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바울이 에베소를 다녀갔으나 그것은 잠깐동안의 짧은 방문이었다. 바울이 다시 에베소를 찾아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그곳에 나타나 예수에 관한 진리를 가르친 사람이 있었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학문의 도시이며 유대인 인구가 상당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아볼로였다. 알렉산드리아는 후에 안디옥 학파와 더불어 초기 기독교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아볼로는 이러한 알렉산드리아 출신답게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로 평가되었다(18:24).
누가는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고 쓰고 있다(18:25). 그렇다고 예수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기 때문이다. 분명히 아볼로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무엇인가 결여된 점이 있는 제자였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이 점을 간파했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주었다고 했다(18:26). 그러나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 우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28절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추정이다. 처음에는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면서 예수에 대해 가르치다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배운 후 아가야에 가서는 성경을 풀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증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아볼로가 처음에는, 회개를 선포한 요한의 세례와 그 뒤를 이었던 예수의 각종 교훈 및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자적·종말론적 기대만을 알고 그것을 구약의 가르침과 연계해 설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대속(代贖)의 사역과 그에 입각한 '기독론'의 구원관을 몰랐을 수 있다. 즉 예수가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인류 구원의 그리스도가 된다는 진리의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것을 눈치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그에게 이러한 복음의 핵심적 요소를 풀어 가르쳐 주었고 이후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선포할 수 있었다.
또 한가지 설명은 19:1-7에서 그려진 성령 세례의 맥락에서 가능하다. 바울이 에베소에 다시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 누가는 바울이 이들을 만나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동시에 당시 고린도에 있었던 아볼로를 언급한다. 이 '어떤 제자들'도 앞 단락(18:24-28)에서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 있었던 아볼로의 상태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들이 바로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일 수도 있다(18:25). 그들도 아볼로와 마찬가지로 "요한의 세례"만을 알았기 때문이다(19:3). 바울이 이들에게 예수의 세례를 가르치고 안수를 베풀자 성령이 임하고 방언과 예언의 현상이 나타났다(19:5-6).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가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를 어떻게 차별화시키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여 자신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의 차이를 설명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 3:16). 예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로 이해되고 있다. 이 점은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 베드로의 선포에서도 강조된 내용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예수의 세례는 성령과 연결된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담고 있으나 성령과 연결되지 않는다. 에베소의 그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알았으나 성령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다(19:2).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자 이들에게 성령이 임했고 예루살렘의 오순절이나 가이사랴의 고넬료 사건에서처럼 방언이 터져나왔다.
아볼로나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의 이야기를 감안할 때, 당시 초기 복음이 전파되는 중에 구속적 기독론에 대한 이해가 없고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하던 노선의 제자 그룹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과 바울의 동역자들은 에베소에서 이런 노선의 불충분한 기독교인들을 만나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인들로 만드는 사역을 했다.
19:8-20
바울의 본격적인 에베소 사역을 그려준다. 아볼로 나름대로의 사역으로 밭이 일구어졌다(18:24-25). 그리고 무엇인가 결여된 부분이 있던 에베소 신자들이 온전한 복음을 소개받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역사도 있었다(19:1-7). 이제 바울은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말씀의 사역을 계속한다. 처음에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3개월간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담대하게 강론했으나 역시 저항이 거세어 계속할 분위기가 못되었다(19:8-9). 그래서 회당을 나와 두란노 서원을 강론의 장소로 삼았다. 여기서 서원이란 '스콜레'라 불리는 강연장으로 오늘날 영어의 school이 이 단어에 유래한다. '두란노'는 그 장소의 주인이거나 그곳에서 계속 강의를 하는 선생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제자들만 모였으니 교회의 성격이 더 분명해진 셈이다(19:9). 이런 가르침은 2년 동안 계속되었고 소문이 퍼져나가 아시아 전역의 인구가 바울이 강해하는 말씀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19:10).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축귀(逐鬼)와 신유(神癒)를 동반했다. 그의 말씀 사역에 기적의 역사가 뒤따랐고 이런 역사는 마법처럼 보여 이를 흉내내는 주술사들도 있었다. 에베소는 고대로부터 주술과 마법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래서 주술서들을 '에베소 글'(Ephesian writings)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Plutarch의 Moralia 706E). 그러나 바울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는 주술이나 마법, 또는 무속인들의 것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를 흉내내던 주술사들이 오히려 악귀들에게 망신을 당한다(19:13-16).
혹자들은 이러한 권능 행사자로서의 바울의 모습이 바울 자신의 편지에 나타난 모습과 다르다는 비평을 가한다. 하지만 바울 자신이 로마서에서 지난날 자신의 사역의 성격을 요약한 것을 보면 사도행전의 묘사와 그다지 다른 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18, 참고, 살전 1:5, 고전 2;4-5, 갈 3:2). 바울이 고난과 십자가의 정신을 복음전도의 방법으로 선언한 것은(고전 2:2, 고후 4:7-15, 12:9-10) 세속적 자부심의 영광을 사역에 개입시키는 일부 영적 지도자들을 향해 사역의 근본 정신을 천명한 것이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행사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꾸준한 말씀의 공급에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더해지자 "주의 말씀"이 세력을 얻었다고 했다(19:20). 주의 말씀이 다른 것들을 압도하여 지배적인 힘이 되었다는 말이다. 자연히 에베소의 주술적인 문화 자체를 개혁하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19:17-19).
19:21-22, 23-41
에베소 사역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되었고 그렇게 바울 전도여행의 절정을 이룬다. 누가는 이를 놓고 "이 일이 다 된 후"(19:21)라는 완성적 표현을 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을 때 타올랐던 로마 방문의 계획을 다시 세운다. 다음 장에서 이어지는 여정과 사건은 이러한 바울의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진행이다. 복음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것이다.
완성된 사역을 뒤로하고 떠나야할 바울을 이동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세지는 저항과 핍박이었다. 바울 사역의 성공은 에베소 지역에서 아데미를 근간으로 한 경제에 위협을 가져왔다. 신전의 사업에 기초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의 불만과 에베소의 수호여신 아데미에 대한 충성심과 애향심이 한데 어울려 민요(民擾)가 발생했다. 누가는 이 일에 있어 바울과 그의 사람들이 선포한 복음이 결코 로마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밝힌다. 에베소의 서기장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아무런 불법을 행한 것이 없으며 오히려 군중의 소요(騷擾)가 합법적이지 못한 것으로 정의하여 질서를 회복시켰다(19:35-41). 이것으로 바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은 일단락 된다.
(1) 에베소 사역은 결여된 복음을 온전케 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가 있다. 아볼로가 그랬던 것처럼, 학문적 체계와 성서적 지식이 가득하며 예수에 대한 지식도 있으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종교가 있을 수 있다. '신앙의 그리스도' 없는 학문적·역사적 예수의 재구성에 입각한 기독교는 일면 근원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문학적 호소력을 갖는 듯 하나, 그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배제함으로써 '대속의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소외시키는 경향을 갖는다. 역사의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거쳐서 신앙의 그리스도가 되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와 예수가 분리되지 않는 예수'를 체험했다. 아직까지 전자에 머물러 있어 핵심이 결여된 종파적 기독교는 우리의 본문에서 바울에 의해 교정된다. 기독교를 붙잡고 있는 복음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고전 2:2)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갈 3:1)에 기초한다. 이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스캔들'[거리끼는 것]이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해도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고전 1:18, 23-24).
(2) 그리고 이 스캔들의 복음을 진리로 확증해 주는 것은 에베소 제자들에게 임했던 그 성령이시다.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 그리고 그것을 확증시켜주는 살아 계신 성령의 역사는 온전한 기독교의 필수적 조건이며 복음의 핵심이다. 초대교회의 성령은 감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체적(實體的)인 모양으로 다가왔던 역동(力動)이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잘 결합된 성공적인 모델이었다. 이렇게 '말씀 + 역동적 성령'이 조합되었을 때 복음은 '세력'이 된다(19:20). 정당만 세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나 운동만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돈과 조직만 세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모든 세력을 압도하는 영적인 세력은 말씀과 성령이 지배할 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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