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5장,안식일의 주인

호리홀리 2015. 5. 7. 10:02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듯이 자기도 안식일에 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에 대한 증거가 무엇이냐? 신명기로 부터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해서는 증거가 성립이 될 수 없고 두 사람 이상이 증언을 해야 법정에서 증거가 성립이 된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만 증언하는 증거는 무효라는 랍비들의 법 해석에  예수는 그렇지 않다. 증언이 많다.

그래서 31절 부터 증언에 대해서 기록한다.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을 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이지만 동시에 종말론적인 사건을 말한다.

안식일의 본래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완성된 아름다운 창조 세계에 대한 salavation이 안식일의 의미다. 더 이상 할 일이 없고 그것을 즐기는 일만했다. 이것이 안식일의 원래의 의미였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세상의 왕이 되고 아담은 사단의 종이 되고 죄가 세상에 침투하였고, 죽음과 고난이 침투했고, 하나님의 저주가 들어와 세상이 망가졌다.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다운 창조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할 일이 생겼다. 구원할 일이 생겼다. 망가진 세상을 고칠 일이 생겼다. 이 구원이 완성될 때가 종말이다. 그 때 구원이 완성이 되어 더 이상 죽음 고난 저주 고장이 없는 완전한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 새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그때 진정한 의미로 안식이 있다.




안식일은 종말에 있을 새 창조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모세율법에서 4계명(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첫째 태초의 완전한 창조에 대한 기념이며, 둘째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과 더불어 있을 새 창조에 대한 소망과 기원에 대한 표시로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안식일에도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5:17절에서 일하신다. 구원의 역사를 계속해서 운행하신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 병고에 있는 어린아이와 38년 된 자를 고치심으로 무엇을 sign해 주는가? 하나님께서 이 고장 난 세계를 고치는 것을 나타내며 예수가 그 하나님의 권한 일을 대행하는 분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예수가 진정한 안식일을 있게 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지금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있다는 것은 진정한 안식이 없다. 진정한 안식이 곧 있어야 하겠다는 그 필요성을 극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를 고쳤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행위를 하셔서 종말에 고장이 없는 병고가 도무지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새 창조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아담이 사단을 왕으로 섬기고 사단에게 순종했기 때문에 죄가 들어오고 그 댓가로 죽음이 들어왔다. 병자 모든 고난은 죽음의 증상들이다. 죽음이라는 바이러스에 오염이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하러 왔다. 사단으로 통치 받는 죽음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오라는 선포이다.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오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을 치유라는 기적으로 설명을 해 준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해 진다는 말이다. 죽음과 고난으로 부터 해방된다는 말이다. 예수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 선포와 같다. 치유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주석이며 실제화이다. 하나님 나라를 실제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는 종말이다. 지금의 안식일은 제 4계명에 따라 쉬고 있는 날이다. 손마른자, 38년 된 병자가 있는 것은 진정한 안식이 없다. 안식이 하루빨리 있어야겠다. 바로 예수가 그러한 구원자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 영생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으로 안식일에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문제는 18절과 같이 새로운 issue를 등장시켰다.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자로 여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행자로 하나님의 안식이 있게 하는 대행자로 자기를 내세웠으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했다. 이것은 당시 유대 유일신 사상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대권을 침해하고 욕하는 것으로 사형감이다. 그래서 예수를 죽일려고 했다.




그래서 19절 부터는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토론이 된다. 안식일 사건을 다 잊어 버렸다. 19절 부터 예수가 대답해서 말했다. 독특한 어법이 나온다. 이때는 중요한 선언이 있다. 아들은 그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버지가 한 것을 본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왜? 그가 하는 것들을 똑같이 아들도 행한다.

20절에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해서 자기 스스로 하는 모든 것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것들 보다 더 큰 일을 보여 줄 것이다. 그래서 너희를 놀라게 할 것이다. 여기에 비유가 있다.

고대사회에서 가업이 전승되는 것을 예수가 비유로 들고 있는데 가령 천막 만드는 일이 가업이면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전승받은 그 특별한 기술을 그의 가업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에게만 고스란히 전수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 아들은 천막 만드는 일을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한다. 그리고 배운다. 이와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그림으로 비유로 삼아서 예수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자기가 하나님의 생명을 주고 심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아버지가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심판하는 일을 위임하고 자기는 그대로 행한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전제는 사랑의 관계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듯이 아들도 그가 원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준다. 또 아버지는 아무도 정죄하지 않는다. 그가 아들에게 모든 심판권을 넘겨주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듯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들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비유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다시 그림이 약간 변화된다. 사자 보냄을 받은 것으로 약간 변화된다.

sending formular.

여기에는 아들의 선재사상도 들어 있으나 아들이 아버지의 전권대사다. 보낸 자는 보냄을 받은 자와 같다. 전권을 대행한다. 예수가 아버지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생명을 주고 심판하는 일을 대행한다. 그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보낸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가 하나님으로 부터 위임받은 자기의 역활이 죽은 자를 살려 그에게 생명을 주는 일을 한다. 생명을 주는 일이 지금 현재 일어난다(24절부터)




24절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완료형).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를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임을 믿는 자, 이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그 믿음의 순간에 죽음으로 부터 생명으로 부활했고 지금 생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적인 생명, 위로부터의 종말론, 현재 실현된 종말론이다. 지금 벌써 예수의 계시를 받고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것을 이해하고 예수를 보내신 이를 믿으면 벌써 현재에 부활을 체험하고 영생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절에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살아날 것이다.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 28절도 마찬가지이다. 때가 임할 것인데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들을 것이고 선한 일을 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미래시제로 되어 있다. 미래적인 종말론.




24-29절은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인 종말론의 표현이 짧은 문단에서 나란히 나온다. 이것은 신약신학 전체에 서 있는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인 종말론 사이의 긴장. 구원은 미래적 선물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벌써 그 종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영생을 벌써 여기서 맛보기 시작했다. 바울의 용어를 빌리면 첫열매이다. 완전한 수확은 못 받았으나 벌써 종말의 복을 누린다. 그러나 아직 다 이루어지지 못했다. 첫열매를 보증하는 것이 성령이다. 동시에 이 첫 열매는 보증금 노릇을 한다.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종말의 축복 구원을 맛보기 시작했으나 때가 되면 완전한 구원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울적인 설명이다.




요한복음5장24-29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서는 똑같은 신약의 종말론적인 현상을 요한복음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요한복음 5장 24-30절까지는 지금 현재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구원의 축복은 죽은 자들이 지금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과 종말에 있을 완성된 구원과는 어떻게 차이가 있느냐?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신학을 얻게 된다. 우리는 보통 죽음을 무덤에 가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잘 이해를 못한다. 성경적인 언어들을 잘 이해를 못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고 죄인이 죽었다. 이렇게 말한다면 죽은 것은 무덤에 간다는 말인데 죄인이 죽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래서 지어낸 자들이 육신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라고 설명을 한다. 이것은 좋은 설명이 아니다.

나무가 생명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가 뽑히면 나무는 산거냐? 죽은거냐? 살았고 죽었다. 이 나무에 간직이 되어있는 수분 양분이 지탱한 만큼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무는 죽음 병에 걸린 상태 죽음이 이미 시작된 나무이다. 우리 삶의 근원인 종교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뽑혀서 더 이상 수분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곧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 뽑히는 순간부터 이 나무는 죽음아래 있다. 죽음 병에 걸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나무는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아래 죽음의 권세아래 있다. 죽었다고 할 수 있다. 나무속에서 역사하는 죽음은 증상들로 나타난다. 잎이 마르고 가지가 마르고 한다. 이것이 죽음의 증상들이다. 나무가 완전히 말라비틀어지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뿌리가 뽑힐 때의 죽음의 시작의 확인이다. 이것이 좋은 그림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자기주장하려고 스스로를 닫아 버리면 우리의 존재의 근원인 창조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버리고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원을 축복받아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 지혜 사랑 능력과 영혼에 힘입어 살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스스로 하나님께로 분리해 버리면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피조물적인 제한에 갇힌다. 그래서 자기자원 조그마한 생명 지혜 사랑이 있는 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리되어 더 이상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아래 있는 것이다. 죽음 병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감기 들면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우리 모두 고난들이 관계 속에서 오는 고난 병고 결핍에서 오는 고난 가난 지혜 없음은 결핍에서 온다. 그것은 무한한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을 알도록 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로고스이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한다. “안다”는 말은 연합한다.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부부가 서로 안다는 의미이다. union 연합하면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와 연합하면 창조주의 무한함 부요함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생명이고 영생이다. 그것이 벌써 일어난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는 자는 연합하여 생명력을 공급받는다. 24절의 죽은 자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죄인들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여 믿게 될 때 연합할 때 생명력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는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무덤에 묻힌 자들이 이 세상의 끝에 예수의 재림 때에 무덤에 묻힌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고 완성된 생명에 이르게 된다. 지금 현재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체험을 하게 되지만 동시에 우리가 객관적인 종말론의 속박된 자들로서 다 죽게 되어 있다. 무덤에 가게 되어 있다. 무덤에 가는 자들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한 자들과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하나는 그렇지 않은 자들의 두 종류가 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부활생명을 맛본 자들도 무덤에 가게 되어 있다. 이 세대가 객관적인 종말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되어 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심판의 부활 생명의 부활이 있을 때까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나 다 죽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의 장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은 생명의 부활로 일어난다. 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선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체험하는 부활이 그 때 확인이 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한 심판이 그때 확인이 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태도로서 발생되는 갈림이 재 확인 된다.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 그때는 더 이상 무덤에 가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의 다른 점이다. 또 하나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러면 실제적으로 죽음 객관적인 종말전의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의 장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령 바울의 설명을 빌리면 고후 5장 빌 1장 같은데 보면 그것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종말의 생명 영생보다는 좀 더 농도가 짙은 좀 더 축복된 것이다는 말이다. 그 상태가 어떤 상태냐? 그 이상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지금 여기서 누리는 영생보다 더 좋은 것 축복된 것이다. 바울은 빌 1장에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무엇이라 하느냐? 자기가 딜렘마에 빠져있다. 자기가 돌보는 교회를 생각해 보면 고난의 삶이지만 이 세상에 오래 살아서 일해야 하겠는데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죽는 것이다. 왜? 그것이 주께로 좀 더 가까이 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선택의 선호는 죽어서 주께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나 교회를 위해서 더 살아야겠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로서 무덤에 가는 자는 지금 여기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부요함 생명력 축복 구원 보다 더 체험하는 것이다. 종말의 부활의 상태는 아니더라도 지금 누리는 새 생명보다 더 복된 생명의 상태를 갖게 된다.

그 다음에 31절 부터는 예수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앞에서 안식을 주는 자고 아버지의 전권대사라고 증거했다. 유대법에 의하면 자기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증거하면 법정에서 아무 효과가 없다. 신명기에 보면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효과가 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혼자 자기에 대해서 증거하였다. 그래서 31절부터 중요한 증언이 있다.




32절에 “나를 위해서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요한이 증거했다. 그 증인이 진실하다. 그 증언은 참되나 사람들이 믿지를 안했다. (33절) 그러나 예수는 사람의 증거를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34절) 사람의 증거보다도 훨씬 확고한 증거가 있다. 세례요한의 증거도 훌륭하지만 하나님이 증거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증거하시나? 예수의 일들 예수가 행한 일들 그것은 여기 context에서 무엇이냐? 38년 된 병자를 고침 등등 이 일들은 다 생명을 주는 일들이었다. 이 일들이 볼 줄 아는 이들에게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일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예수의 증거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예수가 자기의 아들로서 자기의 권세를 가지고 자기의 뜻을 행하는 자라고 증거한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그것을 못 알아 듣느냐?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38절) 그래서 못 깨닫는다. 이것이 이상한 말이 아니냐? 구약의 모세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구약성경-모세율법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한 선지자들의 말 즉 하나님의 말씀이지요-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열심이 찾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갖지 않고 있다는 말씀이 무슨 소리냐? 거기에 너희들이 열심이 생명을 찾지만 그 속에서 영생이 있는 줄을 알고 열심이 찾지만 그 성경들이 바로 예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을 터득하지 못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바로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을 터득하지 못한다. 1장 후반부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모세와 선지자들이 성경에 쓰신 이인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이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지만 그 성경의 증언들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들이다.




왜 성경의 증언들을 받지 않느냐? 41절 이하에 첫째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느냐?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산다. 하나님으로 부터 힘입어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지 않고 자기의 능력 지혜 꾀대로 살아서 자기의 이름을 낼려고 한다. 자만하고 자신하고 산다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성경에서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가 한 일들로 예수에 대해 증거하고 그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는데 예수를 증거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그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두 가지 형태로 증거한다. 예수가 한 일들의 형태로 또 성경으로 증거한다.

요한이 한 증거도 진실하고 중요하나 거기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언에 의존하는데 이 예수에게 시비를 걸어 논 유대인들이야 말로 이런 것을 하나도 못 깨닫는다. 왜? 그들의 인식론적인 실패,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계시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터득하지 못하고 예수가 행한 생명을 주는 일을 즉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시는 일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생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분이시며 천지를 세상을 구원하셔서 진정한 종말의 안식이 있게 하는 분이시다는 그 표적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도덕적인 실패에 있다. 즉 자기 자신의 영광을 취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리 증거를 하고 하나님이 아무리 말을 해도 꽉꽉 막혀 한마디도 못 알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