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14장,성령의 역활

호리홀리 2015. 5. 19. 16:42

14:2절에서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감은 그 곳에 그의 백성이 그와 함께 있을 방을 예비하러 간다. 이 소리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과 더불어 연합해서 교제하고 잔치함으로 하나님의 풍요로움 속에 하나님의 부요함 속에 참여한다는 것을 그림으로 말한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죄인들이 용서함을 받고 의로워져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의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된다. 이것을 그림으로 말하면 돌아감인데 무엇하러 돌아가느냐면 하나님과 하나님이 있는 곳에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상태에 그의 백성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간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을 아버지 집에 방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는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믿음이 성숙치 않은 그의 백성들에 의해서 오해가 발생이 되요.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그래서 도마, 빌립, 유다 등이 의아해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긴 설명. 그의 돌아감이 아버지께로 감, 곧 그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부터 시작을 해서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아버지께로의 돌아감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서 있어서 인간의 근본문제를 생명의 세상, 윗 세상으로 부터 분리되어 가지고 아랫 세상에 사는 것으로 헬라적인 세계관을 빌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이란 무엇이냐? 하면 사건의 세상, 물질의 세상에 속한 우리가 위의 세상, 영원의 세상, 실재, reality, 진리의 세상, 영의 세상, 영혼의 세상에 도달하는 것,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갈 수 없다. 요한복음은 뭐라고 말하느냐면 위에서 오시는 분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위로 데리고 올라 가셔야 우리가 갈 수 있다. 위에서 오신 분만이 할 수 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다. 그 분이 단 7장의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위의 세상에서 καταβασι? 한 분이시기 때문에. 어디까지 낮아지셨나요? 십자가에 죽기 까지 낮아지셨어요.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그의 αναβασι?, 올라감의 시작이다. 영광 받음의 시작이다. 다리를 놓은 거다. 위의 세상과 아래 세상을 연합시킨다고도 할 수 있고 아래 세상에 속한 자기 백성을 위의 세상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내가 길이다. 그 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터득할 수 있고 생명도 얻는다. 그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그림을 연상하게 하느냐면 가령 빌립보서 2:6-11절 까지의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를 연상케 한다. 사실은 똑같은 그림이다. 거기 빌 2:6-11절의 찬송시가 어떻게 시작이 되지요? 그의 본체(μορφη)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를 비워서 종의 형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버리고 인간의 죄와 육신과 세상과 율법과 사단의 노에가 된 상태의 인간의 형태로 왔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을 했다. 이것이 καταβασι?의 과정이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그를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고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주” 그가 κυριο?이기 때문에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의 대상이 되셔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천사) 땅에 있는 것들이나(인간) 땅 아래 있는 것들이나(악령) 즉 온 우주와 그 속에 있는 것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예배하고) 그를 주라고 고백을 하게 된다는 찬송시이다. 이것이 똑같다. καταβασι?는 십자가에 순종,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고 이것이 αναβασι?가 시작이 된다.

그런데 빌립보서의 찬송시 뒤에는 무슨 그림이 숨어 있느냐면 아담의 그림이 숨어 있다. 창 3장에 보면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높은 위상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다. 그 위상을 더 높일려고 했다. 하나님에게 까지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그의 원래의 위상에서 떨어져서 그가 통치를 해야 할 피조물을 섬길 수 밖에 없는 사단의 종이 되고 피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물질을 섬겨야 하는 종의 상태로 전락을 했다. 이 아담의 그림이 빌립보서의 찬송시 뒤에 anti-typology로 숨어 있다. 첫 아담이다.

마지막 아담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 빌립보서의 찬송시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느냐면 인간이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는 인간 이하로 떨어져요. 이것이 죄이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의지 이것을 신학적으로 교만이라 한다. 자기주장이다. 이것이 죄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주제파악을 못 하고 하나님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함으로서 위의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여셨다. 그래서 내가 길이다. 어떻게 길을 텄어요. 위의 세상을 보여주심으로.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것이 생명이 아니고 환상이다. 위의 것이 실재이다. 아래의 환상됨. 진리의 빛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상을 알게 함으로 그의 대속의 새언약을 세운다. 그런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의 αναβασι?는 십자가에서 시작을 해서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우편에 주로 군림하는 위치로 올라감, 높임 받음으로 이해된다. “주로 군림하는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그의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영으로 성령으로 와 임재하심의 관계이다. 그래서 올라감, 아버지께 돌아감의 의미는 예수께서 다시 너희들에게 돌아옴,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돌아옴의 언어로 바뀐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주로 군림하는 상태로 올라감이 영광 받음, 높임 받음의 극치인데 그것은 동시에 성령을 통해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를 통해서 새로 창조된 그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은 예수가 창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됨이 확인이 된다. 성령을 통해서 그의 백성이 됨이 확인이 된다.

이렇게 될 수록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면 세상과 구별이 된다. 핍박을 받는다. 세상이 그들을 핍박하게 된다. 그래서 고별사에 예수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 가셔서 그의 백성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 하셔서 그의 백성을 완성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의 백성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 부터 핍박받음의 새로운 주제로 예수의 고별사가 발전한다.




그러면 핍박 상태에 너희들을 놓아 두느냐? 그것이 아니고 성령이 이들에게 보호자 노릇을 한다. 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이 세상으로 부터 받는 핍박받는 백성들에게 성령이 보호자 노릇을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령론, 성령이 무슨 역활을 하고 어떤 분인가를 자세히 전개한다.




그것이 그 유명한 παρακλητο?다. 성령을 παρακλητοσ라 부르고 성령을 παρακλητοσ로서의 역활을 예수가 길게 설명을 한다. 성령의 역활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παρακλητο? 라 부르는 것이 요한복음의 독특한 성령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παρακλητο?로 부르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해서 종교사적인 연구를 많이 했다. 도대체 어떤 종교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령을 παρακλητο?라 부르는가? 그런데 그것에 대한 토론이 많았고 아직도 확실히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의견의 일치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다만 구약과 유대교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tandem relationship이라 해 가지고 가령 엘리야와 엘리사, 모세와 여호수아, 세례요한과 예수 등의 이런 것을 tandem relationship이라 한다. 원래 하나님의 구원사에 중요한 역활을 감당하는 사람의 후계자가 그 역활을 완성하는 것, 그런 관계이다.

여호수아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혹은 지도자이다. 그래서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의 구원의 역사를 감당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이면서 부관이면서 엘리야와 같은 역활을 감당한다. 요한과 예수도 이런 식으로 해서. 예수와 성령, 예수 그리스도와 παρακλητο?로서의 설영이 이와 같은 tandem relationship관계에 있다. 그래서 성령의 하는 일은 예수가 하는 일을 승계하고 완성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여호수아, 엘리사는 어떤 의미로 모세와 엘리야의 재현이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의 재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종교사적인 배경을 가령 묵시문학에서 천사 미카엘, 멜기세덱의 존재의 역활을 요한복음에서 παρακλητο?의 역활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토론을 하는데 이런 것은 별로 확실한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을 더 이상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런데 다만 성령이 παρακλητο?로 불리움을 받았을 때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원래는 문자 그대로 한다면 종교사적인 배경을 확실히 규명하지 못할 때 종교사적인 배경에 의해서 성령을 παρακλητο?로 불렀을 때의 그 의미를 확인 할 수 없을 때에는 그러면 헬라어 자체에서 혹 의미를 암시받을 수 있느냐? 헬라어 자체를 분석해보면 “옆에로 불리움을 받은자” 라는 말이다. 이 말은 “돕도록 불리움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이 “변호사”라는 의미로 보통 쓰인다. 법정에서 재판정에 서서 핍박받는 사람들을 변호하는 자이다. 그래서 높임을 받은 예수가 주의 위치에 도달한다.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대권을 대신 행사하는 주로 높임을 받는다. 그것이 십자가에 죽음, 십자가에 들림으로 부터 시작해서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높임 받음의 절정이다.

그런데 주로 군림하는 상태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느냐? 그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성령을 통해서 임재하셔서 그의 백성이 그를 주로 고백을 하고 그래서 그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표징이다. 성령을 받음으로서 비로소 일단의 사람들이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구별이 된다. 그래서 그들의 하나님의 백성 됨이 확인이 된다.

동시에 그것은 세상에서의 핍박에 노출되는 상태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이 핍박을 하고 싫어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핍박에 대한 경고를 한다. 이 핍박의 상황에서 παρακλητο?가 변호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식으로 변호를 하느냐? 선생노릇을 한다. 또는 설교자 노릇을 한다. 그래서 παρακλητο?가 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가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예수에 대해서 증거를 하고 곧 예수가 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터득하게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제자들이 예수가 영광을 받은 후에 ····을 기억을 했다. ”“····을 그때야 깨달았다. ”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가령 예수께서 성전에서 소란을 피운 사건, 요 2:14절 이하에 보면 영광을 받은 후에 깨달았다고 요한이 comment를 하고 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계시를 했는데 그 계시가 깨달아 지지 않았어요. 그 제자들에게 계시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성령의 선생노릇, 가르치는 역사, 증거자, 설교자로서의 역사에 의해서 깨닫게 되었다. 성령의 역활은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되어 지게 하는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는 객관적인 계시다 할 수 있다. 이 객관적인 계시가 우리들에게 주관적으로 계시되어 지게 하는 분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어떤 새로운 것을 계시하는 분이 아니다.




아! 새로운 것을 계시한다고도 볼 수 있지. 여기에 선생노릇을 한다.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해서 너희들에게 무엇인가를 선언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계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이 되고 그것이 종말에 구원으로 펼쳐질 것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선언하는 것이니까. 근본적으로 새로운 계시가 아니다. 선지자 역활을 한다.

성령의 중요한 역활은 아들을 통한 객관적인 계시를 우리들에게 계시되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객관적인 계시를 깨닫게 한다. 터득하게 한다. 말귀를 알아듣게 한다. 이것이 성령의 역활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고 지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핍박을 이기고 살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법정에 섰을 때 우리가 할 말을 우리에게 주고 이렇게 해서 우리를 옆에서 와서 돕는 변호사의 역활을 한다.

동시에 세상에 대해서는 검사 역활을 한다. 세상이 죄에 빠져있음. 세상은 불신하는 인류를 말한다. 불신하는 인류의 죄인 됨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드러낸다. 그러니까 παρακλητο?의 역활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는 변호사의 역활을 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검사의 역활을 한다.

이것은 사실 예수의 역활이 아니어요?! 예수께서 표적들과 강해를 통해서 예수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계시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는 자임을 계시했다. 그런데 세상은 이 계시를 무시하고 반대함으로서 스스로 죄인 됨을 스스로 암흑 속에 있는 자임을 드러낸 것이다. 세상에 대한 예수의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 죄인 됨과 스스로 죄악스러움과 어둠의 자식들임을 드러내는 역활을 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덧입은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는 예수의 계시가 그들의 죄를 드러내게 한다. 이것이 심판이다.




성령의 역활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의 궁극적인 역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증거하여 터득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되어 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성령의 역활을 힘입어서 예수의 그 계시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으나 세상은 거부하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핍박함으로서 스스로 세상에 속한 자들, 어둠과 암흑에 속한 자들, 하나님의 반대세력에 속한 자들이라고 곧 죄인들이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계시의 역사가 그들의 죄를 정하는 검사의 역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성령의 역사는 tandem relationship로 예수의 계시의 역활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삼위일체론적인 구조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는 분이다. 어떤 계시? 객관적인 계시이다. 왜? 우리의 참여 없이 이루어지는 계시이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다는 것이다. 계시의 제1원칙은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했다는 것은 아버지와 같다는 말이다. 이것이 객관적인 계시이다. 이 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계시를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계시되어 지게 하는 분이 성령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누구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가? 요한복음의 언어로 하면 “나의 것을” 즉 예수의 것을. 성령은 자기 멋대로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기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고 행하러 왔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자기 멋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계시를 행한다. 이 말은 아버지가 나의 이름으로 보내는 분이라고 성령을 표현한다. 즉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 아버지의 계시를 계시되어 지게 하는 분이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