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3장,영과 육

호리홀리 2015. 5. 6. 12:28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관원으로  산헤드린 공회의원 이었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유대교의 대표적인 유대인이다. 유대교의 심오하고 성결하고 좋은 부분을 대표하는 자이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찾아 왔다. 밤은 진리와 거리가 먼 혼돈의 질서 속에서 이 세상의 혼돈과 고난을 상징해서 하나님과 진리의 세계와 반대의 세계를 말한다.

이 때 니고데모가 빛이신 예수께로 나아온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9:4, 11:10, 13:10절 등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몇 번 쓰인다. 3장 19, 21절에서 빛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가 세상의 빛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고 그 계시에 부정적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데 2절의 밤은 그 빛과 대조적인 현상이다.


니고데모가 와서 랍비여 당신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그 선생임 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라고 복수로 말하는데 여기 니고데모도 2:23절에 언급된 예수의 첫 표적들을 보고 예수에 대해 열려진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자들을 대표해서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3절에 예수가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표적들을 행한다고 믿었다. 그런 태도로 거기서 더 깨우침을 받고자 밤에 찾아 온 것이다.

예수가 아멘 아멘 아노센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느니라. 여기에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첫째는 아멘 아멘 이라는 말은 유대교에서는 당시 하나님의 말씀선포 끝이나 기도 끝에 썼다. 그것은 진리 됨과 신실함을 천명하는 것으로 썼다. 예수는 항상 아멘을 먼저 쓰고 중요한 선언을 했다. 이것을 예수의 독특한 아멘 사용법이라 한다. 여기서 예수가 스스로 선포한 말이 아멘 됨 진리 됨을 보장하는 예수의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권위주장을 깨달을 수 있다. 가령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고 말함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 여호와께로 돌려서 자기 말의 진리 됨과 신적인 권위를 보장받으려고 했는데 예수는 정반대로 아멘 그리고 내가 말한다고 말함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돌리고 자기가 중요한 말씀을 하는데 그것이 아멘으로 보장한다 해서 선지자들보다 더 직접적인 하나님의 절대 계시자로서의 자기 주장을 했다. 공관복음에는 아멘이 한 번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아멘이 두 번 나온다. 우리 말은 진실로 진실로 라고 번역을 해서 이 말이 얼마나 독특한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을 번역을 하지 말고 그냥 아멘 아멘으로 두었어야 했다.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선지자 보다 더 권위 있는 자라고 니고데모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아노센 거듭난다. 는 말이 중요하다. 번역을 하지 않고 그냥 쓰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위로부터 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다시의 의미가 있다. 요한은 둘 다의 의미로 쓰고 있다. 위로부터는 헬라의 이원론적인 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위는 하나님의 영의 세상이고 아래는 육의 세상 물질의 시간의 세상이다. 이래 있는 사람이 위로부터 나야 한다.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 영생에 참여할 수 없다. 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이 세상에 속하는 존재로서 죽음에 얽매여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동참하려면 위로부터 나야 한다. 이미 난자가 나야 하니까 다시 나는 것이다. 육으로 난 자가 위로부터 나야 하니까 다시 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란 예수를 믿음과 세례를 통해 새롭게 된 것으로서 다시난다. 거듭난다는 개념이다. 1:12 11:52 요일2:29 3:9 4:7 5:1, 4, 18 등에 다시난다는 그림언어가 똑같이 나온다. 이것은 요한이 절대적으로 쓰는 그림언어이다. 믿음과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됨이 다시남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외 벧전 1:3, 23 딛 3:5 등에도 그림언어가 비슷하게 쓰이고 있다. 바울은 더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로 “새창조” “새피조물(고후5:17)”로 표현한다. “거듭난다”는 것이나 “새창조”가 나타내려는 reality는 다 똑같은 것이다. 육의 상태에 있는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죄와 죽음에 얽매여 있던 존재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존재로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요한적인 그림언어가 벤전 디도서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위로부터” 난다는 의미가 첫째 의미이고 “다시” 난다는 것은 부차적인 의미이다.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4절 니고데모가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는 가?” 하고 질문한다. 여기서 유명한 오해가 발생한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대표이고 예수에 대해서 조금 눈이 띄인 상태이지만 영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참여하지 않는 자로 육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윗세상의 진리를 알리가 없다. 육의 사고방식으로 밑의 세상으로 인식을 할려고 하면 예수의 말씀을 오해할 수 밖에 없다.




5절 예수가 다시 말한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5절은 3절을 되풀이 하고 있다. 병행구절이다. 5절과 3절을 똑같은 말이다. 3절의 “아노센”을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고 5절은 풀어서 쓰고 있다. 세례의 물은 성령의 상징어이다. 성령의 힘이 역사하는 세례는 물로 일어난다. 물로 깨끗이 씻김을 받고 육에 속한 삶을 끝맺고 위의 세상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존재로 다시 나는 일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가 이 말을 유대인의 대표인 니고데모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유대교도 유대인의 가장 심오한 것도  땅에 속한 것이다. 유대교에서 자연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없고 거기에는 과격한 단절이 있어야 한다. 이 단절은 예수께서 가져오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 나야한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수양과 열심과 지혜가 아무리 심오하더라도 또 고귀하더라도 인간적인 가능성의 최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 도덕 이런 것에 대한 강력한 평가가 이 속에 있다.

가장 고귀한 지식 종교성도 우리 인간을 하나님 나라 영생 하나님의 세상으로 인도할 수 없다. 그 구원은 “위로부터” “성령으로부터”나야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을 예로 들어 인간의 모든 종교성에 대한 평가를 말하고 있다. 지혜, 과학의 발달, 도덕성 함양, 교육을 잘 시키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의 자유주의, 낙관론적인 사상, 진화론적인 사상이 그랬었다.

새창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위에서 오는 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요한복음에서 두고 두고 2중 3중의 의미를 가진 말을 많이 접할 것이다.

6절 7절에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일 수 밖에 없고 성령으로 난 것만이 영이다. 육적인 가능성을 아무리 개발해도 육이다.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reality에 참여할 수 없다. 영으로 난 것만이 영이다.




7절에 위로부터 나야한다는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놀라지 말라.

8절은 첫째 인간으로 부터는 꿰뚫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의 자유함과 심오함을 말한다. 인간의 의지로서는 control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의 자유함과 심오함을 말한다. 둘째 반면에 영의 역사의 결과가 분명히 나타남을 말한다. “푸뉴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영”이란 말은 “숨”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 말은 “영”이라는 뜻도 있고 “바람”이라는 뜻도 있다. 예수가 영의 역사함을 바람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의 그림은 바람의 주권자적인 자유로움에 비유해서 인간이 control할 수 없는 영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그 영의 역사의 결과는 알 수 있다


9절 통 못 알아 듣겠습니다.

10절 예수가 핀잔을 준다. 유대교의 한계성을 말해주고 있다.

11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참여함을 체험하고 우리가 그것을 증거하는데 니고데모로 대표되는 너희들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느냐?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 땅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12절에 우리가 땅에 속한 일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일을 말하면 너희가 믿겠느냐? T. K. Barret의 설명이 옳은 것 같다. “땅에 속한 일”은 이 물리적인 세상 육신적인 세상의 사건들로서 예컨데 태어남. 바람이 분다 등의 사건들로서 그리스도와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비유 역활을 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난다, 태어난다, 바람이 분다는 땅의 현상을 비유로 들어 하늘의 현상을 설명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못 알아 듣고 예수를 믿지을 못했다. 그런 상황속에서 하늘의 것은 하늘의 질서는 이 땅의 비유와 연결시키지 않고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무슨 소용이 있느냐? 즉 땅의 것인 태어남 바람부는 현상으로 땅위에 속하는 물리적 현상으로 하늘에 속한 진리의 비유로 쓰이는 것들 하늘의 진리를 땅위에 있는 현상으로 비유해서 설명해도 못 알아 듣는데 비유하지 않고 하늘의 진리를 직접 말하고 선포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는 말이다.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유대교에서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계시하는 자.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 선지자들의 계시를 유대인들이 성경으로 묶어서 연구하고 하나님을 터득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의 계시를 가장 잘 터득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이다. 이스라엘의 선생이고 유대관원이고 바리새인이다. 제일 열심 있는 연구가이다. 그도 한계가 있다. 하늘의 진리를 못 알아 듣는다. 심지어 비유해서 설명을 해도 못 알아 듣는다. 이것이 유대교의 한계이다. 왜 유대교에 한계가 있느냐? 선지자 자신들이 이 세상에 속한 자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 세상에 그 말씀 하나님을 계시했기 때문에 그들 자신들이 제한적이었다.

 반면에 예수는 누굽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로서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다. 곧 위와 아래 세상에 속해서 다리를 놓은 사람이다. 하늘의 진리를 몸체로 이 세상에 나타내 주는 분이다. 예수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서 다시 올라가는 자로서 계시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유대교의 계시 방법은 간접적인 방법이다. 반면에  성육신 하신 로고스가 하나님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계시한 것이다. 이렇게 계시의 역사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이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지자 시대에 속하는 대표적인 존재로서 계속 파고 파서 연구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계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새로남의 방식이다.


14절 15절 우선 13절에서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의 “올라간다”는 말과 14절 “높임 받는다”는 말은 동의어이다.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고 하늘로 올라간다. 따라서 “높임받음”과 “올라감”은 동의어이다. 어떻게 올라가느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여기서 “높인다”는 말은 이중의미가 있다. 첫째 문자 그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지상에서 들린다는 말이다. 둘째 그것은 동시에 지표에서 들림은 예수의 영광 받음이다. 영광 받음이란 예수의 본질이 드러남이다. 요한복음 13-20장 까지가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영광의 책이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예수의 십자가에 들림이 비교가 되고 있다. 비교점은 무엇인가? 랍비들의 해석은 쳐다본 자는 살고 보지 않는 자는 죽는다. 구리뱀의 구원의 힘은 놋 뱀을 쳐다본 자는 위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신뢰하고 그를 의지했다.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을 앎 이것이 구원의 힘이 있었다고 해석을 한다. 이 예수는 눈으로 보는 사람은 거기서 바로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 하나님께 의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신 사건이다.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절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아들을 주셨다. 이것이 내어줌의 형식(giving a formular)이다. 하나님이 주어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목적어인데 목적어를 내어 주셨다. 무엇하기 위해서 내어주셨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내어줌의 형식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준다. 내어줌의 형식의 대표적인 구절은 요3:16절이다. 또 롬 8:32 갈2:20 요일 4장에도 나온다. 나올 때마다의 강조된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사랑을 한 증거는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무엇하기 위해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자기에게 반역한 이 세상 자기의 피조물이나 계속해서 자기에게 반역하는 존재.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심오하다. 세상을 쭉 찾아보고 종합해 보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나님과 적대하는 관계 사단의 권세아래 암흑에 속해 있고 거짓 아래 있는 것이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어느 정도 사랑하느냐? 아들을 내어줌이다. 그의 아들을 내어줌은 그리스도 사건 전체이다. 성육신에서부터 십자가에 죽으심까지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주신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의 절정은 어디서 일어났느냐?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 요한일서 4장 8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가 나타났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자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하는 자다.

계시의 첫 원칙은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같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분으로서 그의 하나님 됨을 나타냄이다. 그 사건이 수난인데 그것이 예수를 하나님 됨의 본질을 나타냈다. 십자가 사건으로 비로소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예를 들면 도마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예수의 영광 받음 사건이다. 놋뱀 사건이 위를 쳐다봄으로 세상의 가치들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고 위로부터 오는 위에 계시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이 육의 세상에서 자기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찾으려 하고 행복의 조건을 찾으려 하고 돈 지식 명예 등을 추구하는 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 들림 받은 예수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구원받는다. 들림 받은 사건은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인데 그 사건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함을 계시함으로 동시에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된다. 영생은 신적인 삶이다. 종말론적인 의미이다. 이 시대의 삶이 아니고 오는 세대의 삶이다. 시간적인 이원론으로 표시했을 때 이 세대의 삶이 아니라 오는 세대의 구원의 세대의 삶이다. 헬라적인  이원론으로 한다면 이 세대의 삶은 물질의 삶 오는 세대의 삶은 하나님의 세계의 삶 영생의 삶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삶이다. 이 세대의 삶은 육신적인 제한된 자원으로서의 삶이다. 이 삶은 고난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삶이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시간의 제약 때문이다. 이 세대의 삶은 결핍 가난한 삶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이다. 이것은 죽음의 증상들이다. 우리가 죽음 병에 걸린 것이다. 죽음 병의 증상들이다. 죽음이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이 되었다. 죽음의 세력에 붙잡혀 있다. 감기가 걸리면 증상을 나타내듯이 영생은 생명이라고도 한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 질들로 만들어진 삶 신적인 삶이다. 여기에는 고난 결핍이 없다. 이것이 생명이다. 이 삶은 이 세대의 삶과 전혀 다른 것이다. 질적인 근본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는 것이다. 아직 완성이 안 되었지만.




17절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다. 16절에 내어줌의 형식이 있다. 17절은 보냄의 형식(sending formular)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다 보냄의 형식에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사자는 보낸 주인의 전권대사이다. 주인의 전권을 행사하는 자이다. 이런 보냄(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속에 숨어 있다. 특히 지혜의 신학이 배경을 이룬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으로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agent 실행자 일꾼 노릇을 한다. 요한복음 서문에서 유대 지헤의 신학의 배경으로 로고스라는 천명이 이루어 졌다.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로 말씀으로 구약시대에는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떻게 역사하셨느냐? 그의 말씀 지혜를 통해서 역사하셨다고 점진적인 계시의 초보단계에서 깨달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더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보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전권대사이다.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 아들은 상속자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에 참여하는 자,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전능함, 하나님의 모든 속성,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라는 소리이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목적은 즉 예수를 보낸 목적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계시해서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예수가 담당했다. 이 목적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들림 받은 사건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들림 받음을 보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구원 영생에 도달한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여기서 부정적으로 말하기를 예수는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고 한다. 심판은 정죄 벌준다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하려 왔다. 그런데 그 다음절에 금방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정죄 받지 않고 구원받고 영생에 참여한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아 버렸다 하고 몇 절에서 이 말을 부연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의 십자가를 예수 당시 예수의 십자가 복음이 선포될 때 예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쳐다보고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뜻을 헤아려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자가 있는가하면 예수가 죄인이라고 예수를 정죄하는 자가 있다.

로마의 관원, 제사장, 유대인, 빌라도는 예수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사형에 처한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이 세상에 계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낸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가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사형에 처했다. 예수가 빛으로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 다 주는 빛으로 오셨다. 그 빛이 십자가에 나타났다. 그런데 소수 몇 사람은 그 빛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을 덧입었다.

이런 현상은 항상 일어난다.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항상 어떤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구원을 덧입고 어떤 사람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리석음이다. 미련함이다. 걸림돌이다고 정죄한다. 그래서 가룟유다 같은 사람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원하러 오셨는데 항상 무엇이 발생하느냐면 갈라짐이다. 이 갈라짐 갈음은 심판의 의미이다. 거짓과 참을,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른다. 두 번째 의미는 거짓과 그른 것이 잘못되었다고 정죄하고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다. 그런데 예수가 오신 것은 사실은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구원받은 무리와 그 계시를 반대해서 그 구원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절하는 가름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의 가름이 나타난다. 세상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할 자로 스스로를 밝힌다.

어떻게? 예수의 메세지와 십자가에 대한 자기들의 반응으로 밝힌다. 자기들이 세상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함께 멸망해가는 자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자를 두고 여기서 심판을 이미 받았다고 말한다. 예수가 심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스스로를 심판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심판하러 오심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일부에게는 구원이 일어나고 일부에게서는 심판이 일어난다.



예수가 빛의 세상에 왔다. 빛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 빛을 정죄하고 빛을 거짓이고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자들은 그 거부하는 행위로 내가 빛과 관계 없는 자 자신이 암흑의 세계에 속한자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고 정죄이다. 이것이 19-21절 까지의 설명이다.




22-30절 까지는 예수와 요한의 세례가 비교되어 있는데 그것은 니고데모 유대교의 대표에게 예수가 무엇을 말했느냐? 유대교의 최고의 표현도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으로 자동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하늘에서 온자 하나님의 계시자 그가 주는 영으로 새롭게 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그것이 세례(물과 성령)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세례 성령을 전달하는 예수의 세례와 물세례만을 주는 요한의 세례가 대조된다. 요한의 세례는 유대교의 최고의 가능성 니고데모와 비슷한 것이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이다.



31-36절
앞의 3:1-21절 까지의 내용들이 다시 한 번 요약되어 나타난다. 3장의 이야기는 2장에 대한 해설이다. 2장에서의 두 가지 이야기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성전을 청결케함의 사건이다. 이 두 이야기는 표적이다. 이 두 개의 표적성을 해설한 것이 3장이다. 청결의 예의 물과 성전은 유대교이다. 이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표현인 니고데모도 포도주 떨어진 잔치와 같다. 더 이상 구원의 힘이 없다. 기쁨이 없다. 타락한 성전에서의 예배 등은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가 주신 성령 윗세상의 힘에 의해서 유대교도 가장 고상한 유대교의 대표도 새로 나야 한다. 포도주가 상징하는 기쁨 축복 새성전으로서의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예배가 이루어진다. 어떻게 예수가 이것을 가능케 하느냐? 하늘에서 온 자이기 때문에 하늘에 것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서 그를 통해서 이 세상의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 요한복음 4장도 마찬가지로 이것에 대한 해설이 계속된다. 3장은 가장 고상한 유대교  인간지성의 가장 고상함, 우리 인간 종교성의 가장 고상함 등으로 인간 가능성의 최대한 발휘로는 신적인 삶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할 수 없다. 낙관론과 휴머니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