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사도행전16장,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호리홀리 2015. 6. 3. 11:49

16장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 위해 동역자를 선택하는 15장의 장면 뒤에 연결되어진다. 15장에 이어서 16장(1-2절)에서 시작되어지는 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서 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동역의 기쁨을 느끼는 바울을 그릴 수 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커다란 인상적인 경험들을 가진다. 바로 스데반의 죽음과 자신의 소중한 동역자 바나바와의 결별이다.(15장 후반) 이것들은 사도바울에게 낙담되며 괴로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저자 누가는 이러한 고통을 반전하듯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디모데라는 청년을 그의 동역자로 맞이하게 된다.

3절에서 나오는 디모데의 할례의 장면에서는 15장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나온 규례들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여진다.(참조 행15:28-29).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규례들을 무시하거나 율법을 중시하는 행동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디모데는 그의 할머니 그리고 그의 어머니까지 유대인이었다. 남편은 헬라인임을 나타내주는 성경본문을 통해서 그는 반유대인(half Jewish)임을 알 수 있다. 할례를 디모데에게 행했다고 해서 바울이 할례를 통해서 구원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유대계 그리스도인 (Jewish Christians)에게 전도하는 데에 있어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들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유대인의 율법과 구원의 방법이 반드시 상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의 이런 의도로서의 할례라는 것을 증명하듯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결의된 규례들을 헬라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에 준 이후 교회의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 했다라고 강조되고 있다.(16:5). 정확한 숫자를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성령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성령의 막으심으로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쓸 때,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디모데를 바울이 부른 것처럼 사람이 자신의 계획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계획까지도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부름,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부르심을 대조하면서 궁극적인 성령의 능력을 보게 한다. 사람이 일하는 것 같지만 결국 성령께서 일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6절에서의 성령, 7절에서의 예수의 영 그리고 10절에서의 하나님까지 사도바울을 인도하는 분이 부르는 것이 달라짐을 본다. 단지 명칭을 바꾼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원초적인 삼위일체  신앙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의 사역과 초대교회의 사역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드러내주고 있다. 사도바울 역시 자신의 계획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일이란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바울은 성령이 말씀하실 때 지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자였다면 그는 고민을 하거나 자신의 계획을 끼워넣기 위해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민감하게 성령의 이끄심을 따랐고, 성령이 말씀하실 때 즉시 반응하며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 스스로도 성령께서 자신의 사역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0절부터는 우리라는 칭호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것은 저자가 자신이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역팀 가운데 네 번째의 동역자로 합류하였다는 것을 조용히 드러내는 것이다. 누가가 이곳에서부터 1인칭 복수인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누가가 저자이라면 궁금한 점이 생긴다. 누가는 드로아에서 의사로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아니면 항해할 때의 의사로서 합류하기위해 기다렸는지가 궁금점으로 남는다. 물론 정확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누가는 바울의 비전에 반응하여 마게도냐로 가는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이제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서 빌립보에 이른다. 거기서 기도처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누가는 작은 모임이었지만, 거기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컸음을 이야기해준다. 바로 다음 절에서 그것들을 볼 수가 있다. 이 루디아의 집은 유럽선교의 첫 번째 거점이 되는 곳이다. 작은 모임이었지만 이것을 통해 성령께서 일하셨음을 볼 수 있다. 사도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사역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저자 누가는 계속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누가는 16장을 통해서 예수께서 속박된 인간을 자유하게 하신다라는 사상을 표현한다. 귀신에 매여있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케한다. 그러나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은 예수그리스도가 주는 자유함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 선포되어지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인간의 무관심이 대조적으로 보여진다. 귀신들린 자는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에 비하여 주인은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는 오히려 복음의 입장에서는 그가 정신나간 사람으로 보여질 수 있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만 바울과 실라를 고발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했던 이유는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퇴거령 이후이기에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반감들이 작용했음을 볼 수 있다. 4명이 사역을 하는데 두 명만 핍박을 받은 것에 대한 궁금점이 남기도 하지만 이것을 유대인의 반감이라는 부분을 가지고 생각해 본다면 이해가 되어진다.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이지만, 디모데는 반헬라인 그리고 누가는 헬라인이었음을 본다면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부추겨서 잡아가게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23절 이후에 나오는 핍박은 유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에 의해서 가해진 첫 번째의 핍박이다. 이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힌다. 여기서는 누가의 문학적인 역설이 진가를 발휘하는 부분이다. 16장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가만해 볼 때 이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고 풀려나는 부분은 역설을 지닌다. 간수는 사람을 가두는 사람이다. 1세기의 사회가 명예와 수치의 중추적인 가치를 지녔다. 또한 구금이란 1세기 사회에서 볼 때 대단한 수치일 수 없다. 다시말하자면 간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빼앗고 수치를 안겨주는 자이다. 상대적으로 바울과 실라는 속박과 수치를 가지게 된 자이다. 하나님을 옥에서 찬미하는 바울과 실라를 통해서 옥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풀렸다. 누가는 여기서 반전을 보여준다. 바울과 실라는 자유와 명예를 지닌 자로 그리고 간수는 사회적으로 구금과 수치를 면치 못할 상황을 그리는 것이다. 결국 누가는 자유를 속박하는 간수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자유가 필요한 자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속박되어있고 수치를 당하는 것 같이 보는 바울과 실라는 남을 자유케하는자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자로 드러나는 것이다. 간수의 이후의 행동으로 자신에게 진정으로 자신을 자유케 하시는 분, 그리고 자신을 명예롭게 하실 분을 알기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사람들을 속박하고 자유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간수는 진정으로 사람을 자유케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에게 없으며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전개되는 바울의 태도는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지금까지 매를 맞으면서도 한번도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가 이제야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이야기했을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복음을 위해 핍박을 기쁘게 받았던 것이다. 또한 이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이 앞으로 잡힐 때에도 영향을 있을 것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핍박 후 시민권임을 밝혀서 앞으로 있을 수 있는 공동체가 당할 핍박 가운데 불공정한 것들을 막으며, 함부로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수 없도록 하는 의도가 담겨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온전한 전도자였다. 또한 바울의 구금은 앞으로 시작될 바울의 사역을 비추어주는 실마리가 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