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11장.나사로의 부활

호리홀리 2015. 5. 7. 12:30

요한복음 11장.




11:1-44절은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장면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의 제일 큰 제일 마지막의 표적은 5장 21절에서 이미 예수가 선언한 말씀의 진리 됨을 천명한 것이다. 5장 21절에서 아버지가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생명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원하는 자들은 생명을 준다고 되어 있다.  5:21절의 선언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친 그 표적의 의미를 밝히는 것인데 또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조주로서, 생명의 주로서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분이심, 곧 부활의 주이시듯, 아들도 아버지로 부터 생명과 심판의 권세를 받아서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그 원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진리를 지금 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증명하고 있다.




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권세를 위임받은 분이라는 것을 표적하고 증명할 뿐 아니라 또 종말에 있을 부활에 대한 성취를 허락하신 것이다. 이 나사로를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종말에 하나님의 아들에 속한 자들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전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이미 여기서 주어졌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이 종말에 있을 부활의 축복을 벌써 믿음 가운데서 즐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45-53 여기에 보면 예수가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큰 표적을 행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큰일 났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죽일려고 논의했다. 여기서 예수를 죽일려고 논의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들고 있습니까? 예수를 가만히 놓아두면 예수가 저런 표적들을 자꾸 행해가면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다.


 당시 아주 긴장 속에서의 메시야 운동이 어떻게 어떤 시각으로 보여졌는가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많은 시사를 받는다. 예수 당시에 그리고 그 후에도 예수 이전에도 메시야 운동이 참으로 많이 일어났다.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유다 두다 바코크바까지. 그런데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신명기 18장 15절에 있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종말의 선지자라고 은근히 주장하면서 제 2모세로서 모세와 같은 메시야적인 행위 새로운 출애굽, 제 2의 출애굽을 민족해방을 한다고 약속을 했다. 당시 메시야 운동이 이렇다. 당시 제 2 출애굽 민족해방은 로마제국으로 부터의 독립과 해방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런 메시야 선지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출애굽 당시 행했던 표적들을 다 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고 바위에서 물을 일으키고 홍해를 건널 때 물을 가르고 질병으로 애굽의 사람들을 죽이고 한 그런 이적들도 다 자기들이 한다고 주장을 했다. 선지자들의 표적이라고 주장을 했다.

이런 메시야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면 또 그들이 한다고 주장하는 표적들에 이제 많은 사람들이 현혹이 되어 가지고 로마 사람들이 어김없이 군대를 보내 가지고 이 메시야 운동을 쳤다. 메시야 운동을 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많이 다쳤다.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했다.  열혈당의 역사가 계속 그런 역사였다. 유다와 두다가, 마지막으로 일어난 것이 바 코크바 전쟁, 주후 132년에 끝난 바 코크바 전쟁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주로 어느 때 많이 일어났느냐면 출애굽의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전후해서 메시야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유월절 쯤 되면 가이사랴에 주둔하는 로마 총독이 증파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와서 주둔해서 백성들을 세밀하게 감시했다. 이런 메시야 운동이 일어나면 즉각 개입을 해서 그 운동을 쳐 없애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지금 그런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로서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던 당시의 상층 상류층 귀족층이었다. 바리새파는 사회계층적으로는 중산층이었고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 출신이었다. 사두개파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의 타협으로 성전체제가 유지 되었다. 그래서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의 성전에서의 기득권을 인정하면서 또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의 율법해석을 따른다고 해서 서로 양보하고 타협함으로 성전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야 운동이 크게 벌어져서 로마군대가 이 메시야 운동을 치러오면 그 과정에서 백성이 많이 다치고 자기들의 양보와 타협으로 이룬 성전체제가 흔들리게 된다. 성전체제에 로마 정부는 많은 것을 주었는데 특권을 회수할 수도 있고 자기들에게 많은 손상이 온다. 이런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이 같이 모여서 예수의 메시야 운동을 중단하기 위해서 상의했다.




이때 대제사장이 51절에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예수가 백성들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대제사장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합니까? 예수 한사람을 없애므로서 이 메시야 운동을 종결시켜서 로마 사람 로마군대가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백성들에게 올 해를 미리 방지하겠다는 말이다.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예수가 할 수 없이 죽어야 하겠다는 말이다. 대제사장은 이런 뜻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사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운영에 의해서는 정확한 제사장직의 성취이다. 예수가 백성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로 대속의 제사로 십자가에 바쳐지는데 속죄의 제사는 보통 누가 주는 것입니까? 대제사장이. 왜? 온 민족을 위해서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속죄의 제물의 피를 가지고 가서 지난 1년 동안 지었던 하나님의 백성의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속하는 제사의식이 있었다. 온 민족의 죄를 속함 받기 위해서 대제사장이 하는 제사의 일이다. 예수가 이제 곧 십자가에 스스로를 속죄의 대속의 제사를 온 민족들을 위해서 온 백성들을 위해서 바칠 것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바친다고. 대제사장이 자기 직책상 예수를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로 바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커다란 요한복음적인 역설이 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야 운동을 중단함으로서 로마군대에 의한 다침을 방지하려고 한 것이다. 곧 그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을 중단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에 적대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생각에 민족을 보호하고 자기들의 권익을 보호할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제사장과 지도자들의 자기 아들 그리스도의 메시야 운동 곧 자기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반역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뜻을 성취하고 말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빚는 역설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서 대제사장의 예수에 대한 말의 의미에 대해서 51-52절에 그렇게 주석하고 있다. 51-52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 미리 말함이니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요한복음 11:49-52절 까지는 어쩌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18절 이하에서 2장 12절 까지에서 펼치는 십자가의 도의 역설의 가장 좋은 주석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고전 2장 6절 이하 완전한 자들에게 이 세상의 지혜도 아니요 관원들의 지혜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한다고 하는데 이 지혜는 8절에 보면 이 세상의 관원들 가운데 아무도 못 알았다. 만일에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을 해요. 요한복음에 있어서 대제사장의 예수에 대한 태도,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면 지금 바울의 이 말에 대한 좋은 주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인간으로서 짜낼 수 있는 그의 지혜에 따라 예수가 죽어야 한다. 그래서 로마사람들로 부터 민족이 해를 받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를 짜낸 것이다. 인간의 지혜는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적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위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최대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 자기에게 적대하는 인간의 지혜를 역이용하는 지혜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자기의 최대의 지혜를 짜냈지만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이용해서 자기 아들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만민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바치는 자기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고 말았다.

빌라도와 예수의 대결도 마찬가지이다. 빌라도는 세상의 왕인 가이사의 대표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대표이다. 세상은 암흑 거짓 하나님 나라는 진리의 영역 진리의 체현인 나라 곧 길 진리 생명인 예수를 아� 거짓 환상에 불과한 세상의 주인 가이사의 대표인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다. 여기 얼마나 큰 역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빌라도와 예수의 재판에서 거짓이 진리를 재판한다. 이 상황속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무엇을 선언하는가? 유죄판결을 내리고 사형언도를 내린다. 이렇게 함으로 스스로 거짓과 불의의 체현임을 드러낸다. 바로 이 빌라도의 재판을 하나님께서 이용해서 세상의 거짓되고 불의함을 드러내고 그의 아들의 진리 됨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의 지혜를 이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얼마나 우리에게 큰 용기와 위로가 됩니까? 이 세상이 이 역사가 하나님의 간섭 없이 인간의 꾀에 맡겨진 것이라면 항상 의가 진리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불의 거짓이 승리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아무 소망이 없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이 시사하는 여러 진리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 불의 거짓을 이용해서 자기의 선한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고 자기 진리를 드러내시고 자기 의를 세우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거짓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소망을 주고 새로운 삶의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대제사장이 예수의 죽음을 만민을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서 이야기하는 이 이야기를 나사로를 살린 사건과 결부시켜서 이야기함으로서 또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할려고 하는 것이다. 나사로를 부활시킨 표적이 보여주듯이 예수는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느냐 하면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준다는 말이다. 나사로의 부활의 이야기에 이어서 이 예수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예고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한다 하는 것이다. 즉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이야기가 이 표적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인데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생명을 주느냐? 자기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곧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메세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