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사도행전1장,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시작

호리홀리 2015. 5. 28. 11:17

부활 후 예수의 40일의 의미


   사도행전이 다른 복음서의 부활 후 예수의 모습과 다른 점은 예수가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고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외에 예수의 승천을 유일하게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16:9-20)도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과 그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부여했다고는 기록되어있지만 사도행전에서처럼 굳이 40일을 명시하고 있진 않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과 40일 동안 나타내 보였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사도행전이 구약과 무관하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이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스테반 집사의 순교직전의 설교(7:1-50)이다. 더욱이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인 오순절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는 사건은 사도행전이 얼마나 구약의 전통위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는 사도행전에서처럼 성령이 오순절로 미루어져 있지 않고 부활한 예수가 직접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기 때문이다(20:22).

   따라서 누가-행전에 의하면 예수는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었고 부활하여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있었으며 예수의 승천 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한 예수가 약속했듯이 성령이 임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어 40일동안 금식한 후에 오순절에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았다는 구약전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많은 학자들이 사도행전에서 오순절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사건을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은 것과 관련짓는 것도 이러한 구도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 더  누가-행전은 오순절 날 임하는 성령을 예수가 약속했다는 점이다(눅24:49). 비록 궁극적으로 성령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었지만 실재적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는 분은 예수로 누가복음은 묘사하고 있다. 그런 후 출애굽한 모세가 40일동안 금식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은 부활한 예수와 40일을 연관짓고 주겠다던 성령을 주기 위해서 승천하는 것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느끼게끔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예수가 승천할 당시 그곳에 구름이 등장하는 것(행1:9), 그리고 승천한 장소가 산이었다고 하는 점(1:12절)은 모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여하는 것도 동일한 “문학적 장치(equipment)”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도행전이 유월절에 부활한 예수를 40일 동안 지상에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게 한 이유는 보다 확실하게 유월절-40일-오순절로 이어지는 구약의 출애굽 구도를 여기 사도행전에 투영하기 위함인 것이다. 예수를 모세와 동일시하는 것은 베드로와 스테반의 설교에서도 나타난다(행3:22,7:37).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세의 40일과 사도행전의 예수의 40일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가장 단적으로 모세는 승천하지 않았는데 예수는 승천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은 엘리야 모형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엘리야가 승천하면서 그의 제자 엘리사에게 능력을 수여하듯이 예수가 승천하면서 제자들에게 능력의 원천인 성령을 수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누가-행전의 예수 승천이야기가 예수의 승천 모습을 엘리야와 정확하게 동일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본다. 그는 구약에서 승천한 에녹이나 엘리야 그 누구도 경배의 대상이 되진 않았지만 누가-행전에 의하면 승천한 예수는 제자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고(눅24:52), 권능으로 다시오시는 분(행1:11)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도행전1장에 묘사되고 있는 부활한 예수는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을 들어, 모세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수여하는 분으로, 엘리야처럼 그의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어 엘리야가 수행했던 사명을 지속할 수 있게 해준 자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사도행전1장의 예수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모세보다도 엘리야 보다도 뛰어나 있는 분으로까지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왜 누가-행전은 예수를 한편으로는 모세처럼 다른 한편으로는 엘리야처럼,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나 엘리야보다 뛰어난 경배의 대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일까? 이는 이제 사도행전이 써 내려갈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초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유대교전통에 의하면 야훼신앙을 떠 받들고 있는 두가지 기초가 있는데 그 중하나는 출애굽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시내산 언약이다. 출애굽사건은 하나님이 히브리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 삼는 사건이요,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다.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면면히 출애굽 사건을 고백했고 율법을 지키려 노력했다.가장 단적으로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율법위에 굳건히 서는 것이었다는 것만 보아도 야훼신앙에서 율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누가-행전은 바로 이 야훼신앙의 두 기초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수여사건을 통해서 다시 세움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을,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즉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이루어나가고자 한다고 하는 사실을 독자들로 하여금 주지시키고자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율법을 대신하는 성령세례이다. 예수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율법준수였다면 이제 사도행전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율법준수가 아니라 성령세례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부활한 예수의 40일간의 채류와 승천 그리고 오순절성령, 새롭게 형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활한 예수가 40일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3절에서도 어느 정도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심각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연관은 다음의 부활한 예수가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도들의 대화(4-8);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한 질문과 그 대답의 의미


   여기서도 공관복음과 차이를 보이는 한가지 진술이 있다. 그것은 4절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예수가 사도들에게 한 분부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 위해 제자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야 했다(막16:7). 이는 예수가 죽기 전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바이기도하다(막14:28). 그러나 사도행전은 앞서 밝힌대로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만났고 심지어 예수가 승천한 후에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한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행전이 부활한 예수를 갈릴리에서 만나라는 전승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가-행전은 이 전승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했다(눅24:6-7).이러한 의미부여 역시 앞서  유월절의 부활-40일-오순절의 성령으로 가기 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도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기초작업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주제는 다음의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서 구체화 된다. 6절에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질문은 오늘날 독자들에게 매우 의외의 질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구약의 전통에 서서 사도행전1장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초 작업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먼저 사도행전의 독자가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부활한 예수가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말한 내용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점이다(행1:3). 또한 6절의 질문 바로 앞에 예수는 사도들에게 몇 날이 못 되어서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거듭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대전통에 의하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줄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는 베드로의 오순절설교에서도 나타난다(행2:17-21). 따라서 부활한 예수가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하였고, 또 몇 날이 못 되어서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고대하던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이 조만간 회복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였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이 정작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때”가 아니라 이제 새롭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도들이 감당해야하는 사명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누가-행전에 의하면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부활과 성령이 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루살렘과 유대의 경계를 넘어 사마리아와 심지어 땅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고 사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의 부활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통해서 이제까지 유대전통이 고수해 왔던 하나님의 나라는 곧 이스라엘 나라라고 하는 공식이 패기 될 것이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천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행1:8에서 이방선교의 당위성은 예수의 입을 통해서 확증된 셈이다.

   이제 사도들에게 부활한 예수의 입을 통해서 하나의 사명이 주어진다. 그것은 가장 먼저 성령을 받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땅끝까지 예수의 증인이되는 것이다. 예수는 마치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사명을 넘겨주고 하늘로 승천한 것처럼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고 승천한다.



         승천(9-11); 승천의 의미


  사도행전 1장이 그리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모세를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9-11절에서는 모세와 달리 엘리아의 모습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 사실 4복음서가 공히 예수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승천을 다루고 있는 복음서는 누가복음을 제외하고는 마가복음밖에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마치 엘리야의 승천모습을 엘리사가 지켜보았듯이(왕하2:12) 사도들도 예수의 승천모습을 고스라니 지켜보았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사도들은 부활한 예수의 계승자로 정통성을 갖게 하려는 시도가 명백하다. 또 승천하기 전 부활한 예수가 약속했듯이 이제 몇 일 후에 성령을 받게 되어 권능을 받게 되면 예수의 계승자로서의 면모를 더욱 갖추게 될 것이다. 이로서 사도들은 예수를 통해서 시작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계승자로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정통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엘리사가 엘리야가 행 한 것들을 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사도들도 예수가 행한 것들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까지도 예수를 닮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가 없더라도 멈춤 없이 1장8절에 계획된 대로 되어 나갈 것이 분명해 진다.



        사도  선출(12-26)의 의미


   예수의 승천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기거하면서 성령을 기다린다(12-14). 그리고 결국 승천한 예수가 약속한 대로 그들은 성령을 받게 된다. 사도행전은 그 사이에 가롯 유다의 낙오로 결원된 사도 한 사람을 선출하는 내용을 성령을 기다리는 이야기와 성령을 받는 이야기 사이에 끼워 넣는다. 이런 사도행전의 내용전개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 부활한 예수가 직접 결원된 사도를 선출하지 않았을까?” 예수는 부활 후 제자들과 무려 40일이나 같이 기거했다. 앞서 누가복음에 처음 사도를 선발할 때도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은 듯이 보인다. 부활한 예수가 결원을 충원하려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만약 부활한 예수가 직접 제자를 선출했다면 보궐 선출된 사도의 정통성은 확고했을 것이다. 예수가 직접 선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새로 선출될 사도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결원에 대한 예언으로부터, 여러 가지 자격조건을 내걸어야만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을 듯싶다. 가장 근본적으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사도행전의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로서 믿을만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들은 사도행전이 사도행전의 저자의 의도에 맞추어 어느 정도 각색되었다는 것이다.그러나 앞서 질문에서도 드러났듯이 보다 더 효과적으로 결원된 사도를 보궐선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이 역사적 사실을 담지하고 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다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계속해서 언급했듯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를 위해 열둘이 갖는 의미이다. 사실 선출된 맛디아는 여기 이외에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을 다 읽은 독자는 심지어 “왜 굳이 맛디아를 선출할 필요가 있을까?”라고까지 질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통해서 맛디아는 사도의 열둘이라는 숫자를 맞추는 의미이상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유대전통에 의하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열둘 위에 세워졌다. 마틴 노트는 이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창세기49장의 아들목록과 비교할 때 민수기26장의 지파목록은 차이가 있는데, 창세기49장에서 언급된 레위와 요셉이 민수기26장에서는 빠지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목록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둘이라는 숫자는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이 바로 이 열둘의 기초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라는 숫자를 의미있게 사용한 예는 사도행전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맛디아를 선출하기 위해서 모인 수가 120명이었다. 또 사도행전의 거의 마지막부분의 바울의 연설에서도 12는 하나님의 약속을 대망하고 있는 숫자로 묘사되고 있다(26:7).

유대의 전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제 성령으로부터 진행될 하나님의 나라에 앞서 무엇보다도 가롯유다로 인해 생긴 12사도의 결원을 채워 성령 수여로 연결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사도선출에 앞서 제자목록을 언급하는 것을 의미있게 보아야한다. 누가-행전이 이미 누가복음6:12-16에 제자목록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사도행전1:13에 다시 제자목록을 언급함으로서 누가-행전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열둘에서 한명의 결원이 있음을 주지시키고, 읽는 독자로 하여금 12에서 부족한 것을 채워야한다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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