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4장,신령과 진정으로

호리홀리 2015. 5. 6. 12:35

4장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이방인과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방인들 보다 더 나쁜 부류이다. 그중에서도 여인이다. 즉 정통 유대교의 대표자와 남편이 6명이나 있는 이방여인이 대조된다. 이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종교를 이방인들의 우상종교의 혼합종교로 보았다. 이방인들은 우상을 “주”로 “남편”으로 말한다. 우상을 남편으로 주로 섬기는 종교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계시한 율법에 따라 정통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겼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섞여서 더럽혀서 이방인들의 신들을 다 섬기는 창녀와 같은 존재들이다. 혼합종교이다. 사마리아교를 혼합종교로 보았다. 그런 구조로 종교의 대표자인 사마리아 여자를 들어서 설명한다.

이들에게도 예수는 구원자이다. 4장 42절에 사마리아인들의 입에서 “이는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는 신앙고백이 나온다. 그래서 예수가 온 세상의 구원자인 줄을 앎이니라.

어떻게 전개하느냐면 두 가지의 그림을 통해서이다. 하나는 야곱의 우물과 하나는 성전이다. 한 구절은 예수가 생수를 주시는 분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성령을 주시는 분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한 구절이다. 또 한 구절은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를 가능케 하는 분이다는 것이 한 구절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진리로 예배케 하시는 분이라는 주제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주제이다. 그래서 이 두 주제는 2장의 두 사건(표적)들과 연결 되고 3장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2-4장까지가 예수께서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9절 까지는 예수가 본론에 들어가기 위한 주변 정향을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한다. 예수의 선교활동 중에 있음직한 한 에피소드를 말하기 위해서 주변 정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10절에서 예수께서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마실 것을 달라고 한 자가 누구인줄 알았으면 너는 그에게 요구할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줄 것이라고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한다. 그런데 여자는 이 말을 못 알아 듣는다. “생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샘에서 솟아나서 흐르는 활수, 흐르는 물이다는 뜻이다. 생수라는 뜻이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는 “영생을 주는 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아래 세상에 사는 보이는 것 만족할 수 있는 것 물질의 세계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활수”로서의 의미 밖에 보지 못한다. 세상적인 의미로 가치판단을 하기 때문에 항상 예수가 의미하는 영의 세계 진리의 세계 높은 세상의 의미를 터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우물은 깊은데 당신이 어떻게 떠올 수 있느냐? 고 질문한다. 즉 오해가 일어난다. 게다가 이 여인은 12절에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샘을 우리에게 주었고 그도 이 샘으로 마시고 그 자손들도 이 샘으로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냐?고 한다. 즉 야곱과 비교하는 좋은 대화의 전환점이 생겼다. 야곱은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야곱의 우물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금까지 목을 축인 것은 사실이나 이 물은 마셔도 다시 마셔야 하는 물이다. 영생을 주는 물이 아니다. 이 물은 토라 율법을 상징한다. 토라 율법 모세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체로서 그 토라를 배우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구원을 힘입는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그 물이라는 것은 생명에 꼭 필요한 것이다. 물의 상징성 물은 빛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상징어로서 유대교에서는 토라가 물이다.




야곱의 물은 토라로 상징된다. 이것은 부족하다. 어떤 의미에서 부족하냐? 영원히 결핍이 없는 그런 삶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조금 도움을 주는 정도의 것이다. 반면에 예수가 주는 물은 그와 반대로 영생을 주는 물이다. 그래서 이 물을 마시면 목마름, 부족함, 결핍 등이 없다. 위에서 오는 생명의 물이다. 그러니까 이 말도 여인은 못알아 듣고 활수로서의 의미만 부여한다.




그러면 그 물을 달라고 예수께 부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가 제공하겠다는 그 물은 성령을 두고 말함을 가리키고 있다. 성령이 바라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하락하는 것임을 깨우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조를 발견한다. 토라와 예수의 계시가 대조되어 있다. 토라가 가져다 주는 축복(생명)과 성령이 가져다주는 축복(생명)이 대조되어 있다. 잠시적인 축복과 영원한 축복이 대조되어 있다. 야곱과 예수가 대조되어 있다. 요한복음 1:51절에 야곱과 예수가 대조되어 있다. 야곱이 옛 하나님의 자녀의 조상이었듯이 인자이신 예수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으로 대조된다. 야곱으로 시작된 옛 역사가 종결되어 지고 인자이신 예수를 통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요한복음 1장이 결론으로 끝나고 있다. 여기서 옛 야곱이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종교나 또는 마찬가지로 야곱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마리아 종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비록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겨우 마시면 다시 목마르는 잠깐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예수는 위에서 오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성령을 가져다 주는 분으로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가 야곱의 역사를 완성하면서 능가하고 대치하셔서 전혀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여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 여인은 계속해서 말귀를 못알아 듣는다. 그래서 16-18절 까지에는 이 여자의 불결한 삶을 지칭한다. 남편이 여섯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유대교 쪽에서 보았을 때 사마리아교를 이방우상들을 섬기는 혼합종교로 여러 남편을 섬기는 창녀와 같이 깍아 내리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가 여인에게 분명히 구원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다고 하며 이와 같이 여인이 남편이 여럿 있는 것과 같이 사마리아교가 우상을 섬기는 혼합종교 우상종교라고 은근히 나타냄으로 해서 유대교가 야곱라인의 정통임을 예수가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 전체의 증언과 같다.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는 것이고 유대인들이 그들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정통적으로 이루어 온 민족이고 유대교가 그 종교이다. 거기에 반해서 사마리아 종교는 자기들이 정통종교이고 모세율법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대교나 사마리아교나 서로 야곱라인의 정통 후계자이고 모세율법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을 하는데 둘 다 중요하지 않다. 이들의 라인은 어디에서 첨예하게 나타나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하느냐?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하느냐? 로 대표되는데 예수가 주장하는 것은 둘 다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도 그리심산에서의 예배도 이 세상에 속하는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제 예수에 의해서 완전히 능가하는 새로운 예배의 시대가 열림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대치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23-24절에 때가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진리에 속한 자들은 진정한 아버지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왜? 아버지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2장의 성전에서의 표적에 대한 주석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제사하는 행위를 방해하는 표적을 했다. 이 표적의 의미를 해석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혼합종교는 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 성전도 이 세상의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거기서 드려지는 짐승의 피로 드려지는 제사도 물질적인 것으로서 그런 시대는 이미 다 지났다. 예수가 새로운 성령의 영의 시대를 가져온다. 그때가 임할 것이다. “때가 임한다”는 말이 5장에서부터 자주 나온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재림을 통해서 이와 같이 완전한 하나님을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인데 이것이 종말론적인 미래인데 벌써 예수가 그 시대를 지금 벌써 시작했다. 미래와 현재성이 아주 강도 높은 긴장을 이루고 있는 문장이다. 예수가 물질적인 성전의 의미를 대치해서 진리와 영으로 하는 예배의 시대를 연다.



도대체 그런데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 우선 왜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느냐면 24절 처음에 하나님이 영이시다. 그렇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자들은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성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물질 시간의 세계를 초월한 이 세계와 다른 저 높은 영원의 세계의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하나님이 영원의 세계 영의 세계에 속하는 분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나서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자들은 변화와 죽음의 세계에 속하는 자들은 하늘의 영적인 세계에 속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는 이 새로운 거듭남 위로부터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적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3장을 전제하고 있다.




진리로 라는 말은 무엇이냐? 이데아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질의 세계, 육의 세계는 가짜의 세계인데 반해서. 그래서 여기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한다는 말은 예루살렘과 그리심산에서의 물질적인 세상에 속하는 예배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사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도 가능치가 않다. 예수가 가능케 한다. 예수가 진리를 계시하고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게 하셔서 이 세상에 있으나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하신다. 이런 거듭난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에 의해서 새로 된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은 예배의식의 드라마를 상당히 물질화 시키는데 반해서 개신교는 물질화시키는 것을 그치고 마음과 내면적인 예배로 이해를 했는데 그 말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영과 진리의 예배와 반대되는 것은 외형적인 예배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세상적인 예배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진리와 성령에 의해서 새로 난 자에 의한 예배이다. 새로 난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예배한다. 1:12절에 보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로고스에 의해서 새로 난 자가 자녀들인데 이를 연상케 하고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 즉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난자를 연상케 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내면적인 갱신 예배의 의미가 아니고 예수의 자신의 계시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자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이다.




27-42절 까지는 아주 극적인 전개의 수단으로 앞에서는 예수의 제자들과의 대화이고 뒤에서는 여자와 여자의 동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주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셔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힘 있게 하는 것이 자기의 음식 자기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여자와 동네 사람과의 대화의 주제는 예수의 메시야성 여자가 예수의 메세야 됨을 터득했는데 그것은 이 세상적인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다. 유대교에서 메시야가 오면 모든 것을 밝히리라고 했는데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만 메시야가 아니고 영생을 가져다주는 메시야임을 나타내고 있다.




2-42절의 큰 흐름을 보면 2장의 두 개의 표적은 3장 4장에서 이 표적들의 의미를 나타냈다. 물이라는 것으로 3장과 4장이 연결이 되어 있다. 또 예배를 예수가 가능케 한 분으로 성전청결의 표적을 주석한 것이다. 3장 4장에 동원된 인간은 대표적인 인간이다. 하나는 대표적인 고상한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하나는 이방신들을 많이 섬기는 사마리아인 여자 이방인과 다름없는 자다. 예수는 유대교도 사마리아교도 능가하고 대치해서 새로운 시대 새생명의 시대 영생의 시대 새로운 예배의 시대를 여는 분이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도 사마리아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에게도 계시이고 즉 구약과 유대교의 구원사를 완성해서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분이다. 영생, 새로운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