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7~8장,빛과 생명

호리홀리 2015. 5. 7. 10:15

7, 8장, 예수가 빛과 생명이라는 주제, 소수는 계시를 터득하나 다수는 받아들이지 못함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구조를 잠깐 보자. 7:1-10절은 서론에 관한 것으로서 예수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느냐? 마느냐? 그러다가 형제들과는 다르게 비밀리에 초막절에 올라가는 상황이다. 그래서 초막절에 지금부터 기술하는 사건들에 나타난 setting이 기술되어 있다.


11-13절은 예수가 아직 당도하지 않은 상황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초막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웅집한 군중들 가운데서 예수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메시야냐? 선지자냐? 하고 웅성거리는 장면이다.



14-24절 까지는 예수가 나타나서 첫 토론이 벌어진다.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심으로 유대인들 가운데서 이 사람은 정규 랍비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가르칠 수 있느냐? 예수가 자기의 가르침은 랍비식의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또 자기의 제자에게 전달하는 식의 그런 가르침이 아니고 직접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계시임을 밝힌다. 곧 자기의 가르침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이다.


25-36절은 두 번째 토론, 대화이다. 예수의 메시야적인 주장이 논쟁의 초점이다. 예루살렘 사람들과 군중들, 바리새인들 유대인들과 더불어 예수의 메시야적인 논쟁의 초점. 이들의 생각에 의하면 예수가 메시야 그리스도일 수 없다. 27절에 그리스도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온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잘 안다. 여기에 요한복음적인 역설이 있다. 예수는 사실은 하나님으로 부터 위의 세상으로 부터 오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사실 충족시키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잘 안다고 그런다. 여기에 요한복음적인 역설이 있다.


37-44절은 제 3의 대화이다. 37절에 예수의 중요한 선언으로 시작이 된다. 초막절의 마지막 큰 잔치날에 성전에 올라가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도록 해라. 그리고 마시도록 해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말씀한 바와 같이 그 배에서 강물이 흐르고 생수의 강물이 흐른다. 이렇게 아주 신탁 같은 선언을 한다. 이 말이 제 3대화의 빌미가 되어서 토론이 벌어졌다. 아까 제 2대화에 이어서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메시야는 삼하 7:12절 이하의 나단의 전승에 의거할 것 같으면 다윗의 아들로 와야할 것인데 이 자는 다윗의 아들도 아니고 다윗의 동네에 베들레헴에서도 난자도 아니고 갈릴리에서 난 자인데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고 그의 메시야 됨에 대해서 부정적인 판단을 한다. 여기서도 역설이 숨어 있다. 유대인들은 사실 예수가 다윗의 아들로 베들레헴 출생인 것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은 안다고 본다. 예수가 갈릴리 출생이고 보잘 것 없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45-52절은 제 4의 대화로서 같은 주제가 계속된다. 예수의 메시야 됨을 거부하고 예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니고데모가 주의를 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예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니고데모도 더불어 욕하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 거기에서의 그 예수의 적대자들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되어 있다. 곧 유대인들의 관원들이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두고 하는 소리이다. 그 곳에서 피하는 장면이다.




요7장53-8:11절은 원래 context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7장 52절에서 8장 12절로 연결되어야 하는 상당한 오래된 전승이긴 하지만 원래 요한복음의 이 맥락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괄호로 제쳐놓고 12절부터 계속해서 보면




요8장12-20절은 제 5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 5번째의 대화도 아까 세 번째 대화 7:3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중요한 선언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 7:37절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으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그런데 8:12절은 내가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졌다. 이와 같은 중요한 선언으로 시작이 된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9장에 가서 설명이 될 것이다. 9장에서 자세히 해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8장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의 서론격으로서 예수가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증거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자기가 자기에게 대해서 증거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5장)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자기주장을 거부한다. 예수가 여기서 답변하기는 사실은 자기의 증거는 자기 혼자의 증거가 아니다. 자기는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을 믿는 분이고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증거는 사실은 하나님의 증거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기의 증거는 받아들일 수 있는 확실한 증거이다. 예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기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그를 말할 수 있다. 증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와 연합해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의 증거는 아버지가 증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증거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다음에 21-30절 까지는 여섯 번째의 대화로서 유대인들이 짤막짤막하게 대꾸하고 거기에 대해서 예수가 설명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 부분은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가 이 세상 밑의 세상으로 부터 난 자가 아니고 위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온 분임을 강조한다. 이 부분에서 예수는 자기가 자기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그 돌아감이 그 영광 받음인데 아무도 그 곳에 오지 못한다고 말한다. 예수가 자기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것이 유대인들에게서는 전혀 이해되지 못하기 때문에 전혀 동문서답적인 대화가 오고가고 있다. 예수는 아버지가 가르치신 것을 행하는 아들이고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서 행한다. 그래서 예수가 말하는 것 예수가 행하는 것을 듣고 보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자로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 “에고 에이미--- '내가 ---- 이다‘”를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24절 28절에 만약 너희들이 에고 에이미 인 것을 믿지 않으면(우리말 번역에는 내가 그인 줄 믿지 않으면으로 되어 있다. ’그‘라는 보어는 원래 없던 것이다. ) 너희들은 너희들의 죄 가운데 죽는다. 또 28절에 너희들이 그 사람의 아들을 높일 때에 들을 때에 너희들이 에고 에이미인 줄을 알 것이다. (우리말에는 그때 너희가 내가 그인 줄 알리라). 에고 에이미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 됨,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밝히고 있다.




요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마지막으로 31-59절까지가 일곱 번째 대화로서 앞의 주제가 계속된다. 덧붙여진 것은 유대인들이 왜 예수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예수를 인식하지 못하느냐? 그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사단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거부하는 그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사단의 자식 살인자의 자식임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래서 지금 예수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것은 살인자,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오는 그런 의미에서 살인자 사단의 자식임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예수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들은 죄와 죽음의 원형인 마귀의 자식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가 가져온 계시를 받아들일 수 없다. 때문에 그들이 예수가 행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깨닫지 못하고 적대한다. 




7장과 8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주장, 예수의 메시야 됨,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음에 대한 반대 이유들, 왜 반대하는가를 나열해 놓았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답을 해 놓았다. 그래서 7장 8장은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반영하고 있느냐 하면 유대교가 교회의 예수에 대한 주장 전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들과 그 이유들을 조목조목 나열해 놓고 그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이다.

7장 8장은 예수의 위기이다. (7:1, 13, 19, 25, 30, 32, 44, 8:37, 40, 59 등등)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적대하고 체포하고 죽이려고 한다. 상당히 극적으로 되어 있는데 두 무대를 번갈아 가면서 일어난다. 앞의 무대에서는 초막절의 행사에 참가한 군중들과 토론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뒷 무대에서는 유대의 관원들이 예수를 체포해서 없애려고 음모하는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요 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 7: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요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 7: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요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7: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요 7: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요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요 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그런데 위기가 어디서 오느냐면 7:31절 8장 31절에 온다.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만일 너희가 나의 말에 거하면 나의 제자가 된다. 너희들이 진리를 알 것인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제 이것이 드디어 예수가 군중들과 더불어 적대되게 논쟁을 유발하는 것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관원들이 예수를 죽일려고 한다. 체포하려 한다. 7:31절도 8:31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이제 오시면 이보다 더 많은 표적을 하겠느냐 하는 토론이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을 자극했다. 이러다가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겠구나. 그래서 예수를 적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요 7: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런데 실제로 turning point는 7:37절에 있는 예수의 주장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이 말과 8: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초막절과 관련이 되어 있다. 초막절은 출애굽 당시 시내에서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심,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고 토라 율법을 계시하시고 물과 떡으로 생명을 보존해주심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그래서 초막절에 물 긷는 행사가 벌어졌다. 실로암 못에서 성전으로 물 긷는 ceremony가 있었다. 시내광야에서 헤맬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공급해서 그들의 생명을 지탱하고 생명을 소생하게 한 것을 기념하는 그래서 지금도 비오는 하나님께 비를 기원하는 기원을 덧 붙혀서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로 스가랴서나 에스겔서나 이사야서 등에 나오는 종말에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리라는 예언과 더불어서 종말에 구원을 상징하는 물을 비는 행사가 있었다. 가령 스가랴서 13장에 보면 종말에 예루살렘으로 부터 생수가 넘쳐흐르고 여호와가 온 세상의 주로 군림하게 되고 그러면 온 민족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시온으로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순례 와서 여호와를 예배하게 되어서 종말에 샬롬이 이루어진다. 스가랴서 13장이 전통적으로 초막절에 읽도록 정해진 성경 본문이었다. 그런데 랍비들은 스가랴 13장을 겔 47:1절 이하 사12:3절 이하 등과 더불어서 해석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 메시야 시대가 초막절과 더불어 올 것으로 보고 그때에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하는 물이라는 상징어를 써서 그때에 이루어질 메시야 시대의 축복 또는 구원을 그렸다. 그런 것을 배경으로 했다.




슥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또 하나는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한 것을 기념하고 또 하나님께서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것을 기념해서 초막절에는 성전에 여인들의 마당에 불을 밝히는 행사를 했다. 곧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기념하는 불을 밝히는 행사를 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이 물도 출애굽 당시의 광야에서의 물 마심을 종말에 그와 같은 축복 물마심이 이루어진다. 이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현재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셔서 동시에 초막절과 더불어 일어날 메시야 시대의 축복을 기대하는 행사였다.




마찬가지로 이 빛도 초막절의 행사인데 여인의 마루에서 밝히는 제등행렬, 촛불을 밝힘도 광야에서의 계시 하나님의 임재함, 하나님의 토라의 계시의 빛을 밝힘을 기념하는 한편 동시에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드러나서 그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할 것을 기대하셨다. 종말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구원사에 첫 구원의 사건인 출애굽의 후형으로서 그것의 완성을 두고 말한다. 초막절이 이와 같은 첫구원을 기념하며 종말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그 곳에서 예수가 바로 자기가 초막절을 진정으로 완성하는 분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자기가 초막절이 기념하며 기대하는 종말에 있을 생명의 물을 가져오는 자이다. 물은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고 생명을 주는 것이다. 또 초막절이 기대했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빛을 가져오는 분이다.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온다. 이것은 빛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져오는 자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하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과 연합함이 생명이다.  요한복음 서문에서도 빛은 세상의 생명이다고 했다. 로고스가 빛인데 빛이 세상에 생명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런 과정 중에 이제 예수의 정체는 예수가 어떤 분이냐? 예수가 생명을 주는 분이고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는 분이라고 하는데 그 예수가 어떤 분인가? 그가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시비가 계속된다. 요한복음의 기본주장은 예수가 유대교가 기대했던 모든 메시야 사상을  다 충족한다. 7장 8장에 있는 것만 보아도. ① 메시야가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 메시야의 기원은 알 수 없다. ② 메시야는 다윗의 아들로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한다. ③ 이적들을 많이 행해야 한다. ④ 유대인들이 예수의 메시야 됨을 왜 반대해요? 메시야는 율법의 예언을 성취하는 자여야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가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을 해서 예수의 메시야 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한은 첫째로는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들을 어긋나기 때문에 예수를 반대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예수가 그 메시야 사상을 다 충족한다. 둘째로는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은 세상적인 아주 피상적인 사상들이다. 예수는 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실제로 능가하는 분임을 하나님과 하나님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으로서 메시야이다.




세상적인 판단기준에 의거해서 예수의 메시야 됨을 거부한다. 그러나 사실은 거기에 역설이 있다. 그들의 메시야 사상은 예수는 하나하나 충족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만 충족하는 메시야는 별것이 아니다. 예수는 충족하면서 그 보다 더 훨씬 능가하는 신적인 존재로서 메시야이다. 그는 선재한다. 세상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아브라함보다 선재하는 분이다. 구원사에서 아브라함보다 뒤에 왔으나 아브라함보다 선재하는 분이다. 또 로고스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동문서답 식으로 너 아직 50살도 못된 녀석이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냐? 전혀 깨닫지 못한다. 예수는 선재하는 신적인 존재이다. 메시야라는 말이다. 또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가지고 있다. 에고 에이미 이것은 출 3장과 연결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것이 직역된 말이 에고 에이미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신 분이셔서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다. 근본 계시의 첫 원칙은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한다.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이 초막절 행사 때 물을 긷는 것과 불을 밝히는 행사에 빗대어서 자기가 하나님을 계시하고 생명을 가져오는 메시야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여기 자세한 요점에 들어가서 8장 24절 “너희가 에고 에이미인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의 죄 가운데 죽을 것이다.” 8장 28절 “너희들이 그를 높일 때 그때 에고 에이미인 것을 알 것이다.” 에 대해 자세히 토론해보면 8:28절 “그 사람의 아들을 높인다” 들어 올릴 때에 에고 에이미인 것을 안다. “그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림을 받는다. “들어 올린다”는 말은 이중의미가 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나무에 들어 올려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말한다.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동시에 ‘높인다’는 의미가 있다. 영화롭게 함의 의미가 있다. 그때 너희가 에고 에이미인 것을 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관찰할 것은 공관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특히 마가복음에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여러 번 예고한다. (막8:31, 9:9, 12, 31, 10:33, 45, 14:19-, 등등) 죽음을 예고할 때 주어가 인자이다. 그 사람의 아들이다. 요한복음에서의 사람의 아들의 말씀들은 얼핏 보기에 공관복음과 다르다. 적어도 요점에 있어서는 묘하게 일치한다. 누가? 예수가. 어떤 자격으로 죽느냐? 올림을 받느냐? 하면 그 사람의 아들의 자격으로 올림을 받는다. 그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에고 에이미인 것을 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안다.




요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8: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어떻게 아느냐?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내어주심이다. 기령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셨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힘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계시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는 예수는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이심이 계시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본 것이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이야기 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하는 예수는 누구냐? 하나님이다. 에고 에이미이다. 그래서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면 에고 에이미임을 안다. 예수가 하나님임을 안다. 그렇게 되면 그의 들어 올림은 예수의 하나님 됨이 드러난다.




이것은 상호 영광스러움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예수의 고별사에서 나오는 말이다. 자기 죽음을 앞두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상호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서 인류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한다. 그것을 통해서 무엇이 드러나요? 하나님의 사랑이심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요. 이것이 영광이다. 그래서 아들의 십자가에 죽음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본질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 사건은 동시에 아들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자로. 아버지를 계시하는 자로. 그러기 때문에 아버지와 같은 자로. 결국 아들이 영광스럽게 된다. 그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에 죽음인데 아들의 하나님 됨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이런 것을 다 깔고 있다.




그러면 누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느냐? 믿는 자가 깨닫는다. 믿는 자가 깨닫고 그 사람의 아들이 단 7:13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의 내포적 대표이다. 지난번에 요한복음 1:51절과 더불어 이런 사상을 좀 토론했다. 요1:51절은 두 전통 창28:12과 단7장을 반영한다. 창28:12절은 하나님의 어좌에 야곱이 앉아 있다. 지상에 야곱이 잠자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거룩한 야곱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금지되어 있는 천사들이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지상에서 잠자고 있는 야곱에게 내려가서 야곱을 봄으로 야곱의 원형인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야곱의 형상 원형을 볼려고 해서 오르락 내리락 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이 지상에서는 야곱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서 이스라엘의 후손의 대표이면서 내포적인 대표로서 어좌에 앉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지상에서는 형에게 �기는 야곱과 같은 신세이지만 곧 이방민족들에게 짓밟히는 신세이지만 실제 그들의 숙명은 하나님의 어좌에 높임 받는 것이다. 그것이 단 7장의 내용이다. 핍박받던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9절-끝 절)




다니엘7장9-14

단 7:9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11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 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 바 되었으며 12 그 남은 모든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았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래서 여기서 공관복음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메시야 노릇을 한다. 그것은 단 7장과 같은 구원의 노릇을 한다. 곧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참여케 한다. 하나님의 어좌에 높임 받게 한다. 그것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들어 올림을 받음을 통해서이다. 들어 올림은 백성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다. 그래서 백성들을 대표하고 대신하는 죽음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내포적 대표로서 백성들을 대신하는 죽는다. 예수에 의해서 내포적 대신해서 죽는 사람들은 죄가 속해진다. 그래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생명을 얻게 된다. 바로 그러한 대속의 죽음을 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숙명 즉 하나님과 화해하고 연합하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일을 하는 분이다. 이런 의미로서 그 사람의 아들의 자기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 에고 에이미임을 알 수 있다. 그 분이 하나님적인 존재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느냐면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내포적인 대표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연합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한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덧입을 수 있느냐? 그것을 믿는 사람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분이심을 믿는 사람들이다. 곧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그런 의미에서 들림 받은 그 사람의 아들임을 믿는 사람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 믿지 않은 사람은(24절) 그 죄가 속함이 안 되었다. 그래서 24절에 그 죄 속에서 죽는다. 죄 속에 계속남아 있다. 24절 28절은 아주 짧은 문장으로 이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7장 8장에서 또 하나 ,심판의 주제이다. 심판은 두 가지 의미로 일어난다. 하나는 3장 5장에서 실펴 본 식으로 곧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빛을 주시는 분으로 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그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생명의 세상에 빛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심판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에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말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인데 필연적으로 심판을 일으키는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예수의 빛과 생명에 스스로 합당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심판이 벌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8:15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예수가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 반응하는 자들이 불신앙으로 반응함으로 예수가 가져오는 계시와 생명에 합당치 못한 것으로 스스로 평가하고 그러냄으로서 심판을 드러낸다. 그 의미로 예수는 심판의 agent이다. 그 심판은 진실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심판은 ‘갈라진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빛으로 생명의 중보자로 이 세상에 왔는데 그 예수에 대한 태도가 사람들 가운데 항상 갈라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평가 반응을 해서 불신앙으로 예수의 빛과 생명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로 소수는 예수의 계시를 터득하고 믿는 자들로 구분이 일어난다. 구분이 예수를 믿는 자들이 서서히 줄어들어 가지고 요한복음 9장에 오면 예수 믿는 자들이 몇 사람이 안 된다. 나중에 요한복음 13장 1절 쯤에 가면 소수의 몇 사람으로 줄어든다. 요한복음 2장의 첫 표적을 보고 많이 믿었으나 예수가 그 믿음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 6장 마지막에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을 이해 못하고 대부분이 도망간다. 누구만 남았나? 제자들과(대표적으로 베드로와 같이 신앙고백하는 자들만) 몇 명이 남았다. 계속해서 갈라짐의 현상이 나타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이 점점 줄어든다. 나중에 13장 1절에 가면 자기 백성 몇 명만이 남는다. 십자가에 못박힐 때는 다 도망가고 여자들 몇 명만 남는다. 이런 갈라짐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두드러진 주제는 예수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떠난다’‘돌아간다’로 이야기 한다. 아랫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다시 남’은 ‘죽음’이다 . 그러나 위에서 오시는 예수는 그의 ‘떠남’은 곧 위에 세상 곧 그를 보내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감이다(7:33, 8:14, 21-24).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높임 받음이고 그의 아버지와의 연합된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의 영광 받음이다. 이렇게 해서 위에서 오시는 이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감으로 위의 세상과 아랫 세상을 연합시키고 아래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위의 세상으로의 전이 올라감의 길을 튼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의 생명 곧 위에 세상의 생명 영생을 얻게 한다. 이러한 주제들이 7장 8장 초막절을 계기로 한 예수와 유대교의 대표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설명이 되어 있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는 의미는 요 9장에서 구체적으로 해설이 될 것이다. 

'신약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10장 ,선한목자  (0) 2015.05.07
요한복음 9장 ,세상의 빛  (0) 2015.05.07
요한복음6장,영생의 떡  (0) 2015.05.07
요한복음5장,안식일의 주인  (0) 2015.05.07
요한복음4장,신령과 진정으로  (0) 2015.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