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사도행전17장,복음의 핵심 예수그리스도

호리홀리 2015. 6. 3. 12:01

17장에는 바울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리고 아덴에서의 선교가 기록되어 있다. 아시아에서 선교를 하던 바울은 비두니아를 희망했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시지 않아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고, 거기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 환상’을 보게 된다(행 16:9).

이에 바울은 아시아 선교를 중단하고 에게해를 건너 빌립보의 관문인 네압볼리(Neapolis, 지금의 카왈라)에 이르게 되었고, 이어 로마의 중요한 도로였던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를 따라 북서쪽으로 16km 가서 발을 들여 놓은 땅이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였다(행16:11~12). 바울은 이 도시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빌립보 교회의 설립은 바울의 선교 전략과 계획에 분수령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유럽에서의 복음의 시작 이었고 (빌 4:15), 유럽을 전도할 수 있는 광대한 선교의 문이 열렸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빌립보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며 복음을 전한 바울은 이제 서남서 방향으로 여행하여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빌립보에서 150km 떨어진 데살로니가에 도착한다. 사도행전 17:1~10은 바울이 처음으로 데살로니가의 사람들을 만난 일을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마게도냐에 속한 그 도시에서 행한 바울의 초기 전도활동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17:1~9

 

데살로니가 성과 항구는 칼케돈 반도의 서부 지역에 있는 테르메 만(Thermaic Gulf, 지금 데살로니키 만)가까이에 있었다.  데살로니가는 주전 315년 마게도냐의 왕 카산더(Cassander)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그는 이 성읍을 빌립 2세의 딸인 자기 아내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라 불렀다. 주전167년 로마인들이 마게도냐를 네 구역으로 나누었을 때, 데살로니가는 두 번째 구역의 수도가 되었고, 주전 146년 로마인들이 마게도냐를 속주(屬州)로 만들었을 때 속주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전 42년부터 이 성읍은 스스로 세운 ‘읍장들’(politarchs)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자유시의 지위를 누렸다. 아마 이 ‘읍장’ 이라는 직함은 마게도냐 성읍들의 주요 행정관들에게 붙여졌던 특별한 직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리적으로 볼 때 이 도시에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북서 방향과 남동 방향으로 관통하여 성읍을 지나고 있었는데, 오늘날도 이 길을 따라 뚫려 있는 도로는 부분적으로 그때와 동일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인종적으로 볼 때 마게도냐에서 가장 큰 성읍인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인종들이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도시에 유대인 거류지와 회당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중에 바나바와 실라 같은 동료들과 더불어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17:1~2)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먼저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 원칙을 고수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곳에서만이 아니라 사도행전 13~28장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선교행적에서 볼 수 있는데, 즉 안디옥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에 이르는 이방 문화권 선교 과정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도시에 가든지 먼저 회당을 찾아간 이유는 구원사에서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선포되어야 한다”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 그곳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약과 유대교를 알아서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준비된 사람들이 많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로는 당시 유대인의 회당은 그들의 예배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여행객의 숙소나 직업 알선소, 혹은 유대인들의 모임의 장소로서 그들 삶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울에게는 처음 방문하는 낯선 도시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회당에서 방을 얻어 머무는 것도 중요했고, 또 직업 알선을 받는 곳이기도 하고 선교여행 경비를 조달하는 역할을 했던 곳으로 새로운 도시에 가면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 전파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회당 예배의 참석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회당에서는 회당을 관리하고 예배 때마다 사회를 보는 회당장이 있었다. 회당장은 매 안식일마다 정해진 성경을 읽고 회중에게 “누가 성경 말씀을 잘 강해해서 우리 모두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없겠는가?” 라고 물었다. 바울은 바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구약을 강해하고, “이 예언이 예수에 의해 성취되어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 라고 선포하곤 했다.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물론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방인들, 즉 이방인으로서 언약 백성의 표지인 할례를 받고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나, 아직 개종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은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바울의 말을 더 청종하고자 하였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규례대로’ 회당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서 성경을 해석하고 강론하면서 그 성경 말씀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메시지에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기회로 삼았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메시아가 고난을 당했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설명하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할’을 설교했다(17:2~3). 즉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사건을 ‘구속사의 대전환점’ (The Great Turning point in the Redemptive-History)이요 ‘절정’ 으로 이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구속의 새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기독론적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 회당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 에게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구약을 잘 알고 있었고, 구약에서 시작된 그 약속들이 어떻게 예수의 생애와 죽음,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3주간의 전도 결과, 그 반응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바울은 몇몇 유대인들과 이방신을 섬기던 많은 헬라인의 무리와 유력한 인사들의 부인들을 기독교인으로 얻을 수 있었다(17:4).

데살로니가에 있는 동안 바울 일행을 접대했던 야손(Jason)은 아마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때에 회개한 중요한 사람은 데마(딤후 4:10), 아리스다고(행 19:29; 20:4; 27:2; 골 4:10), 세군도(행 20:4), 가이오(행 19:29) 등으로 보인다.

그들이 더 이상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전도자들은 데살로니가 성읍을 떠날 즈음에는 그들이 설립한 기독교 공동체에 상당수의 이방인들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주 후에 바울 일행은 소동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소동을 일으킨 주체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킨 주된 이유는 이방인들, 즉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회당에 참여하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전향하는 것을 시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을 처단하기 위해 군중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 증거로 제시했던 죄목이 “예수를 ‘왕’으로 선포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이끌고 갔던 것이다. 그들이 방문자들에게 덮어 씌웠던 죄명은 엄청나게 중대한 것이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17:6). 이 말속에는 체제 전복이나 선동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그들의 활동은 명백히 가이사의 칙령을 어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또 하나의 ‘황제’(왕)예수를 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6~7절)라는 뜻이다.

이들이 고소한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당시 로마는 황제 숭배 사상을 강요하고 그것을 이데올로기화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가이사와 그 후계자들은 신으로 추앙받고 있었고, 사도행전 17:7에 나오는 ‘가이사의 명’ 은 황제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이 황제의 명을 거슬러 황제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라 부르고, 그가 통치하는 새 시대가 왔다고 했을 떄 어떻게 보면 로마 정부와의 정치적 대결을 초래한 듯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바울 자신은 제국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라고 가르치는 데 주의를 기울였지만, 바울이 가는 성읍마다 이런 소동이 일어나지 않은 적이 드물었다. 데살로니가 읍장들 앞에서 바울에게 덮어씌운 고소는 이처럼 정말 교묘하게 짜여진 것이었다.

 

읍장들은 이러한 중대한 죄명의 고소 사건을 듣고 그 진위를 조사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음모에 쉽사리 말려들지는 않았다. 관리들은 이 소동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세 전도자들을 집에 받아들였던 야손에게 그의 집에 있던 손님들, 특히 바울이 치안을 방해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보장을 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9절). 이를 보장하기 위해 야손은 사도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기를 막는 일에 동의한다. 읍장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소동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조치에서 바울이 즉시 데살로니가를 떠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은 떠나기 싫었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의 안위가 결부되어 있었고, 이미 야손이 읍장에게 바울 일행을 내보내겠다는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10절). 후에 이런 상황을 빗대어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이 아마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성도들을 버리고 자기만 도피했던 비겁한 사람이었다. 또한 바울은 돈을 받을 정도의 기간만 데살로니가에 머물다가, 또 다른 여정 가운데서 만나는 귀부인들에게 더 많은 돈을 모으려는 속셈으로 그것을 미련 없이 떠난 삯꾼 목자이다.”

이렇게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그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그 당시 데살로니가를 그렇게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살전 2:·17). 이제 막 세워놓은 교회를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가르침과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소동의 여파와 강제추방으로 인해 어린 교회가 박해 앞에 놓였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게 된다.


17:10~15

베뢰아 전도

데살로니가에 있던 동료들은 밤을 이용해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낸다. 베뢰아(Boroea)는 데살로니가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으로, 주요 도로인 비아 에그나티아로부터는 남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키케로(Cicero)가 베뢰아를 ‘도로에서 떨어진 성읍’ (oppidum deuium)이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이 성읍이 비아 에그나티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주요 도로를 따라 전도 했던 바울이 이런 외딴 곳에 위치해 있는 베뢰아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료들이 그들을 보낸 곳이 베뢰아였기 때문이고, 그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복음 전파의 기회로 선용한다. 이곳에서도 그는 이전의 다른 도시들에서 했던 사역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한다. 베뢰아에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 곳에서 ‘자신의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정중하고 편견 없이 들어 주었다. 본문에서는 그 곳에서 한 바울의 설교 내용이 나타나고 않다. 하지만 그의 설교가 백성들로 하여금 성경을 스스로 연구해 보도록 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제 이 유대인들 곧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신사적이어서(편견이 없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 단지 일 주일에 안식일에만 바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를 만나 매일 대화를 나누면서- 성경을 상고 했다(11절). 누가는 분명 바울의 설교에 대한 그들의 열심 및 성경 연구에서의 그들의 근면함과 편견없는 개방성을 함께 칭찬하고 있다.

바울은 또다시 데살로니가 유대인들로부터 새로운 반대와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베뢰아의 교우들은 이 지방에서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바울로 하여금 마게도냐에서 떠나 있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바울로 베뢰아의 신자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실라와 디모데를 거기에 남겨두고 자신은 아덴으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베뢰아의 교우들은 바울을 해안으로 데리고 가서 아가야 지방에 있는 아덴으로 갔다. 베뢰아와 아덴 사이에 있는 테살리(Thessaly)지방이 위치하고 있었지만, 테살리는 바울에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바울을 아덴까지 호위해 갈 때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들은 디모데와 실라에게 자기와 빨리 합류하라는 바울의 지시사항을 가지고 돌아왔다.


17:16~34

아덴 전도

아덴(Athens)은 주전 5세기 이래 가장 주요한 도시 국가 중 하나로, 헬라의 수도였다. 당시 아덴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3대 도시중의 하나였고, 세계 문명의 발상지로서 철학과 문학, 예술 등 헬라 문화의 중심지였다. 비록 바울 당시의 아덴은 로마에 합병된 상태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유시로 취급되었고, 독립성을 보존하며 로마 제국의 지적인 중심지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 있던 아덴에서 어떤 때는 회당에서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 예배자들에게 설교하기도 하였고, 또 거리와 아레오바고 의회에서는 에비오구레(the Epicurean)와 스도이고(the stoic)철학자 들과 만나 변론을 하기도 하였다. 스토아 학파는 금욕적이고 범신론적이며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부정하고 사물의 영원성을 믿는 반면,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삶의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창조를 부인하고 생명의 발생이라든가 운명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역시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다.

바울이 일련의 철학자들에게 붙들려 갔던 아레오바고 의회는 유명한 법정이었다. 그곳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을 공정하고 정확히 처리하였으며, 특히 종교적인 문제들에 관한 것들을 자주 다루고 결정하곤 했었다. 그곳에 있던 청중들의 일부는 바울에게 커다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지만(17:17~18,20~21), 대부분은 적의를 품고 바울이 메시지를 전하기도 전에 바울을 말장이라고 시비를 거는 등 양분된 모습을 보였다.

 

사도행전에는 9편의 바울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 아레오바고 설교를 제외한 8편의 설교는 디아스포라 회당들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행해진 설교였다. 오직 아레오바고 설교만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직접 설교한 유일한 선포의 양식이었는데, 누가 조차도 이 설교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통상적인 전도 설교였다고는 보지 않는다. 아덴의 청중들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관에 대해 처음 듣는 이방인들이었다. 이런 청중들을 대상으로 바울은 성경 계시를 토대로 자신의 메시지를 설명하고 변증하며 구약의 예언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는데, 이는 청중들이 구약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당시 여러 철학 체계의 토대를 이루고 있었던 철학 원리로부터 어떤 논증도 끌어 오지 않는다.  단지 헬라 시인의 말을 몇 마디 인용할 뿐, 바울의 설교는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만유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말하다가, 만유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으로 끝나고 있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믿음과 회개를 주관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설교의 주제는 세 가지이다. 먼저 설교의 도입부로 아덴 사람들의 맹목적인 종교성과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22,23절), 이어 전개부에서는 창조주의 신적 개념을 소개한 후(24~29절), 설교의 본론부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믿음과 회개와 공의와 심판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선포하며 그들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30,31절).

 

첫째, 바울의 아덴에서의 설교는 그 어느 메시지에 비해 차분하고 신중하며, 냉철하고도 논리적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는 전도자 바울이 청중들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적응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둘째, 바울은 설교를 시작할 때 그들의 상황과 관심사에 맞게 출발하지만, 설교의 본론은 유대 사람에게나 아덴 사람에게나 구별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과 은혜의 복음을 담대히 설교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드러내었으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사건, 즉 탄생, 고난, 죽음, 부활 등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능력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그리고 구속 역사를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은 자연과 인생과 역사에 대해서 절대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용기 있게 과감히 설교하였다.

셋째, 바울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은 항상 구속 사역에 대한 윤리적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다른 설교의 결론 부분과 마찬가지로 17장에 나타난 아레오바고의 설교에서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우상 숭배를 지적한 후 결론적으로 과거의 잘못된 우상 숭배를 회개하라고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삶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30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천하를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1절). 역사 속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역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만 설명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메시지에 대한 청중의 결단을 촉구했던 것이 바울 설교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설교한 결과 몇몇의 유력한 사람들이 회심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도 있었고, ‘다마리’라는 부인도 있었다(34절). 또한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더 이야기하기를 희망하였지만 결단을 연기하는 정도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다.(32절)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희롱하며 기독교의 독특성을 비웃기도 했는데, 이는 헬라 사상에 젖어 있어 전혀 낯선 ‘몸의 부활 교리’를 잘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바울 스스로도 아덴에서의 이 설교의 효과가 자신의 기대에 못 미쳤음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 다음 도시인 고린도에서는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알지 않기로 마음 먹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고전 2:2절 참조).


 사도행전 17장에 나타난 바울 설교의 특징

지금까지 사도행전17장에 나타난 바울의 두 메시지를 살펴보았다. 그 분석을 토대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 설교의 특징을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역사적인 사건을 선포

바울의 설교는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나 교리, 혹은 윤리를 전하는 것이었다기 보다는 기독교의 핵심인 ‘그리스도 사건’을 사실대로 선포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 속성, 사역의 내용과 방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설교함에 있어 상황이나 청중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사도적 권위를 가진 증인답게 역사적 사건을 선포했다.

나. 구속사적 해석

바울은 자신이 선포한 역사적 사건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 진술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그역사속에 일어난 일련의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선상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한다. 바울의 이러한 설교 방식은 사도행전 17:2~3에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바울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설교하였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 사건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요 ‘절정’으로 이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구속의 새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포했던 것이다. 또한 이 성취된 구원이 완성의 날을 바라보며 이미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즉 ‘이미’와 ‘아직 아닌’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삶의 정황에 맞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 개인적 결단을 촉구

바울은 역사 속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역을 단지 사건으로만 설명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메시지에 대한 청중의 결단을 촉구했는데 이것이 그의 설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그의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강조한 윤리적 결단은 구속사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시고, 또 친히 주도권을 잡으시고 성취하신 것으로서, 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보고 듣는 자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이 거룩한 역사에 역행했던 것을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라. 상황 적용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이루어진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는 구속사를 성취하신 분이요,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설교했다. 그의 메시지의 내용은 한결같이 일관성을 유지했지만, 적용의 과정에 있어서는 복음을 받는 지역과 청중들의 상황에 맞도록 적절한 변화를 주었는데 이것이 바울 설교의 특징이었다. 복음이라는 놀라운 보배를 상황이라는 질그릇에 담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작업에 있어서도 바울은 우리에게 탁월한 교훈을 주고 있다. 바울의 메시지의 내용과 그 상황적합성은 오늘의 설교자들에게도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도행전 17장에서는 데살로니가, 베뢰아, 그리고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가 기록되어 있다. 17장을 연구하면서, 특히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보면서 분명히 확인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바울은 그의 메시지를 예수 그리스도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고 밝히면서, 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으로 그의 설교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그의 설교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하고 있는가? 이는 그가 예수님의 교훈이나 지상 사역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위대한 ‘구속사의 중심이 되는 사건’이며, ‘성취된 구속사역’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설교에는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의 설교와는 달리 예수님의 지상 생애 때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설교의 중심이 된다. 이것은 바울이 묘사한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예수이고,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역사적 인간적인 예수라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가 진보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하여 자세한 데까지 언급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사역의 구속적인 선포’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에 대해 설교할 때 그의 생애나 교훈에 중점을 두었던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그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바울에게는 이 세상에 사셨던 예수님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대신에 예수님은 새 시대를 여시며, 하나님나라를 도래케 하신 메시아적 임무를 가진 분이며, 부활하신 후 하나님에 의해 높임을 받은 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그의 설교에서 이 구속 사역의 실현을 가능케 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실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요, 그 결과 우리는 바울의 복음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타난 바울의 설교는 이처럼 철저한 구속사적이요 이스라엘 시작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사건까지를 구속사의 큰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메시지는 단지 17장뿐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9편의 설교에서 공통적으로 보여 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바르게 전하려는 깊은 열정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난 설교자들을 많이 보게 된다. 성경 본문을 떠난 설교는 종교적 주제를 언급하는 신학 강의나 연설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설교일 수는 없다.

바울은 모든 성경을 구속사의 구조 속에서 이해하고,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해석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이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또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 전파에 진력하는 복음전파의 자세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현실이나 청중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