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5:11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무슨 물건이라도 서로 통용하게 된다(행4:32). 많은 사람이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고 성령의 감동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예루살렘교회의 나눔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순전히 자발적이며 결코 영속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의도된 일은 아니었다. 이러한 임시적인 행사는 오순절을 위해 다른 지역에서 예루살렘까지 온 개종자들이 원래 계획했던 기간보다 더 오래 머물면서 그들이 새로 발견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우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온전히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성령이 활동하는 교회 단체들은 하나의 유기체 한 인격으로 행동하였다. 또 한가지는 사도들에게 머지않아 재림하실 주님에 대한 대망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지상의 것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는 것도 들 수 있다.
믿는 무리가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것은 2:42-47에서도 나오고 있다. 4장에서는 좀더 자세히 공동체의 재산을 관리하는 지도자들의 역할을 언급한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 4:35) 구제의 관리에 대해서는 사도들에게 위임되어 있었다.(행5:2-3) 그렇다고 사도들의 독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가장 충성된 종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을 의미한다. 물질은 필요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필요를 따라 (4:35)는 물질이 욕심을 채우는 재물이나 보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뜻한다. 필요치 않는 것을 나눠주지 않았다. 살아가는데 일하는데 필요한 물질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누가는 여기서 바나바를 등장 시킨다. 바나바는 레위인으로 레위인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일종이다. 그들은 성막과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성별된 지파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 할 때에도 그들은 성막을 메어 나르는 일을 했고 그리고 제사장을 보좌하는 일을 했다. 성전에서 예배 시 노래하는 일도 하였다. 재판관 혹은 감독으로 그 직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바나바란 뜻은 “예언의 아들”이란 뜻인데 그가 실제로 이름의 뜻처럼 되었다.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말할 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고전 14:3 행 15:32). 또 성경에 바나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행11:23-24)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출생한 레위인이다. 레위인은 본래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 산업이라 하였다. (신15:4,5) 이 때는 땅을 소유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제도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후 점차 완화되어 바나바가 가졌던 소유를 비싼 값으로 팔았고 그 판 돈을 조금도 제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도들 발 앞에 기쁨으로 내 놓았다.
그러나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크게 인정을 받은 것은 단순히 밭을 팔아 바친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 전체에 나타난 헌신의 결과였다. 그러나 곧이어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와는 대조적인 사람들이었다. 아나니아는 바나바의 삶 전체에 나타난 헌신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외형적인 것만 보고 자기들도 바나바처럼 교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들은 거짓과 위선에 둘러싸여 있었다. 당시의 경건한 성도들처럼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바치는 일에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 않고 따로 해서 자기들이 바치는 것을 생색내고 칭찬을 받고 싶어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다는데 우리에게 중요한 뜻이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육적이면서도 영적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가 주님께 속해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복음이 여자들을 위한 복음 (the Gospel for Women)이라고 불리지만 삽비라는 그 역할만 담당했을 뿐 금방 사라졌다. “예 이뿐이로라.” 라는 말이 전부였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의도도 다 아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속임수를 없애기 위해 분별의 영을 주신 것이다. (고전 12:10)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을 두 가지로 지적했다. 첫 째, 아나니아의 죄는 사탄으로부터 왔다.(행5:3) 둘 째, 아나니아의 죄는 안으로부터 즉, 그의 마음으로부터 왔다(행5:4)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지은 죄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죄라고 했다. 교회는 그리스도 몸의 한 부분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엄격한 그리고 적어도 비정상적인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원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에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를 죽이셨던 것(레10장)과 마찬가지고 교회의 역사 초기에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음으로 벌하셨다. 두 시기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순수함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셨던 때였다. 누가는 바나바와 아나니아 부부를 통해 공동체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교회 초기에 이런 것이 정비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온전히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사단이 교회를 해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외부의 핍박이요 또 하나는 내부로부터 부패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핍박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부의 부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정결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거짓이나 속임을 엄하게 벌하셨다. 이는 교회의 장래를 생각하고 사단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아나니아 사건으로 유무상통의 생활은 퇴색하게 되었으나, 교회는 적극적인 성결을 유지하게 되어 사도들은 본격적인 사역에 나서게 되었고 교회는 부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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