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사도행전15:36~41,바울과 바나바의 이별

호리홀리 2015. 6. 2. 13:23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모교회인 안디옥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동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열정에 불타있는 바울이 바나바에게 먼저 제안을 합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2차 전도여행입니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먼저 2차 전도여행을 살펴보면
36,[ 주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
2차 전도여행은 바울이 먼저 바나바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복음전도한 사람들 어떻게 신앙생활 하는지 심방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2차 전도여행은 전도여행이라기 보다는 양육여행이라 해야 맞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한 말 가운데
[ 형제들이 어떠한가? ] 라는 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복음의 씨를 뿌려 전도했던 사람들,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까지 복음을 전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주고
기적과 표적을 통해 새사람이 되었던 그 사람들의 소식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형제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 형제들이 어떠한가? ]
혹 시험에 들지는 않았을까? 핍박에 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을까?
혹 유혹을 받아 신앙의 변절자가 되지 않았을까?
이것은 자식을 둔 특히 약한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이 애틋한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형제들을 심방 가자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양육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37-38절에  [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 고 하는 의견 대립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지도자인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마가를 두고 심각한 의견의 불일치를 보인 것입니다. 성경은 불일치를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일치를 옳다고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불일치는 죄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도 의견은 항상 일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13:13절에
1차 선교여행 때, 밤빌리아 버가에서 도중하차하고 떠나버린 마가를
다시 선교팀에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마가를 놓고 바나바와 바울이 다른 견해를 가졌던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 옳으냐? 그르냐? 판단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마가의 선교팀에 가입문제를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은 말이지요. 불일치가 이루어지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나바의 생각을 말씀에서 봅니다.
37절에 [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
바나바는 마가를 어렸을 때부터 돌봐 준 마가의 삼촌입니다.
혈육의 입장에서 볼 때, 마가가 이해가 됩니다.
적어도 바나바가 볼 때는 한 번 실수는 했지만
기회만 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청년 일군으로 본 것입니다.
본래 바나바는 이름에서 보듯이 [ 권위자 ]입니다.
즉 권하고 위로하는데 이력이 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선교여행을 다시 가겠다고 나서는 마가를 선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누구에게나 결정적인 데서 힘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릅니다.
38절에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가와 함께 자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사를 철두철미하게 해낸 사람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남다릅니다
영적싸움터인 선교지에서 몸이나 마음이 좀 불편하다고 해서
팽개치고 돌아가 버리는 마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 모두 다 이해가 됩니다.
두 사람의 의견에 모두 타당성이 있습니다.
다만 서로가 보고 이해하는 관점이 다름을 이해하게 됩니다.
불일치가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로 볼 때는 심각한 위기가 왔습니다.
선교정책에 있어 일대 혼선이 온 것입니다.
더구나 두 사람이 교회에서 갖는 영향력을 생각해볼 때,
이 문제는 반드시 지혜로운 답을 얻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모름지기 바나바와 같은 덕장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강한 제동 또한 옳습니다.
옳은 말이지요. 선교지는 영적 전쟁터와 같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전쟁터에서 힘들다고 탈영해버린 탈영병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분명 점검해야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바나바가 바울과 계속적으로 내 관점만 고집하면서 주장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여기서 깨닫는 교훈은
우리가 주의 일할 때 아무리 옳더라도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이견이 있을 수 있느냐?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관점과 해석과 문화적 차이 때문에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차이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고 합니다.
왜 싸우는지 아세요? 둘이 딱 만났습니다.
개는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면 고양이는 공격용 사인으로 받아들입니다.
고양이가 반가워서 꼬리를 내리면
개는 위험을 느꼈을 때 취하는 행동으로 여기면서,
“요게 나 보고 겁 먹었구나” 하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이게 문화적 차이의 결과입니다.
이 차이를 알게 되면 상대방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 수 있게 되고,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서로 도울 수도 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견공과에 속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반대로 고양이 과에 속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납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이견을 가지고 싸우더라도
1) 본질적인 것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2) 덕스럽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선교할려고 하다가 마가의 문제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9절 [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
바나바와 바울의 의견 차이로 심히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다툼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육탄전 같은 그런 다툼이 아닙니다.
바울도 나름대로 깊이 생각했고 바나바도 나름대로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람을 중요시 했고
바울은 선교를 중요시 생각했기 때문에 의견대립이지
결코 적대시 하는 다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람중심, 바울을 일중심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다툼이 일어났을 때 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바나바와 바울은 여기서 조용히 헤어집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를 지나 길리기아로 가게 됩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선택하여 구브로로 갔다는 것은 참 배려 깊은 일입니다.
구브로는 저들의 고향이요, 즉 마가가 실수했던 장소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기로 하고
마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려 깊은 사람이요
마가의 진정한 맨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나바를 가리켜 영국 성경학자 <바클레이>는 최선의 사람 바나바라고 합니다.
사람을 일으키고 세우는 데는 시금석 같은 인물입니다.
시금석 아시죠? 무슨 물건이든지 부딪히기만 하면 금이 되는 시금석
바나바는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위로하여 세워놓는 최선의 사람입니다.
적어도 바울이 보기에 싹이 노란 친구였지만
바나바는 싹이 노란 친구를 거목으로 가꾸어 놓은 사람이었기에
<바클레이>는 최선의 사람 바나바라고 별명을 부친 것입니다.
바나바의 이런 멘토 사역이 헛되지 아니하여
말년에 바울이 로마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바울은 이 마가를 필요한 존재로 귀히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딤후4:11절을 보면
[ 너는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리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 그리고 벧전5:13절에는 베드로가 내 아들 마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가가 베드로의 대필자로서
감옥 안에서 베드로의 말을 받아 마가가 기록한 것이 마가복음
즉 신약성경의 최초의 성경이요 두 번째 책이 된 것입니다.
최선의 사람 바나바의 격려가 싹이 노란 나무를 거목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바울도 바나바도 마가도, 서로에게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동역자로서 가장 필요한 사람인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다툼은 혈과 육의 충돌이 아니고
바나바의 어머니같은 관용심과 바울의 아버지같은 엄격성의 충돌이며,
또 이 두 분의 그 다른 두 면이 마가의 믿음 회복과 온전한 인격 형성에
결국은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제 바나바와 바울이 헤어져서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를 거쳐 길리기아로 갑니다.
우리는 잘 만나야 하지만 헤어지는 것도 잘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헤어질 때
이견 차이가 있었을 때는 서로가 격해서 심히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돌아서서 서로 비방하고 헐뜯고 고소하고 그러지 아니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헤어질 때
우리가 꼭 지켜야 할 3가지가 있습니다.
1) 조용히 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39절에 [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

2) 40절 [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
즉 은혜스럽게 떠난 것을 말합니다.
3) 특히 교회 안에 헤어짐에 있어서 관심은 교회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41절 [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
바울의 관심은 오직 교회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서라면 핍박을 받아도 좋고 매 맞아도 좋고
굶어도 좋고 감옥에 가도 좋은 것이 바로 바울의 삶의 철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