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11: 55- 12: 11,기름부음

호리홀리 2015. 5. 7. 12:39

11: 55- 12: 11절 까지는 예수가 나사로와 그의 자매 마리아와 마르다의 대접을 받는 중에 마리아에 의해서 값비싼 향유로 받을 씻기심, 발에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이다. 기름부음은 히브리어로 메시아이며 에수의 메시아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다가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할텐데 왜 이것을 허비하느냐고 했다. 이것은 표적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씻는 것은 하나의 표적이다. 하나의 메세지를 담은 상징적인 행위이다. 항상 이 표적은 믿지 않은 자들에게 오해를 일으킨다. 그래서 여기서 믿지 않는 자의 대표로 유다가 그 표적의 표적성을 이해를 못하고 세상적으로 판단을 해서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일이지 왜 낭비하느냐? 그러니까 예수가 놔두어라. 이 표적의 진정한 의미를 강의해 준다. 이 짧은 이야기에 표적의 전형적인 구조가 나온다. 표적의 의미는? 나의 장사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예수의 발을 씻긴 행위로 예수의 장례절차가 기름으로 몸을 씻는 것인데 그것을 먼저 행한 것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후에 일어나고 머리에 기름부음 받음이 일어난다. 요한복음에서는 순서가 바뀐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일어나고 또 발이 기름으로 씻긴다. 여기서 두 이야기 두 판을 비교함으로서 요한복음에서 받을 메세지가 무엇인가? 한 두어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가 왕으로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왕으로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다. 재판과장에서의 논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가 그렇다. 세상의 왕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다. 예수가 왕 되심이 강조되었다. 예루살렘 입성에서 부터 수난사 전체에 예수의 왕 되심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기름부음이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일어난 것은 왕으로서, 기름 부음받은 자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이 강조된다.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음은 왕, 제사장, 선지자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주제는 숨어 있는 주제이다. 예수의 유다의 오해에 대한 반응에서 겉으로 드러난 의미는 예수의 장례 치름의 의미이다. 이것이 예수의 발을 기름부은 의미이다. 그래서 장례를 의미한다. 그래서 순서가 대제사장이 예수를 대속의 죽음 제물로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거기에 대해서 마리아에 의해서 예수가 장례됨이 상징되었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 입성이 이루어진다. 순서가 그렇게 된다. 대제사장에 의해서 죽음이 예고되고 마리아에 의해서 죽음이 예고되고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예수가 왕으로서의 등극을 상징하는)이 이루어 진다. 이것이 예수의 고별사와 수난사에서 밝히게 될 예수의 역설적인 하나님에로의 높임 받음에, 그의 왕으로서의 취임, 주로서의 취임과정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들림으로서 그의 낮아짐 그의 죽음이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십자가에 들리고 장사되고 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죽음이 그가 영광 받는 그가 왕으로서 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래서 13절 부터 시작이 되는 고별사에서 예수가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감이 계속 나온다. 이것이 높임 받음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례된 자로서 부활한 예수에게 도마가 뭐라고 고백함으로 “나의 왕 나의 주”로 고백함으로 요한복음의 클라이맥스인 그의 왕으로서 취임이 일어난다. 그래서 11장 12장의 이 이야기는 지금 이제 유월절에 펼쳐질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복귀함, 그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가 드러남, 그의 높임 받음의 사건을 표적으로 예고한다. 상징성, 표적성을 갖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복귀함을 나타낸다.

마가복음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순서에 있어서 다르다. 예루살렘 입성 이전이냐? 후이냐? 그리고 어느 부위에 부었느냐? 머리에 부었느냐? 발에 무었느냐? 에 따라 크게 다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해석가들은 이 사건이 마가와 요한이 전혀 다른 두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입성전 사건과 또 예루살렘 입성후 사건이 있었다고 해석을 한다. 성경의 무오성, 성경간의 긴장을 좁게 생각하는 자들은 이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지난 번에 가령 요한복음 2장에서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마가복음은 성전소란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성전에 소람을 피워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이 된 것으로 되어 있다. 마가보음과 공관복음의 특수성을 따르면 이렇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성전소란 사건을 요한복음 2장에 공생애의 제일 처음에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많은 보수주의 자들은 예수가 성전에서의 소란사건을 두 번 했다고 해석을 한다. 공생애 처음에 그리고 나중에 했다고 표현을 한다. 그러나 성경 무오성이라는 것을 그렇게 좁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예수의 성전청결도 소수는(J. A. T. Robinson) 요한복음의 순서가 옳다고 본다. 다수의 학자들은 마가복음 순서가 옳다고 본다. 즉 요한이 신학적인 이유로 이 사건을 앞에 갔다 놓았다고 본다. 우리 지난번에 이야기한대로 예수가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해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교제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앞에 갔다 놓았다고 말한다. 



마가복음이 더 맞느냐? 요한복음이 더 맞느냐? 둘 다  맞다. 13장에 들어가자 마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이 또 다르다.


우리가 너무 역사 실증주의에 사로잡혀 가지고 큰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사건을 다룬다. 우리가 곧 보겠지만 13장에 가면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가 유월절 전날 닛산 14일 정오에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되어 있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닛산 15일 유월절 날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되어 있다. 공관복음의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만찬이다. 요한복음의 날짜를 따르면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의 장면의 말의 신학적인 의미는 유월절 전날의 만찬이다. 그 대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은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서 제사장들이 유월절 양을 잡는 그 순간이다. 그 순간에 예수가 죽었다. 세례요한의 원래의 증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가 의미하는 것이다. 둘 다가 요한복음의 날짜를 따르던 공관복음의 날자를 따르던지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 출애굽의 성취로서 제 2의 출애굽 사건으로서 해방과 구원의 사건을 의미한다. 크게 차이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뭐냐면 하루 차이라는 것이 역사 실증주의로 보면 큰 문제이다. 여기 사는 우리에게는 큰 문제가 없다. 지구가 시차가 다 있어 가지고 팔레스타인에서 정오(닛산 15일 정오)는 여기에서의 우리 시각으로 15일 새벽 쯤 된다. 우리 주일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토요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상당히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이런 것에 집착을 하냐면 이런 것 하나 차이 가지고 성경의 권위, 성경의 신뢰성, 성경의 하나님 말씀됨이 다 무너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역사 실증주의에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해결방법은 여기 카톨릭 신학자 쥬벧. 우리가 쿰란 문서를 보면 팔레스타인에서 당시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사두개 바리새당의 달력과 다른 달력을 썼다. 그래서 그런 관찰에서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와 다른 달력을 썼다. 그래서 날이 다르다. 혹 이때에 달력 A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닛산 14일, 달력 B에 의하면 닛산 15일이 될 수 있다. 가능성이 있다. 요한은 a라는 달력을 사용해서 신학적인 목적을 위해서 예수가 유월절 양으로서 죽음을 강조했다. 이럴 가능성이 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예수가 유월절. 가령 많은 사람들은 요한이 맞다고 본다. 유월절 날 사형집행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유월절 전날 사형 당했다면 최후 만찬은 유월절 이틀 전날로 볼 수 있다(13절에서 14절로 넘어가는 것). 유월절 하루 전에 만찬을 거행하면서 유월절 만찬의식을 따랐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상상할 수 있다. 예수가 자기 체포와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보고 유월절 만찬을 못할 것으로 보고 전날 했다. 유월절 절기 중 일어난 만찬으로서 모세의 출애굽의 전형적인 성취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루 전날 시행하면서도 유월절 의식을 따라 거행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가 유월절 전날 양들이 잡히는 순간에 죽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반면에 유월절 전날 만찬 장면을 기술하지만 만찬이 있는 유월절 의식은 요한이 다 생략해 버렸다.

왜 생략했느냐? 신학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왜 요한복음에는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는 없으면서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은 있느냐? 요한에게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유월절 만찬은 유월절 만찬이 아니다. 그래서 유월절 의식을 생략했다. 공관복음의 전승은 유월절 절기 중에 죽었고 그가 유월절 만찬 전날 만찬을 행했지만 그 만찬을 유월절 만찬의식을 따라 행했으므로 유월절 만찬이다. 그래서 그 다음인 닛산 15일에 죽었다. 두 달력설이 맞느냐? 아니면 요한이 날짜가 옳으냐? 마가의 날짜가 옳으냐? 서로 보완하고 예수가 유월절 만찬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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