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 복음 19:17-42,십자가의 의미

호리홀리 2015. 5. 20. 11:50

요한 복음 19:17-42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다(17-24)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넘겨 주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지게하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게 한다.

17)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7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유대인들의 강요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시게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현상적인 표현에 불과하며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이것은 19:4-5에서 나타난 현상 그대로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 끌려 나온 것이지만 그러나 요한 복음의 저자 요한은 예수님의 나오심을 능동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과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이다.

18절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히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18)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박을새 다른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구절에서 예수님은 우편에 다른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박히심을 보여 주고 있다. 이두 사람은 범죄자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박히심은 바로 죄인으로서 그들과 동일하게 취급 받아 이루어진 것임을 있다. 이것은 창조주이신 예수님께 도저히 있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모순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받아들여 묵묵히 감당하고 계신다.

19-22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위에 쓰여진 명패를 가지고 빌라도와 유대인과의 실갱이가 벌어진다. 먼저 19-20절에서는 빌라도가 명패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한 것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구절에서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라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흥미로운 것은 20절에서 명패에 기록된 글의 문자가 히브리어와 로마어 그리고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박히신 곳이 예루살렘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많은 유대인이 읽었다고 하였는데 그들 가운데는 히브리어, 로마어 그리고 헬라어를 각각 사용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시에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자기도 어떠한 의미인지 모르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한 것은 18:28-19:16에서 일관성 있게 보여 주고 있는 처럼 바로 예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려는 저자 요한의 목적이 함축되어 있다.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것에 대해 유대인들은 거부감을 갖지 않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의 다른 명칭인 유대인의 왕으로서 인식되는 것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1절에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것을 썼다 하니라

21절에서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란 말대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 하였다. 이러한 요청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 것이지 유대인들에 의해 '유대인의 왕'이라 불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박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빌라도는 '내가 것을 썼다'라고 대답한다(22). 빌라도가 이러한 답변을 했는지 매우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주장대로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 가이사를 반역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빌라도 자신이 인정하는 격이 된다(19:12). 그러한 이유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에 넘겨 주게 것이다. 이것이 그러하다면 빌라도가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인 것은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찾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무리하게 십자가에 박게 내어 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그렇게 했다고 있을 것이다.

23-24절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극도의 조롱이 아닐 없다.

24절에 의하면 이것을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사람이 가져 가자고 결정한다. 이러한 군인들의 행위는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예수님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이라고 있다.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옷들은 일종의 유품이라 있고 보통 유품은 정중하게 취급하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라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제비를 뽑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단면이라 있다. 죽으신 후에까지도 군인들에 의해 조롱을 받으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심각하게 주어지고 있는 지를 보여 주고 있다.

24b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가지고 제비를 뽑는 것은 '성경에 그들이 옷을 나누고 옷을 제비 뽑나이다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성경은 바로 22:19 가리키고 있다. 22:19에서는 '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내용으로서 22 전체가 고난 받는 의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내용이며 내용의 맥락에서 22:19 말씀이 주어졌고 15-18절은 직접적인 문맥을 형성하고 있는 내용이다.

15)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마음은 촛밀 같아서 속에서 녹았으며 16)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17)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수족을 찔렀나이다 18)내가 모든 뼈를 셀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19)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위의 15-18절은 의인의 고난이 얼마나 터무니 없이 심각하게 주어졌는가를 보여 준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들은 19절의 의미를 분명하게 강화시켜 주고 있다.

 




2.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25-27): 보라 어머니라


25-27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박혀 있는 상태에서 모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예수님의 관심은 죽는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성실하심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를 구별하고 있는 것은 원문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동격으로서 동일인을 나타내 주고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십자가 곁에 끝까지 남아 예수님의 죽음을 함께 맞이 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 제자들의 구체적인 이름 보다는 사람의 여인이 열거되고 있다는 점이다. 26a에서 제자 '사랑하시는 제자'가 사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에 모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다들 피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6b에서 예수님은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함께 곁에 있는 것을 보셨다. 이에 예수님은 모친인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런 순간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2:4에서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칭하신 있으시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마리아와의 관계를 모자로서의 관계 보다는 객관화시키는 의도가 있었다. 19:26에서도 이와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이러한 객관적 관계를 설정하여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사랑하시는 제자를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에서의 이러한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가족의 출발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리아와의 관계의 객관화를 통해 가장 고통스런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시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책임감은 27절에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27) a)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어머니라 하신대

b) 때부터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말씀에 의하면 제자에게 '보라 어머니라'고 하셨더니 제자가 때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순간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에서 모시게 되었다. 여기에서 '제자'가 예수님의 형제인 제자인지 아니면 다른 제자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째든 여기에서 ' 어머니'라고 하신 것은 육적인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마리아를 책임져 달라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3:35 말씀을 연상케 주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4:35).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서 모시게 되었다(27b). 바로 '사랑하시는 제자'의 순종으로 말미아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가족의 형성을 성취를 보게 것이다(참조 Moloney, 503-504).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다(28-30)


28-3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기 직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28) a)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아셨을 )

b)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거기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예수께서 포도주를 받으신 가라사대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먼저 28절은 28a 28b 나누어 있다. 전자는 후자에 대한 시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계를 인식하고 28절을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28a에서 예수님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 것을 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일이란 예수님께 맡겨진 구속을 위한 사역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구속 사역의 절정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모습이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예수님은 인식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일에 충실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28b에서 말씀하고 있는 처럼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것에 대한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28a) 성경이 참으로 자신의 말씀을 통해 응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여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셨던 것이다(28b). 28b에서 '내가 목마르다'는 22:16 69:22 말씀을 배경으로 주어진다.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22:16)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69:22)

두개의 시편 구절은 의인이 처절하게 고난 당하는 정황을 특별히 '목마름'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다. 광야를 주변 환경으로 두고 있는 유대인들의 지형적 특성으로 인하여 '목마름'은 극도의 고난의 순간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시편에 나타난 이러한 목마름에 의한 의인의 고난은 요한 복음에서 메시야적 사역의 특징 하나로서 십자가에서의 고난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은 시편에 나타난 이러한 메시야적 특징으로서의 '목마름'의 성취를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하므로서 이루어 내고 계신 것이다.

29-30절에서 사람들이 '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자 그것을 취할 '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숨을 거두셨다

 






4.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 이후(31-42)


1) 구약 성경의 응함(31-37)

31절부터는 30절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의 일들에 대해 기록한다. 이러한 내용에서 주목할 것은 이후에 이루어진 일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비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31-34절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박혀 죽은 다른 두사람의 다리는 꺽어서 시체를 치웠지만 예수님은 다리를 꺽지 않았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31절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이 바로 안식일을 위한 예비일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는 것이 통례이므로 빌라도에게 시체들을 치워달라고 요청한다. 요청이 받아 들여지자 32절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박힌 사람의 다리를 꺽고 치웠지만 33절에서 예수님은 다리를 꺾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부활하실 예수님의 몸을 보관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있다. 그리고 신학적 의미는 36절에서 ' 일이 이룬 것은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처럼 성경적 성취를 위함이다.

 

35) a)이를 자가 증거하였으니 증거가 참이라

b)저가 자기의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35a에서 '이를 자'는 누구이며 35b에서 '저가'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먼저 '이를 자'는 25-27절에서 등장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35b에서 주어로 쓰이는 '저가'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이는 문맥에서 35a에서 '이를 자'와 동일한 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Carson, 626). 바로 '이를 자'와 '저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서 요한 복음을 기록한 요한을 가리키고 있다(참조 21:24). 그리고 '이를 자'라고 무엇을 것일까? 그것은 33-34절에서 예수님의 다리를 꺽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옆구리로부터 물과 피가 흘러 나온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박히시고 죽으시고 후에 다리를 꺽지 아니하고 허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것은 그것을 목격자에 의하면 거짓이 아니라 진실된 것이다. 바로 목격자는 그가 말하는 것이 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독자들로 믿도록 하기 위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33-34절에서의 정황을 보도하는데 있어서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음 36-37절에서는 33-34절에서의 사건이 (구약)성경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36) 일이 이룬 것은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37) 다른 성경에 저희가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36절에서 ' ()'이란 33-34절에서 다리를 꺽지 아니하고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 나오는 사건으로서 이러한 사건들은 바로 구약 성경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다. 먼저36절에서 ' 뼈가 하나도 꺽이우지 아니 하리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구약 성경은 개의 본문에서 온다고 있다.

번째와 번째는 12:46 9:12이다. 구절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뼈는 어떠한 것도 꺽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

집에서 먹되 고기를 조금도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찌며( 12:46)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9:12)

예수님은 바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 유월절 주간에 죽임을 당하시고 이스라엘의 구속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의미를 성취하셨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군병들이 예수님의 뼈를 꺽지 아니한 것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구약의 유월절을 성취하고 있음을 정밀한 방법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번째로,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을 표현하고 있는 34:20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구약 성경과 관련된다.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34:20)

위의 시편 말씀의 문맥을 통해 34:20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선포하는 은유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시편의 말씀이 요한 복음의 본문에 적용될 저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의인이며 고난 받는 종으로서 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하심이 결코 흔들릴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12:10

그리고 36절에서 말하는 응하도록 의도된 구약 성경으로서 37절에서 다른 구약 성경이 제시되고 있는데 '저희가 찌른 자를 보리라'고 것이다. 말씀은 구약의 12:10 배경으로 주어진다.

a)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b)그들이 찌른바 그를(나를)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나를'이라고 되어 있음 바라보고

c)그를 위하여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2:10)                

13:7

먼저 10a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므로 결과10b 10c 현상이 일어 난다. 위의 스가랴 본문의 10b에서 '그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의 '나를'과 10c에서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의 '그를'이 서로 교환되어 사용된다. 10b에서 '나를'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10c에서 '그를'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 목자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목자에 대한 언급은 13:7 나타나 있다(참조 11:4, 8-9, 15-17). 구절을 12:10 연관해서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목자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손을 드리우리라(13:7)

구절에서 하나님의 목자는 칼로 침을 당한다. 이것은 12:10에서 ' 찌른 나를' 연상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자가 칼로 침을 당하는 것을 자신을 찌르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2:10b 12:10c에서 '나를'이 '그를'과 상호 교환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 12:10에서 칼로 찔림을 당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목자) 보게 되는 것은(12:10b) 바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하나님의 )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12:10a). 그러므로 그들은 찔림을 당한 자를 인하여 애통하고 통곡한다(12:10c). 그것은 자기들이 행한 행위에 대한 회개를 의미한다

이러한 내용이 19:37 적용된다. 먼저 요한 복음의 독자들은 바로 여기에서 13:7에서 하나님의 목자는 10:11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했던 것처럼 예수님에게서 성취 되고 있다. 목자가 이제 로마 군병들에 의해 칼로 옆구리를 찔리고 말았다. 예수님의 찔림은 하나님 자신의 찔림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칼로 찌른 자들은 예수님 하나님을 보게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12:10 말씀을 도입하면 찌른 자들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찌른 자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시므로(12:10a) 애통과 통곡을 하게 하시므로 회개케 하셨다면 그것은 심판의 의미보다는 구원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찌른 자들이 찔린 자를 보게 것이다'라는 말씀은 심판의 의미와 함께 구원의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된다. 예수님을 찌른 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우는 당연할 있지만 구원의 경우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닐 없다.


2) 예수님을 장사 지내다(38-42)

31-42절에서 예수님의 죽으신 이후에 취해진 조치가 성경을 응하기 위해 전개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제 38-4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장사지내게 되는 과정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이러한 장면은 예수님께서 기절하였거나 죽지 않았다는 것을 부정한다. 곧예수님께서 확실하게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을 확증한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특별히 예수님의 주검을 장사지내는 순간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하다. 그리고이 순간을 기록하는 분위기가 매우 부드럽고 엄숙하게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이나 군병들의 외침이나 조롱의 말들이 소개되지 않는다.

38)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후에 빌라도 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먼저 38절에서 아리마대 요셉을 소개한다.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서는 공관 복음서에 자세한 소개가 주어진다: 산헤드린의 멤버( 15:43);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 보았던 ( 15:43; 23:51); 부자( 27:57); 예수님에 대한 산헤드린의 입장에 대해 반대했던 ( 23:50-51); 예수님의 제자( 27:51). 요한 복음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유대인을두려워 하여 숨어 있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이후에 나타나 빌라도에게 간청하여 예수님의 죽은 몸을 가져 오도록 하였다. 요한 복음의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12:42-43에서 지적하고 있는 처럼 유대인을 두려워 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랑하였던 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처럼 보일 있다. 그러나 이것은 평상적인 상황과 다르다. 그러므로 저자는 아리마대 요셉의 행위에 대해 다른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의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를 설득하여 받아 내는 것에 초점을 맞춰 말하고 있다. 본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시체는 독수리가 먹도록 버려 두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친족들이 시체를 요구하면 그들에게 내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경우에 고소자가 반대하면 이러한 요구는 받아 들여 없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친척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요구는 거절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형제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그의 부와 지위를 사용하여 빌라도에게 시체를 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있어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빌라도는 아리마대 요셉의 요구에 순순히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 주게 되었다.

38절에서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의 시체를 얻어내는데 성공한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 이후에 39-40절은 니고데모의 역할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39)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먼저 39절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예수께 밤에 나아 왔던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본문에서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을 백근쯤 가져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의 물품은 향료로서 시체에 악취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다. 여기에서 몰약과 침향을 섞은 양이 ' 근'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65. 45 파운드 정도 되는 매우 많은 양이다. 이렇게 많은 양을 사용하는 것은 왕족의 장례식에서 가능한 일이다. 대하 16:14에서 예를 찾아 볼수 있다.

다윗 성에 자기를 위하여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대하 16:14)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믿음이 있었고 믿음대로 예수님을 왕으로서 대우해 드리고 있는 것이다.

40절에서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유대적 관습대로 향품 몰약과 침향과 함께 '세마포'로 예수님을 쌌다. 여기에서 '세마포'는 복수로서 하나의 의복이 아니라 여러 개의 의복을 예수님을 싸는데 사용되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실재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을 갖는다(참조 20:3-9).

38-40절에서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등장을 통해 어떻게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왔으며 시체를 어떻게 보존하였는가를 설명하고있다면 41절에서는 예수님의 시체를 안장할 무덤에 대해 설명한다.

41)예수의 십자가에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 있는지라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에 대한 묘사 중에서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무덤이 예수님께서 박히신 곳에 있는 '동산'에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무덤이 아직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언급들은 바로 20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무덤에 오직 예수님 만의 몸이 존재하는 가운데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은 부활의 부인할 없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서 이러한 무덤의 환경은 왕이신 예수님께 적절한 곳이다. 바로 39-40절에서 니고데모가 많은 양의 향품을 가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있을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최고의 자리에 누우셔야 한다는 의식이 작요했던 것이다.

42)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