다.

바울은 275명의 동승자들 앞에 다시 하나님의 예연자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항해 초기에 자기가 했던 예언 내용을 모두에게 상기시킨다. 그 예언은 적중했고 그것을 부정할 근거가 모두 사라졌다. 이제 그의 말은 신뢰도가 상승되었고 그는 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예언의 출처를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 말을 들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듣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자”라는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예언의 출처를 밝힌다. 바울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희망이 선포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신다.


27:27-44

파선 그리고 구원

바울의  예언은 곧 바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육지가 가까워 오면서 바다 깊이를 측정하기 시작하자 깊이는 점점 줄어든다. 이어서 닻을 내리고 육지에 접근하던 중에 사공들이 도망치려 하자 바울이 이를 알아차리고 배의 마지막 육지 접안에 없어서는 안 될 이 사공들의 탈출을 막는다. 사공들이 도망치려 했던 이유는 아마 바울이 배가 좌초되리라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배가 좌초될 것을 대비하여 구명정을 타고 몰래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려 했을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의 바울의 예언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음을 시사해준다. 말씀을 믿는 것은 좋은 일이나 이웃을 팽개치고 자기 목숨만을 구하려는 행위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행위이다.

바울은 동승자들에게 음식 먹을 것을 권하고 기운을 차리게 하며, 그런 다음에는 하물(何物)을 버려 배를 가볍게 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지만 이제 그는 그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과 동역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항해의 지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있었지만 위험으로 다가오는 환경은 계속 도전적이다. 바울은 그 도전에 현실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맞선다. 죄수인 바울은 오히려 자기를 묶은 자들을 구원하는 구원자로 나타난다. 드디어 배는 바울의 예언대로 좌초되고 파도에 의해서 파선된다. 꼭 파선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을까? 파선은 단순히 바울의 예언이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능만을 위해서 삽입되었을까?  파선 전후의 상황은 긴박하게 전개된다. 상륙전 마지막 순간에도 바울은 죽임을 당할 위험에 직면하나 백부장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한다.

이 항해의 첫 부분에서는 백부장, 선장, 선주가 행해를 지휘했다면, 풍랑 속으로 들어가면서부터 풍랑의 중반까지는 풍랑이 항해를 지휘했고, 항해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울이 항해를 지휘했다. 항해의 주역이 마지막에는 죄수인 바울에게로 옮겨간 셈이다. 비록 바울은 그의 법적인 자유를 점차로 박탈당했지만, 그의 예언 속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주권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점차로 확대되어가고 있다. 바울의 구금(拘禁)은 복음의 운반 기구(carrier)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이 14일간의 풍랑은 선장과 선주 그리고 백부장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도착지인 말타 섬으로 바울 일행을 인도했다. 바다를 통하는 이 항해 여행은 어떤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 1장 8절에서 주님이 알려주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의 성취이다. 둘째,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셋째, 복음은 풍랑 속을 통과하며, 전도자는 풍랑 속에서 절대 절명의 훈련을 거쳐 사명을 재다짐 하는 기회를 맞는다. 넷째, 하나님은 전도자의 여정 속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이 예기치 못한 여정에서 하나님은 전도자를 사용하여 전도자가 계획하지 않았던 동승한 이방인들과 그리고 말타 섬 주민들의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