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6장,영생의 떡

호리홀리 2015. 5. 7. 10:09

1-15절까지는 유월절 무렵에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에 차고 남았더라는 이적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적을 행하니까 6:14절에 그 사람들이 예수가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진짜로 이 세상에 오기로 한 선지자라고 판단을 했다. 이 말은 신18:15절에 근거한 말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약속했다. 그래서 신역시대의 유대 종말론에 의하면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그 당시 메시야 사상은 여러가지로 복잡하다. ) 모세가 행한 출애굽의 구원을 되풀이 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종말의 구원을 제 2의 출애굽으로 보았다. 그래서 민족의 해방 모든 이방인들을 굴복시키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되찾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풍성한 자유와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제 2의 출애굽을 이룰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 메시야는 모세가 행하였던 모든 이적을 되풀이 할 것으로 보았다. 애굽의 이적 광야의 이적을 되풀이 한다. 그래서 만나를 먹이고 또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내실 것이다.

종말에 있을 메시야의 오심은 출애굽의 되풀이 이면서 태초의 낙원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보았다. 원래 낙원에서 포도 한 송이가 장정이 수명이 들어도 못들 정도로 크다. 낙원에서의 모든 것을 죄로 다 잃어 버렸다. 그런데 이 잃어버렸던 것들이 종말에 다 회복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오천 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시니까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학적인 배경으로 즉각 판단했다. 야! 이거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이에 나타났다. 그래서 모세와 같은 출애굽의 구원역사를 되풀이 할 것으로 보았다. 그 중에 한 가지를 한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 선지자구나 하고 판단했다.


그것도 언제 했느냐? 유월절에 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에 예수가 오천 명 군중을 먹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것만으로는 우리보다 신학적으로 더 상당히 깊은 깨달음인 것 같은데 예수는 그것이 틀렸다고 한다. 왜 틀렸느냐? 그들은 예수를 붙잡아서 모세와 같은 왕을 만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으려고 하니까 예수가 도망을 간다. 왜? 그것은 틀렸다. 왜 틀렸는가? 25절에 그들이 바다 건너로 도망을 가니까 맨발을 벗고 달려와 예수를 다시 붙잡는다. 그리고 예수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하니까 예수가 26절에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합니까? 아주 훌륭한 문장이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나를 추구한다. 27절에 썩어져 가는 음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계속 남는 음식을 위해서 일하라. 그 음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14절에 보면 예수가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러니까 선지자로서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다고요. 만나를 먹인다. 예수 이전에 예수 당시 신약시대 이후까지도 유대에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나온다. 이들이 대게 주장하는 것은 모세의 이적들을 되풀이 한다고 주장하며 바로 그를 통해서 자기들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이 사람들은 예수의 하신 일을 표적으로 보았다구. 모세와 같은 건지자의 표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왜 예수는 너희가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느냐? 제 2의 모세로서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을 하는 그 정도의 표적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의미로 예수가 구원자임을 생명을 가져다줌을 나타내주는 표적이다. 



떡의 기능은 무엇이냐? 생명이다. 떡은 살기 위한 것이다. 떡의 상징성은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떡을 먹이게 했다는 사건은 예수가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육신적인 충분한 양식을 가져다주는 제 2의 출애굽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그런 구원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 훨씬 깊고 근본적인 구원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27절에서 대조를 하고 있다. 하나는 썩어져 가는 떡 이것은 썩어져가는 생명만 가져다 줄 수 있는 떡이다. 영생하도록 있는 떡은 영원히 존재하는 영원히 거하는 떡인데 그 떡은 영생을 가져다 주는 떡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추구하는 것은 전자이다. 모세가 먹인 만나도 그리고 너희 유대 종말론에서 말하는 제 2의 모세가 종말에 가져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도 전자다. 왜 만나가 썩어져 가는 떡이에요? 만나를 먹은 사람은 다 죽었고 만나는 하루 지나면 더 썩어 간다. 영원히 남는 떡이 아니다. 그래서 제 2의 모세가 이루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풍요로움도 우리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영생을 보장하는 떡이 아니다. 너희가 나를 열심히 따라오는데 나는 그런 게 아니고 영원히 남는 떡 영생을 가져다 주는 자이다.

오늘 물질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로 하여금 자꾸 떡을 가져다 주고 왕이 되 달라고 요구한다. 해방신학 정치신학의 이름으로 예수보고 우리들에게 제 2의 출애굽을 하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되라. 우리의 왕이 되어 가지고 우리에게 해방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라고 주장한다. 전부 예수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 왕으로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제 2의 출애굽을 이루는 분으로 한다. 해방신학은 해방을 출애굽에 두고 있다.

영원히 남는 떡은 무엇이냐? 35절에 예수가 그들에게 말하되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굶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는다

41절에 유대인들이 수군거렸다. 이 사람이 자기가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나? 우리가 저를 다 아는데. 아주 요한복음적인 역설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알아도 몰라요. 모른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시적 물질주의적인 판단 기준에 의해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주장을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예수를 그들은 모른다.


이것이 하늘로 부터 내려온 떡이다. 누구든지 그로부터 이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는다.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다. 누구든지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 내가 주는 이 떡은 나의 살이고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주는 나의 살이다.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다. 그것을 51절에서 더 확인을 했다. 이는 하늘로 부터 온 떡이다. 영생을 주는 떡이다. 나의 살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큰일이 났지. 어떻게 자기 살을 먹도록 줄 수 있느냐? 는 말이지. 유대교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여기에 대해서 53절에서 예수가 아주 중요한 선언을 한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그들 안에 영생을 갖지 못한다. 55절 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절 인자 곧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가 그들 안에 거한다. 이것은 연합을 말한다. 하나 됨. 57절 살아계신 아버지가 나를 ------살게 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언어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공관복음에 있어서 최후의 만찬을 기억해야 한다. 막 14:17-25절 까지를 읽어보라. 최후의 만찬의 마가복음판에 의하면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간다. 이 말은 구약이 예언한 대로 죽는다는 말을 기분 좋게 표현한 말이다. 이것을 유테미즘이라 한다.




막 14: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20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인자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냐?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죽는다. 내일 십자가에 죽는데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연극으로 보여준다. 연극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떡을 떼는 제스츄어와 빨간 포도주를 붓는 제스츄어와 그것을 해설하는 것이다. 떡을 떼는 손짓과 해설, 빨간 포도주를 붓는 손짓과 해설로 되어 있다. 이 드라마가 내일 다가오는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몸의 극적으로 피 흘리는 사건인데 이 피가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이 소리는 이사야 53:10-12절까지에 있다. 기록된 바와 같이 성경에 예언된 대로 간다고 그랬지. 그러니까 그의 죽음은 성경의 예언의 성취이다. 어디에 예언이 되었느냐? 사 53장에 예언되었다. 주의 종이 패역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스스로를 대속의 제사로 자기 영혼을 흘린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죄의 용서함을 얻고 그들을 다시 의롭게 한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다음에 “언약의 피”다 이 소리는 출애굽기 19장 또는 24장 또 렘 31:34절 또 사42:6 42:8절 등에 의하면 출 19장에 보면 모세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장면이다. 언약의 제물을 제사로 바치고 그 제물의 피를 이스라엘 회중에게 뿌리면서 언약의 피다 언약의 피다고 함. 그러니까 예수가 내일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옛 출애굽 당시 모세가 세웠던 그 언약에 상응하는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라는 말이다.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는 예레미야서에도 있고 이사야서에도 고난 받는 종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바쳐진다고 예언되었다. 이 새언약을 세우겠다는 예언에 따라 옛언약(출19장)에 상응하는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라고 자신의 죽음을 해석한다.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대속의 제사다(사 53장)




출애굽기24장3-8

출 24: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결과는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새언약으로서 세우는 제사로의 결과로 일어나는 일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창조이다. 언약을 세운다는 소리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이것이 언약의 공식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운다는 소리는 이 땅의 사람들을 택해서 자기 백성을 삼고 자기가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들을 보호 인도 부양하겠다고 약속, 언약을 세웠다는 소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았다는 소리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하겠다는 소리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내일 자기 죽음을 거기에 상응하는 새언약을 세우는 것으로 보았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해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건이다. 그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가? 속죄의 제사가 드려져서 의로운 백성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간추리면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인자로서 죽는 것은 자기 죽음이 새언약의 제사로서 새로운 의로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이다고 해석해 주었다.




이와 같은 예수의 이적이 구원의 사건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사건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성경적인 그림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이다. 아들의 기본적 상징은 상속자라는 말이다. 바울은 로마서8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 이 말은 상속받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이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은 얼마나 부자냐? 5억만 된다 해도 상속자가 되면 좋다. 하나님은 100억짜리냐? 1000억 짜리냐? 무한하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유한성에 있다. 제한성에 있다. 결핍에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부요함과 영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이다. 유한성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병고에 있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함을 상속받는다. 이런 자는 신적인 삶을 산다. 이런 삶은 영생이라 한다. 이런 구원을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다. 자기의 죽음이 이러한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우리는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6장이 해설한 것이다.




우리의 영생을 인자이신 예수가 가능케 한다. 어떻게? 자기 몸을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주고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어 바자르를 헬라어 소마와 싸륵스로 번역이 가능하다. 공관복음에는 소마로 번역했고 요한복음에서는 싸륵스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한 소리는 무엇이냐? 떡의 상징성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어떻게 생명을 주느냐? 자기 몸을 십자가의 대속으로 줌이로다. 우리가 어떻게 덧입느냐? 믿음으로 된다. 왜? 믿음은 우리를 예수에게 연합시킨다. 그것은 요한복음에는 피를 마신다. 살을 먹는다. 먹고 마시면 우리가 예수안에 거하고 예수가 우리안에 거하는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영생을 얻게 된다.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은 자기가 바로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그를 믿고 그와 연합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 풍요로움을 갖다 주는 세상적인 왕으로만 이해를 했다.

66절에 보면 예수가 열심히 설명해 주니까 다 도망가고 누구만 남았어요. 제자 몇 명 남았다.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느냐?고 대답한다. 썩어져 가는 양식을 추구하던 유대인들은 떠나감. 영생을 주는 양식을 추구하던 제자들 남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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