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명령(1:8)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고 15:2까지 그 곳에 남아 있었다. 결국 미래에 대한 약속을 붙자고 나아간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 안의 이중 문화권에 속한 소수의 무리였다. 누가는 그들(6:5)중 두 명의 지도자인 스데반과 빌립을 제시한다.이제 교회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일곱 명을 선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다. 그 중에 스데반이 있었다.
스데반이 얼마나 성령 충만하였는지를 알아보자, 사도행전 6장 1절부터 15절까지 ‘지혜와 성령의 충만’이라는 단어가 무려 4번이나 등장하고 있다.
스데반의 성령 충만과 도저히 비길 수 없음을 깨달은 위인들은 결국 술수와 권모로 향한다. 그 술수는 먼저, 있지도 않은 사실에 대한 조작이다. 또한 집단을 개입시킨다. 특히 신성모독이라는 주장은 유대 권력층이 가장 즐겨 사용하고 애착을 갖는 대상이다. 이것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주제다. 이 죄목의 적용은 군중의 호기심을 끌기에 가장 확실히 도움 되는 항목이었다. 수많은 선지자들 뿐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이 신성모독죄로 몰아넣었던 그들이었다. 관원들, 권력층은 가장 먼저 자기들의 위치 확보를 위해 내막을 잘 모르는 백성과 이미 시기심으로 무장한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킨다. 게다가 거짓 증인들까지 세워두었다. 그들은 집요하게 준비하고 대응하였다.
고대인은 위증을, 거짓 증인이 그 이름에 맹세한 신애 대한 모욕으로 여겼다. 사형 사건에서 거짓 증언을 한 것이 발견되면 그 거짓 증인은 사형에 처해졌다(신19:18-10). 이는 로마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스데반이 대제사장의 심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고소자들의 증거를 절반은 확증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율법에 대해서는 찬성했지만, 성전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유대 전승은 성경에 근거한 조상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을 찬양했다. 그러한 전승의 변호자들은 스데반을 배교자로 보았을 것이다. 재판에서는 고소하는 자들이 먼저 말했다. 분명한 것은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하고, 이 사람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라고 하는 충동과 거짓 증언과 스데반을 침몰시킬 준비가 다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7:1
예수님의 명령은 스데반을 시작으로 출발한다. 스데반은 6장에서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로 임명된 후, 7장을 끝으로 순교한다. 사도행전 7장의 그의 설교는 자그만치 52절로 구성되어 있다. 첫 째 이방 선교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둘째로 연이어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개명 전 사울)출현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그의 마태복음 28장과 사도행전 1장 8절의 ‘땅 끝’ 선교의 시작을 알린 첫 사도라는 측면에서 그의 사역은 중요한 것이다.
대제사장은 피고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 그의 폭넓은 질문은 스데반에게 고소 내용을 부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이에 변론 기회를 얻은 스데반은 대제사장 앞에서, 관원들과 장로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훑어 나간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의 설교는 자신을 성전 모독죄로 고소한 데 따른 변증인데, 성전이 결코 숭배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기보다 앞선 구약의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증거되었으며, 나아가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그들을 엄중 탄핵하며 죄악을 낱낱이 파헤치는데 있다.
7:2~53
스데반의 반성전적 이야기
스데반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밝히기 위해 이스라엘 역사를 반복해서 서술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역사적 회고). 사도행전 7:2-53절을 자세히 보면 스데반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분명해진다. 그는 자신에 대한 고소 내용에 답변하는데, 성전, 심지어 이스라엘 땅도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잠시 동안 행하시는 일에 반드시 핵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같은 주장을 했으나(렘 7장, 요나서), 스데반은 적어도 그들이 받았던 만큼의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스데반은 아브라함 이야기로 자신의 변론을 시작했는가! 당시 팔레스틴 유대 전승은 이스라엘 땅의 특별함을 강조했다. 심지어 어떤 스승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에서만 직접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주장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부르셨지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동쪽인 메소포타미아에서였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데반은 지리적인 강조를 하면서 이스라엘 땅의 전승을 아브라함의 거주와 이주에서 찾고자 했다. 이것은 스데반이 전략적인 계산에서 출발한다. 이제 서서히 스데반은 반 성전적 설교를 시작한다.
스데반은 역사적, 신학적 견지에서 잘 설명했다. 그의 긴 변론은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고 무죄 판결을 받고자하는 석방의 테마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성전 당국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당한 예수를 위한 변론이었으며, 율법과 성전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하고 있는 당대의 지도자들을 개혁시키고자 함이었다. 한 마디로 성전 당국자들의 회개를 위한 변론이었다. 이 변론의 시작은 이스라엘 민족사에 대한 개관으로 시작된다.
① 7:2~7 - 아브라함 이야기
② 7:8~16 - 요셉 이야기
③ 7:17~34 - 모세 이야기
④ 7:35~44 - 광야 노정기
⑤ 7:45~53 - 성전이 건축기와 반 성전적 설교
⑥ 7:54~60 - 스데반 순교와 사울 출현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와 모세의 시대, 성전이 건축된 시대로 나누어 민족사를 열거한다. 자칫 우리는 스데반의 이 이스라엘사 개관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에서 너무 벗어나 있고 또 지루하게 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스데반이 이스라엘사를 개고나하게 된 동기와 배경, 그리고 그 내용이 시사하는 바의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이스라엘 사를 중점적으로 구분한 이유는 첫 째, 유대인들이 조상의 역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경청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 당국자들의 주의와 관심 속에서 자신의 변론을 전개하기 위해 스데반은 이스라엘사를 개관한 것이다. 둘째로 스데반은 나름대로 예리한 해석의 바탕 위에서 이스라엘사를 개관하였다. 다시 말해 왜 성전이 무용하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사실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하는 방향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개관했던 것이다.
먼저 그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대 개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열조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이 결코 가나안 땅에서가 아님을 역설하였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갈대아와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구원의 은총을 입었다. 이 사실을 부인할 유대인은 아무도 없다. 이것을 스데반은 정확히 지적했다. 이외에도 스데반은 그의 조상들이 의인 요셉을 헤치려했던 사실을 지적해 그들이 속성적으로 의인을 핍박해 왔음을 간접적으로 강조하며, 야곱을 비롯한 조상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속하는 세겜에 묻혀 잇음을 지적하여 유대인들의 지나친 지역적 편견에 일격을 가하였다. 둘째로 모세 시대사 개관을 통해 스데반은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그리고 이스라엘 밖에 있는 시내 산의 거룩함을 지적하면서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조상들의 반역 행위, 즉 민족 해방을 위해 나서려는 모세의 의기를 꺽어 버린 조상들의 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감행한 죄를 지적하고 있다. 셋째로 성막과 성전의 건축 역사를 통해 스데반은 하나님이 결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전에 거하시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맨 처음 성전의 기원은 성막에서 찾을 수 있다. 광야에서 성막이 지어지고 역사의 흐름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자 고정된 성전의 필요성에 의하여 성전 건축 문제가 대두되었고 그나마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 했지만 하나님은 이를 허락지 않으시고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야 허락하셨다는 것을 정확히 지적하여, 성전을 지은 솔로몬 조차도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지 않음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떠받들고 높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스데반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조상들의 유전과 습관에 따라 의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고발이며, 율법을 범한 것은 자신이 아니요 바로 공의회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까지 설교가 이어지자 스데반을 둘러싼 무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스데반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정곡을 찔러 오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현실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도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스데반의 설교가 명백한 이성과 실체를 찾아 갈수록 그들은 더욱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스데반의 설교는 모인 무리들에게 거침없이 나아갔다. 스데반은 그들을 질타하면서 동시에 무리들이 깨닫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무리들의 분노는 이 설교를 듣고 마침내 폭발하였다.
스데반의 날카로운 죄의 지적은 공회 의원뿐 아니라 이를 지켜보던 공회의 동조자들까지도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자신을 영접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보좌에서 일어서신 것을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스데반이 사형의 판결을 받았느냐 안 받았으냐 하는 것은 논란의 대상이지만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항하려고 큰 소리를 질러대었다.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죄책의 고통을 소리로 물리치려 하였다.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안 될성 싶었다. 그들은 스데반을 성밖으로 내쳤다. 그것은 유대법에 성안에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법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예수님도 성밖으로 끌려나가신 것이었다. 그들은 돌을 쳐들었다.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스스로 믿었다. 자신들의 행위가 교회를 위한 일이라고 이를 앙다물었다. 자신들이 돌에 맞아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기 위해 더욱 세차게 돌을 던졌다. 돌팔매질은 갈수록 드세고 맹렬해져갔다. 육체의 고통이 더할수록 그의 영혼은 평온함에 이르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숨막히도록 고요하고 평화로운 그의 모습은 이미 죽음을 뛰어넘었다. 그의 낯빛에서 적개심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원수 갚음도 복수심도 그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또 보았다. 스데반의 기도는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와 똑같았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이 기도는 용서와 화해의 기도이다. 자신을 돌로 치는 무리들에 대한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였다. 그 같은 상황은 돌로 치는 무리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그들은 결코 깨달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7:54~60
스데반 순교 이후 이야기
스데반의 순교 후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시작되었다. 사울과 그 일당의 적개심 앞에 교회는 일거에 무너져 가는 듯 하였다. 사도들 외에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다. 겉으로는 그랬다. 그들은 스데반의 순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 그렇게 돌아가셨음을 생각하고 모두 슬피 울었다.
스데반의 장사 후 제자들은 유대 각지로, 사마리아로, 이방으로 흩어졌다. 예루살렘교회는 이제 소생하기 어려운 듯 하였다. 교회는 숨을 죽였다. 소수의 사도들만 교회를 지켰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죽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있었다. 간신히 목숨만 붙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생명력은 밖으로부터 넘쳐나고 있었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핍박을 통해 제자들을 거세게 밖으로 내몰았다. 성령께서는 이제 모이는 교회보다는 흩어지는 교회를 원하셨다. 성령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안주하길 원치 않으셨다.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읍에 모여서 그들만의 교회를 만들기를 원치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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