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사도행전4:1-12,최초의 핍박

호리홀리 2015. 6. 1. 12:03

4:1-12

 예루살렘 교회가  성장해 가고 있었으나(행2장)  핍박과 환란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최초의 핍박인 사도들의 체포 사건(행4장)은 앉은뱅이의 내러티브가(행3장) 그 동기가 된다. 베드로와 요한의 정기적 기도시간(하루 세 번 3시,6시,9시)에 일어난 사도들의 최초의 기적인 앉은뱅이 사건은 많은 증인이 있는 가운데 행해졌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행해졌다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관원들이 부인할 수 없는(행4:16) 플롯을 형성하게 된다.

베드로의 설교와 사도행전 전체의 강조점은 기독교의 믿음이 새로운 믿음이 아닌 유대교의 완성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되게 하고 완성되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한 말씀과 이적이 행해지고 있는 동안 성전 사태는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들의 예수에 관한 부활의 증거에 대해 충돌하게 되는 내러티브를 만든다.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사도들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반대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역사가이기도 한 누가는 초대교회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들에 매우 민감했다. 정기적 기도시간에 만난 앉은뱅이는 호구지책으로 동냥만을 구걸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이 앉은뱅이를 고치고 베드로의 세 번째 설교로 이어지며 그 결과 베드로와 요한은 옥에 갇히게 되며 교회 앞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후에 땅이 진동한 기도모임의 내러티브를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적이 유대주의자와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전말을 가리켜 주고 있다.    

제사장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도전함을 싫어한 이유는 제사장들은 베드로의 설교 내용으로  이스라엘의 죄 및 그리스도에 관한 주장을 용납할 수 없음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제사장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성전 맡은 자의 입장에서는 군중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성전 통행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폭동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꼈고 성전 질서를 파괴한다는 이유였다. 여기서 성전 맡은 자들이란 레위인으로 레위인이 교대로 성전 문을 지켰는데 각 조에서 조장이 한 사람씩 나와서 성전을 지키는 성전 수호장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성전 맡은 자는 레위인 만이 할 수 있었다. 이 당시에는 가장 중요한 직분으로 인정받았다.

거기에 더하여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찾아 나셨다. 그리고 현세주의자인 사두개인들은 다윗이 임명한 대제사장 사독의 후예라고 하기도 하고 (삼하8:17;왕상2:35) “의로운 자”라는 의미의 사디크(Saddiq)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후손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들은 토라 모세 5경만을 권위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가르치지 아니한 것을 교리로 규정하거나 설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들은 토라에서 부활을 찾지 못하였다.(간혹 부활을 찾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히11:19) 그래서 그들은 천사의 형태든 영의 형태든 부활 신앙을 거부하였다. (행23:8) 그래서 막 12장의 일곱 형제와 결혼한 여자에 대한 질문에 “부활 ”때에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라고 질문을 한 것이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것을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는 사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논리적인 추론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인정한 유일한 성경인 “모세의 책”에 나오는 본문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답하셨고 죽은 자들은 결혼하지 않는 천사와 같다고 가르치셨다. 그 후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경우를 들어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의 설교 내용을 들어 바리새인 보다 더 사도들을 공격한 것이다. (행4:1-3, 5:17) 이들은 거의 성전 운영에만 관심이 있는 귀족계급이었다. 당시 재직 중이던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의 양자였는데 사두개파의 두령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5:17) 어찌보면 남부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두개인들에게 내세의 소망은 필요 없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성전이 파괴된 70년 이후 사두개파는 변화된 유대교 상황에 적응할 수 없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당시 성전은 로마 군병들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있었으며 로마는 유대인의 폭동에 대해 철저히 탄압하고 있었다. 제자들이 옥에 갇힌 시간은 6시경으로 추정되는데 유대나라 재판은 아침에 행하는 것이 상례이다.(렘21:12) 해질 때에는 재판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잡힌 베드로, 요한의 재판도 다음날 아침까지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는가” 하고 묻는다(행4:7).  공회에서는 사두개인, 제사장들이 24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로는 오늘날 현대 교회의 장로와 그 성격이 좀 다른데 저들은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장로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에 속하지는 않았다. 공회에만 24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고 공회에는 22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율법 전문가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에 힘썼는데 이들도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대의 “자유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토라와 아울러 선지자들의 책을 권위있는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상황이 변함에 따라 새로운 깨우침을 얻기 위해 성경의 지속적인 구전 해석을 매우 강조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 대신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난하실 때 이 구전 율법집을 언급하셨다. 바로 이 구전 율법집이 미쉬나가 되었고 그 후 탈무드에 편입되었다(막7:6-8).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 산헤드린 공의회의 재판에 붙이게 되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유대나라에서 종교적 최고 의회로써 회의장 형식은 반원형으로 서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중앙에 피고인을 서도록 한다(막3:3,요8:3). 유대나라에서는 이렇게 재판 중앙에 죄수를 세우고 재판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이같이 사도들도 똑같이 죄수로 취급해서 중앙에 세워놓고 은근히 위압을 주고 굴복시키려는 계략적 재판을 하였다.

베드로의 답변은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 말하였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에게 담대히 공의회 석상에서 말하였다. 병인을 고친 착한 일에 대해 무슨 시비가 있느냐? 또 그가 구원받은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인간이 왈가불가 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 대해 어떻게 항의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형식으로 베드로는 강경하게 답변하였다(행4:9). 또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해 말할 것이 없다 하였다. 병자가 나음을 받은 선한 일에 어떻게 시비가 있을 수 있느냐는 답변하였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셨다(눅6:6-11). 예수님은 비록 안식일이지만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이 내러티브는 제자들의 예수와 같은 사역에 있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분을 내게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관원, 장로, 서기관들은 율법, 조직, 제도에 사도들을 얽매어 꼼짝 못하도록 획책하였다. 즉 사도들을 자기들의 권한 밑에 두려고 하였다. 이것은 현 우리네 교회 실정과도 같다.  교회에서는 많은 조직과 제도를 만들어 놓고 그것 우선으로 교회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기에 많은 물의가 따르기도 한다.

베드로는 이어 앉은뱅이를 건강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자기가 행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첫 째, 너희가 십자가에서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것이라 하면서 너희는 분명히 살인자라 하였다. 둘 째,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사람을 건강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행4:10) 베드로의 말은 부활의 주님을 분명히 증거하는 답변이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한 사도로서 두려움 없이 담대히 책망조로 신랄하게 여기에서 증언하였다. 너희 앞에 섰느니라. 완전하게 된 앉은뱅이를 저들에게 직접 증거로 보여주면서 말하였다. 누구 이름으로 일어났는가? 당사자인 이 사람에게 물어보라는 논조로 말하였다. 이것은 성령이 함께 하므로 담대하게 말하는 파레시아를 구성한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표현을 쓴다. “버린돌” “머릿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표징한다(사28:16, 시118:22). 본래 “집짓는다”는 말을 로마제국을 건설하는 이교도를 뜻하는 것이었으나 베드로는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너희들 즉, 유대인을 가리킨 것이다. 버린(eJxouqenhqeiv") 못쓰게 되고 배척받은 것으로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교도로부터 버림을 받고 유대인에게는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러나 버림이 되지 않고 죽음에서 살아났고 유대인 이방인 전 인류의 죄를 한 몸에 담당하신 구속의 주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 인류를 살리고 세상나라를 구원한 하늘 나라 기초 돌 (foundation stone)이 되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둘이 하나되고, 원수된 것을 소멸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엡2:16)

베드로는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실에 대해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은 없다(행4:7)며 단호하게 공의회 심문에 대답함으로 다른 신에 의하여 구원을 주장하는 이방 종교들에 구원을 주는 다른 이름이 있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베드로의 이런 태도는 공의회에 앉아있는 관원과 제사장들에게 직접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때 성령이 충만하여 외치는 베드로의 용기와 대담성에는 당할 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