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10장 ,선한목자

호리홀리 2015. 5. 7. 12:19

요한복음 10장




요 10장은 선한목자에 대한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서 예수의 구원자되심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양떼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백성의 목자로 부르는 것은 구약의 언약신학의 표현으로서 구약에 흔한 그림이다. 하나님이 목자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 양떼들이다. 또 하나님이 자기 대신 자기 백성을 돌보도록 세운 왕, 선지자, 제사장, 지도자들이 자기 백성의 목자들이다. 그런데 다윗이 훌륭한 목자였다. 다윗과 솔로몬 이라고 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사장들은 거짓목자, 삯군목자였다. 그래서 에스겔서 34장에서 정죄한 것과 같이 이 의롭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목자들이 그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도덕질하고 그들은 진짜 잘먹이고 보호하기는 커녕 그들은 잡아먹고 가죽을 벗겨서 옷을 입고 그들은 방치해서 그 양떼들이 온 땅에 흩어졌다. 에스겔서가 쓰여질 당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의 온 땅에 흩어졌고 짓밝히고 종노릇하고 흩어지고 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온 디아스포라 세계에 흩어져 유리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이들의 목자가 되겠다. 그들을 자기 땅으로 다시 회복하게 하겠다. 다윗과 같은 다윗위 자손의 목자를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겔 34장이다.

요한복음 10장이 이 에스겔서 3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수가 바로 그 선한 목자이다.  다윗과 같은 선한목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겔 34장, 37장, 미 5:3, 시78:71-72). 또한 하나님이 선한목자인데(시23:1, 80:2, 렘31:9) 예수가 바로 내가 선한목자리고 한다.

자신을 선한목자라고 부르면서 어느목자와 대조하고 있나? 삯군목자들과 대조한다. 요 9장에서 소경에게 바리새인들이 유대성전의 제사장들이 이 사람에게 목자노릇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목자노릇은 커녕.  반면 예수는 35절에서 이 양에게 찾아 올 뿐아니라 그 양을 위해서 그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 목숨을 내 놓을 분이다. 이렇게 요 9장에 있어서의 소경에 대한 바리새인과 예수의 대조를 요 10장에서 예수께서 주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예수가 선한목자로서  양떼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분이다. 대속의 죽음을 하실 분이다.


두번째 그림은 내가 양의 문이다. 9절에 문이다.  이 문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연상케하는 그림언어이다. 헬라인들은 하늘에 문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독특하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더물어 쓴 어휘가 독특하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 “온다”는 동사이다. 우리말 번역에는 임한다고 되어 있고 또 하나의 독특한 어휘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 “들어간다”는 말이다. ‘온다’ ‘들어간다’는 말은 숙어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없이도 ‘들어간다’고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가령 롬11:25절에 보면 바울이 로마 이방인들에게 이 비밀은 꼭 알게 해야겠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심장이 완악하게 된다. ‘들어온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잘 안 쓰는 사람들에게도 초대교회에서의 들어온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다는 숙어이다. 여기서 예수가 스스로를 문으로 나타내고 들어온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로의 들어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 통로로서 그를 통해서 들어가야 거기에 구원이 있다.

여기서 양에 대한 그림으로 두가지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는 선한목자로서 대속의 죽음을 하시는 분, 하나는 양떼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구원을 얻게하는 문이다. 이것이 대충 1-21절 까지의 개념들이다.

22-30절 까지는 강력히 예정론적인 언어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24절 부터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도전한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라. 왜 알쏭달쏭하게 말하느냐? 예수가 그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다 증거한다. 눈뜨고 믿으려고 하는 자에게는 환하게 보여진다. 환한 계시이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했어요? 소경을 하나 고쳐주었다고요. 이 일은 그들이 모세의 성경을 잘 알면 분명히 메시야의 일인줄을 안다. 왜? 이사야서 29장에 써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렇게 일을 하는데도 오천명을 먹이고 38년된 병자를 고치고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분명히 다 드러낸다고요. 더 분명할 것이 무어가 있습니까? 내가 하는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일들이고 내가 하나님께로 부터 왔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 그런의미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왜 안믿어? 너희들은 내 양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종말에 창조하고 모으는 구원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아니다. 그래서 보고도 못 본다. 깨닫지 못하고 믿지를 못한다. 반면에 내 양떼들은 내 목소리를 듣고 나도 그들을 알고 그들도 나를 따른다. 이렇게 목자와 양떼들 간에는 서로 알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양떼들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따르고 예수의 제자들이 된다. 따른다는 말은 제자가 된다는 소리이다. 그들에게 나는 영생을 주고 이런 관계다. 아주 예정론적인 구원이다.

지금 무슨 현상이 벌어지고 있느냐면 예수가 계시를 한다. 세상의 빛으로 계시를 한다. 어쩔수 없이 항상 청중들은 두개로 갈라진다. 다수의 불신자들, 계시를 보지 못하는 부류와 소수의 믿는 자들로 분류된다. 분리현상, 이것이 심판이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되느냐? 어떤 사람들은 계시의 빛을 보고 깨닫고 믿고 어떤 사람들은 계시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되느냐? 궁극적으로 예정론적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들을 예수의 손에 그의 양떼들로 맡겼다. 그 소리는 무엇을 함축하느냐면 그렇지 않는 자들 그들은 예수의 양떼들이 아니다. 이런데서 나온 것이 이중예정, 구원의 예정과 멸망의 예정이다. 그런데 잘 모아야한다.

그 다음부터 나온 것은 28절에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치 않는다. 그들을 나의 손에서 빼앗아 갈자들이 없다. 나의 아버지게서 나에게 주신 것은 더 크다. 누구도 아무도 그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28-30절에서 강조되는 것이 무엇이냐?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아주 좋은 perspective를 제공한다. 예정론의 교리는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해서 믿는 자가 되고 믿지 않는 자가 되는가? 하는 믿음의 현재의 상황에 대한 반영에서 출방을 하지만 그것의 궁극적인 관심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예수의 양떼들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예수의 양떼 밖에 멸망의 자식들로 예정하시는가? 거기에 있지 않다. 어디에 있어요? 궁극적인 관심은? 양떼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키신다. 그리스도가 끝까지 지키신다. 거기에 예정론의 관심이 있다. 예정론의 출발은 믿음의 현재이다. 복음이 선포되었을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일어날때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어떤 사람은 불신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부터 관찰이 출발되나 관심은 종말까지 이들을 지키신다는데 있다. 우리 인간의 호기심은 아주 출발쪽으로 가려하나(선택과 유기) 성경은 우리의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자꾸 출발쪽을 생각하면 우리는 예정론을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불안하게하고 근심걱정하고 불안하게 하는 교리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예정론은 끝까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이다. 선한목자이신 예수가 우리를 끝까지 지킨다. 아무도 우리를 복음의 손길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심지어 사단도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다. 우리의 영생이 확실하다. 그래서 예정론은 우리에게 위안과 확신을 주는 교리이다. 바울이나 요한이나 이점은 확실하다.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예정론을 펼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무나 오래동안 프로테스탄트식의 , 스콜라 철학에서는 구원의 서정이라 해가지고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거기서 부터 출발을 하니까 이해할리 없다.

 

그 다음에 31-39절 까지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과의 하나됨. 이것은 30절에 있는 말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으로 인해서 더욱 확대되는 토론이다.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분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신약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11: 55- 12: 11,기름부음  (0) 2015.05.07
요한복음 11장.나사로의 부활  (0) 2015.05.07
요한복음 9장 ,세상의 빛  (0) 2015.05.07
요한복음7~8장,빛과 생명  (0) 2015.05.07
요한복음6장,영생의 떡  (0) 2015.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