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22
담대함
산헤드린 공의회 재판 내러티브에서는 관원들의 쩔쩔매는 것을 그려낸다. 공의회의 재판은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중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게 되었다. 베드로, 요한이 기탄없이(파레시아)말하는 것을 목격한 저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저런 기세로 말하는 줄을 듣는 자로 하여금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상류 계층 사람들 앞에서의 용기는 파레시아가 사도행전의 내러티브에서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담대하게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이 가는 촌락이나 거리에서도 영력이 넘쳐서 하나님의 사람의 위엄을 나타내고 언행에 감동을 주고 저들에게는 승리를 거두게 하였는데 이와 같은 것은 저들의 대담성에 있었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상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7) 베드로, 요한의 말은 인간의 지식이나 힘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힘에 의하여 말했기 때문에 베드로, 요한 자신도 초인적인 것을 느꼈을 것이고 관원이나 제사장,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 그리고 청중들까지 같은 느낌을 가지고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느끼게 하였다.
산헤드린은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부인할 근거가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때처럼 이야기를 꾸며낼 수가 없었다(마28:11-15). 앉은뱅이가 일어난 현장은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까지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군다나 그 고침 받은 자가 육체로 현존해 있어서 그들은 사건을 적당하게 다루어야할 궁지에 몰렸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사도들을 위협해서 내보내는 것만이 그들이 취할 유일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의 은인이었다.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는 베드로, 요한이 공의회에서 당한 일에 무심할 수 없었다. 달려와서 말은 하지 않아도 건강한 몸을 증거로 보이는 증인이 되었다. 앉은뱅이도 자기 때문에 두 사도가 당하는 것을 알고 대담하게 서 있었다. 이 때 공의회 의원들도 나음을 받은 앉은뱅이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베드로에 대한 판결을 경솔히 할 수 없었다.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은 더 이상 법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나음을 받은 앉은뱅이를 나가라하고 비밀리에 수근 거렸다. 여기에서 유대법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막다른 국면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허위는 사실 앞에 서지 못할뿐더러 떠나갈 수밖에 없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제는 공의회 의원들은 이 사실을 본 이상 율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게된 것을 알고 사도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돌렸다. 유대인은 예부터 표적에 의하여 움직이는 백성이다(고전1:22).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졌으니 이제 이에 대해 부인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양심으로 보나 법에 비쳐볼 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불의로 의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까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그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가 법대로 하지 않은 타락상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행16장에 이르러 바울과 실라를 옥에 가두는 내러티브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시기와 정치적 권력을 악용하여 투옥하게 되는 것이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정당한 판결 이유를 찾지 못하고 결국 협박과 수단을 써서라도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항력적이었다. 의를 거짓으로 막을 수 없으며 진리를 인간의 권력으로 막을 수 없는데 이런 일은 역사상 정치인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일들이 한 때는 이기는 것 같이 보이나 결국은 진리 앞에 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리 앞에서는 순종 밖에 없다.
급기야 관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선교금지령을 내린다. 만일 예수를 전할 때는 박해를 불사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그 이름(복음계시)을 전하고 그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그 이름을 힘입어 구원받게되는데 그 이름을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은 최대의 종교탄압이라 볼 수 있다. 예수의 이름은 구주란 뜻으로 가장 거룩하고 가장 고귀하여 많이 부르고 널리 전파하여야 할 그 이름을 금지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말라는 뜻과 같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며 담대하게 말한다. 이 Narrative는 우리가 핍박 속에서도 큰 버팀목이 되는 말씀이다. 이렇게 담대히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강한 임재 때문이다. 그래서 순교까지도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힘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소위 제사장이라 하고 장로라 하고 관원이라고 하는 저들 앞에서 반문하는 어조로 양심적으로 판단해 보라 하였다. 사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 너희 말을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느냐는 대답이다. 불같이 뜨겁고 날카로운 말을 하였다. 너희 인간의 말은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내놓고 절대 지키겠다는 비장한 선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비교해서 생각할 수도 없고 같이 지킬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공의회 의원들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나는 보고 들은대로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결단성을 표명하였다. 여기에서 두 사도는 부정의 긍정을 나타낸다. 사도로서 극히 중한 책임을 지는 자기 부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인 사명의 긍정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실과 체험에 입각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인위적인 말로 넘어가는 위선을 할 수 없었다. 이념의 긍정만으로 안 된다. 이념과 체험이 함께 할 때 그 믿음이 담대한 것이 있게 되고 비로소 산 믿음을 보여주게 된다. 두 사람의 양심은 정직하고 믿음은 살아 있었다.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도 두 사도의 증언이 옳은 줄을 마음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저들은 저들의 권위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두 사도를 처벌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법에 저촉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두 사도의 사실을 알기 때문에 백성의 동향에 두려움을 가졌다. 공의회 의원들은 백성들의 안색을 보고 급기야 처벌할 수 없었고 사도들은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대담성을 보게 될 대 대조적인 것을 느꼈다. 바로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미리 준비해 두신 각본인 것이다. 누가는 예수의 무죄를 강조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헤롯 안티바스 어전의 제 3의 재판을 누가복음에서 추가하고 있다(눅 23:6-12). 이러한 새로운 사실의 추가가 중요한 이유는 그 명백한 의도가 헤롯이나 빌라도 양자 모두 예수의 무죄를 확인했기 때문이다(눅23:4,14,15,22).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무죄 부분을 다시금 내어놓은 것은 결국 예수의 무죄를 누가-행전의 연속선상에서 확연히 정당한 사실로 언급하려는 누가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갑자기 전혀 상관없는 듯 한 앉은뱅이의 나이가 40 여 세 라는 것이 거론된다. 이렇게 연령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누가의 특징이라 말 할 수 있다(9:33,눅2:42.3:23,8:42). 이렇게 병 나음을 받은 사람의 연령이 40여세라 한 것을 보아 나이가 있기 때문에 고질적이 되어 고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이 시점에서 병인의 이런 상태가 거론된 것은 그 기적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더 강하게 표현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이 될 때에는 권능을 나타내셔서 고쳐주는 이적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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