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 복음 20장 ,부활의 의미

호리홀리 2015. 5. 20. 12:16


 


 

1.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다(1-18)


1-18절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장면을 생생하게 보도하고 있다. 부분은 1-2(A) 3-10(B) 그리고 11-18(A) 나누어져 A-B-A 구조를 형성한다. A A 막달라 마리아가 주인공으로 나타나고 B에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구조에 의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설명하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이 돋보이고 이와는 반대로 부활의 사건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사랑하시는 제자'들의 무감각이 상대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1)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다(1-2)(A)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제일 먼저 무덤으로 사람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 막달라 마리아가 어둠이 아직 천지에 깔려 있는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이유는 정확하게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있는 것은 마리아는 무덤의 돌이 옮겨지게 것을 부활의 결과로 이해하기 보다는 유대인이나 로마 군병들이 소행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2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마리아는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알려 준다. 그러면서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2) 사랑하시는 제자와 베드로가 무덤으로 가다(3-10)(B)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무덤으로 신속하게 달려 간다. 먼저 3-8절은 제자가 무덤으로 정황을 설명하고 있고 그리고 9-10절은 제자의 행동에 대한 요한 복음 저자의 평가를 제시한다.

4절에 의하면 제자가 경쟁적으로 빨리 무덤으로 가려고 했던 것을 있다. ' 다른 제자'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당도하였으며 5절에서는 그제자가 무덤에 이르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몸을 굽혀 '세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도 도착하여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와는 달리 밖에서 것이 아니라 무덤 안으로 들어가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다(6). 여기에서 '세마포가 놓여있다'는 것은 무질서하게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있게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저자에 의해 예수님의 부활의 흔적을 암시하는 관용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19:40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죽으신 몸을 세마포로 쌌다는 사실에 의해서 근거를 얻을 있다. 7절에서 몸을 쌌던 세마포와는 달리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같이 있지 않고 곳에 가지런히 개켜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사실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 해주고 있다. 만일 마리아의 판단대로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가진 자들에 의해 돌이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죽으신 몸을 가져 갔다면 이렇게 세마포가 가지런히 놓여 있거나 수건이 개켜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8절에서 '무덤에 먼저 왔던 다른 제자'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들어가 보고 예수님의 죽으신 몸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여기에서 '믿었다'는 것은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예수님의 죽으신 몸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서 저자는 제자들의 무감각과 어느 정도 부활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상황적 사실을 서로 대비 시키고 있다.

8절에서 제자가 믿었다는 것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9-10절에서 더욱 확증을 얻는다.

9)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이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위의 9 말씀에 의하면 베드로와 함께 했던 제자 모두 예수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0절에서 그들은 무덤을 발견하고도 그것으로 인하여 어떠한 감정적 변화에 대한 기록이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제자의 반응은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망각한 일이므로 매우 답답한 반응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자연스런 일일 있다.


3)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다(11-18)(A)

막달라 마리아는 최초로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알려 있다. 이제 무덤이 비워져 있는 것을 발견한 제자는 다른 특이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각자 자기들의 집으로 갔고 마리아 홀로 무덤 가에 서서 울고 있었다.

11절에서 마리아가 울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13절에서 천사들의 질문에 대한 마리아의 답변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사람이 주를 가져다가 어딘가에 두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므로 마음이 슬픈데다가 시체까지 없어졌으니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있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마리아의 눈물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눈물'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나사로의 죽음 이후에 수반되었던 불신앙의 울음(11:31, 33) 연상케 한다. 여기에서 천사의 등장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인간적 조작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개입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14-17절부터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는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과의 직접적인 대화로 이어진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는 처음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오해함으로 시작된다. 이것을 14절에서 명백하게 밝혀 준다. 15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먼저 대화를 건네신다. 그첫 질문은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상황을 몰라서 묻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각인시키려는 교육적 의도를 갖는다. 15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하고 예수님께 예수님 자신의 죽으신 몸을 어디에 두었는지 묻는 매우 우스꽝스런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 것은 바로 16절에서 '마리아야'라고 부를 때였다. 동산지기라면 자신의 이름을 없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음성이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으므로 즉시 예수님인 알아 있었던 것이다. 이에 마리아는 랍오니'라고 하여 예수님께 응답한다(16).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신다 '나를 만지지 말라'(17a). 그리고 이유로서 여기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17b). 17a 17b 관계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논란이 되어 오고 있다. 만일 17b 내용처럼 예수님께서 승천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을 만지는 것이 금지된다면 27절에서 도마가 예수님을 만지도록 요청 받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7절과 27 사이에 승천이 이루어졌는가? 그렇지 않다. 17절과 27 사이에 승천 사건이 일어 났다면 중요한 사건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주어지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없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나셨다. 그러나 부활하시기 전처럼 항상 지속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는 않았다. 그의 거처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신령한 부활의 몸은 이상 육신에 있었던 날들처럼 시간과 공간에 구속 받지 않는다(참조 5:7).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즉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승귀하셨다는 것이 신약 성경 저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여기에서 부활과 승천 사건은 서로 분리할 없다(Beasley-Murray, 37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관점에서 승천한 상태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승천의 진행 중에 있다는 것으로 정리해 있다. 부활로 말미암아 승천의 단계에 접어 들었으나 문자 그대로의 승천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다(Carson, 645).

이상의 논의에 의해서 17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수월해진다. 17절을 쉽게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나를 만지기를 멈추라. 왜냐하면 나는 나의 아버지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승천한 상태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마치 영원히 떠나려는 것처럼 나에게 집착해 있지 마라( Carson, 644).

17c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일러 주신다. 먼저 여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형제'라고 칭하신다. 이것은 19:26-27에서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어머니와 아들로서 맺어 주므로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가족됨(familyship) 성립시키고 계시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바로 이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가족됨이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 사이일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가족됨은 더욱 발전하여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도 성립되고 있음을 있다. 이것은 17c 후반부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내가 아버지 너희 아버지 하나님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여기에서 예수님의 아버지는 제자들의 아버지이며 예수님의 하나님은 제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동일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바로이러한 사실을 전하도록 요구 받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구속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자들은 '양자의 영'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있게 것이다( 8:14-15). 나아가서 예수님은 우리의 맏아들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8:29).

끝으로 18절에서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전하도록한 말씀의 내용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달한다.

18)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위의 18절은 1-2절에서 무덤만을 보았을 때의 경우와 비교해서 매우 발전한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1-2절에서는 마리아가 부활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알려 것이고 18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말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궁금해 진다.

이상의 1-18절에서 1-2(A), 3-10(B) 그리고 11-18(A) 제자의 반응을 중심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중요한 사건에서 여자에 불과한 여인이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로니가 아닐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천하게 보이는 지체일수록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대목이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19-3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것은 번에 걸쳐 일어난다. 번째는 19-23절까지이고 번째는 24-29절이다. 경우의 차이는 도마가 존재하느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된다. 전자는 도마가 함께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요 후자의 경우에는 도마가 존재한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전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공식적 절차를 밟고 계시고 후자에서는 의심하는 도마에게 믿음의 확신을 심어주므로 부활의 사실성과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마땅한 믿음을 강조한다. 끝으로 30-31절은 에필로그로서 복음서의 결론을 형성하고 있다.


1)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19-23)

18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분부대로 제자들에게 가서 마리아 자신이 것과 예수님으로부터 들은내용(17c, 18) 전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사실을 믿지 아니하고 문을 잠가 두고 있다.

19) a)이날 안식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b)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구절에서 '이날 안식 첫날저녁'이라는 문구는 1-18절에서 일어난 사건이 '새벽'이라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간 상태라는 것을 암시하고 따라서 18절에서 마리아가 경험한 내용을 모두 들은 상태라는 것을 있다. 그러나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여 문을 닫아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가지고 제자들을 탓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두려움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을 믿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시기 보다는 '평강이 있을찌어다'(19b)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의 평범한 인사일 있으나 한편으로는 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성취라고 있다. 나아가서 여기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은 16:16에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 말씀에서 '조금 있으면'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시간 사이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이에 많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것은 또한 16:20에서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는 말씀의 성취로서 있다. 예수님은 죽으시므로 잠시 제자들을 떠나 있어 제자들이 슬픔에 잠겨 있을 밖에 없었으나 조금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므로 제자들은 기뻐하지 않을 없게 것이다.

그리고 20절에의하면 예수님은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신다. '손'은 박히신 장소이고 '옆구리'는 창으로 찔린 자국이다(19:18, 34). 특별히 '옆구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확실하게 확인케 했던 곳이다. 이러한 부위를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확증하려는 의도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어떤 다른 인물이 아니라 제자들과 수년간 같이 지냈던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증하려는 의도를 포함한다. 이렇게 되자 드디어 제자들은 기뻐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있는 실내로 들어 오셨다는 것이다(19b). 여기에서 누구도 문을 열어 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손에 자국과 허리에 자국이 그대로 있어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간적인 제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부활의 몸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암시를 던져 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단순히 14:27 16:33 말씀을 성취하려는 목적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패러다임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것은 21-23절에서 보여 주고 있다. 21-23절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21) a)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b)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먼저 21a에서 19b 이어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19b 경우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21b 17: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에서 하신 기도의 실제적 적용으로서 있다.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의 입장을 병행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있다. 예를 들면 17:19에서 '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말씀과 13:20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좋은 예라 있다. 이러한 관계는 결국 성령의 오심으로 더욱 공고해진다(14:16-17, 26; 15:26-27; 16:15).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는 자들이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의 계승은 새로운 영역을 창출한다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확대 재생산하는 차원인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도래케 새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성령의 도움을 얻어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것이다.

21b에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선언을 하시고 22절에서는 매우 독특한 행위를 보이신다. 21절과 22절의 관계는 22절의 도입 부분에서 ' 말씀을 하시고'라는 문구에 의해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다. 21b에서의 말씀은 22절에서 주어진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22절에서 표현된 이러한 행위는 23절의 말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22)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먼저 22절에서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었다'는 것은 해석학적 전승을 가진다. 먼저 이문구는 가깝게는 37:5 멀게는 2:7 배경을 가진다.


20:22

37:5

2:7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pneu/ma a[gion] 받으라

여호와께서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먼저 20:22 37:5로부터 직접적인 배경을 가진다. 37:5 '마른 환상'의 내용으로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2:7에서 첫번째 사람인 아담의 창조 사건을 배경으로 주어지고 있다. 2:7 아담은 창조 안에서의 사건이고 37:5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간 사건은 창조의 회복으로서의새 창조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20:22 37:5 성취이며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바로 제자들이 창조 안에서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태어나고있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수여하시므로서 제자들을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실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이스라엘의 형성으로서의 성령의 수여는 유대인의 (메시야)으로서 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 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또한이러한 성령의 수여는 1:33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서 이해할 있다.

23절에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한다. 여기에서 죄를 사하는 사역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성령을 받고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신 처럼(1:32; 3:34) 제자들로 성령을 받으므로 예수님이 하셨던 죄사함의 사역을 시작한다.


2)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24-29)

24-29절의 주인공으로서 도마가 등장한다. 먼저 24-25절에서는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진 말을 기록하고 26-31절에서는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24)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a)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b)도마가 가로되 내가 손의 못자국을 보며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으며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5a 의하면 도마 외에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하자 25b에서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자국에 손가락과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을 없다고 선언한다. 2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바 있으시다. 손과 옆구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확증하는 증거로서 존재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손과 옆구리에 각각 못자국과 창자국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예수님은 허구에 불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바로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대표적 표시이다. 어떤 면에서 도마의 접근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께서 여러 번에 걸쳐서 부활할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심을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없다.

26-3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도마를 만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먼저 26절에 의하면 '여드레를 지나서'라고 것을 보아 부활 사건 이후에 8일이 지난 것으로 간주할 있다. 때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고 '문들이 닫혀 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여기에서 '문들'이라고 하여 복수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문이란 문은 모두 닫아 놓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있고 이것은 이들이 얼마나 두려워 했는가를 보여 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신다.

2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도마와 대화를 나누신다.

27) a)도마에게 이르시되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손을 보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보라

b)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a에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손을 만져 보고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옆구리를 만져 것을 말씀하신다. 도마가 25절의 말을 예수님은 함께 하지 않으셨지만 말을 듣고 27a 내용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역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다시 보여 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27b에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28절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도마의 반응이 주어진다.

2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확인해 보라고 하셨을 도마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는 예수님에 대해 28절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29절에서 다시 도마를 향해 말씀하신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서야 비로서 믿게 되는 도마를 향해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믿는 자들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점을 염두해 두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보고 믿는 것이라기 보다는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사실이다.


3) 결론(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