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9장 ,세상의 빛

호리홀리 2015. 5. 7. 12:07

요한복음 9장



요한복음 9장은 8장에 대한 해설이고 10장은 요9장에 대한 해설이다. 요 9장은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는 표적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서 표적을 행했다. 표적을 행한 것이 안식일이었다. 요 5장과 같이 안식일의 율법적인 의미에만 집착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서 예수와 시비를 하는 장면이다.




시비는 직접 예수와 하는 것이 아니라 병고침을 받은 자와 논쟁, 그 부모와의 논쟁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 논쟁을 통해서 예수께서 병든 아이의 눈을 띄어준 사건이 무엇을 표적하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이야기 되어 있다. 그것은 8장 12절에 의하면 ‘내가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에 대한 주석으로 그 내용이 주어져 있다. 요한복음 9장은 요8:12절의 주석이다. 하나의 실례이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발견하고 그의 제자들이 사람이 이렇게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죄와 병과의 관계. 우리는 육신적인 질병을 앓으면 죄와 관련이 되었다고 연결하고 질병을 죄에 대한 형벌로 곧장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성경전체를 통해서 질병과 죄는 연결이 되어 있다. 죄에 대한 징벌로 병을 받는다. 그래서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과 병고의 상태로부터 구원해 준다는 것이 동의어로 쓰일 때가 있다. 가령 시103편 3절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이것은 죄용서와 병 고침은 동의어로 한 가지 사건을 두 가지 표현으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103편은 예수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편이다. betz는 시103편을 예수의 18번이었다고 한다. 노래 자리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였다. 왜냐하면 시 103편의 가르침이 예수의 주기도문이 시 103편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예수의 많은 죄사함의 비유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시편 103편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따라서 시편 103편이 예수의 사상의 아주 중요한 배경이다. 여기에 보면 죄사함과 병고침이 동의어로 쓰고 있다.




마가복음 2:1-11절에 나오는 예수의 중풍병자 사건에서 병고치는 것을 죄용서로 표현하고 있다.  시편 103편에 근거한다. 죄용서하는 것이 곧 병고침이다. 병고침이 주는 것은 바로 죄를 용서해 준 것이다. 이렇게 죄와 병고는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고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 모든 병고는 계속해서 죄로부터 유발한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로부터 병고가 시작이 된다. <예화> 뿌리뽑힌 나무의 비유. 삶의 근원인 대지로 부터 분리됨으로 죽음의 증상이 나타난다.

 

모든 병고는 죄와 1:1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중요하다. 예를 들면 운전하는 사람들 중에 다른 사람의 실수로 사고날 때 내 죄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연대성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웃의 죄가 나에게 고난을 가져오기도 하고 이웃의 선이 나에게 유익을 가져오기도 한다. 나의 죄가 이웃에게 고난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나의 선함이 이웃에게 복을 가져오고 이렇게 되어 있다. 한 사람 히틀러가 잘못함으로 온 세계가 고난을 당하게 되었고 한 사람 전두환이 잘못해 가지고 온 민족이 고난을 받고 이렇게 된다. 한 사람 선한 사람이 잘하면 온 민족이 온 인류가 복을 갖게 된다.




더 나아가 온 피조물이 연대성 속에 있기 때문에 천재지변도 어느 정도 이와 관련시켜 생각할 수 있다. 모든 피조세계가 연대성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고난을 받고 피조물의 황폐함이 인간에게 고난을 주고 등등으로 피조물도 죄와 고난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면 스스로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불교용어로 내가 전생애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곧장 나온다. 꼭 나의 죄 때문에 내가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 주위에 어떤 사람이 고난을 받으면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고난을 받는가 하는데 그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고 혹시 내 죄 때문에 고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고난은 죄로부터 유발이 되나 1:1의 관계는 아니다.

이에 대해 예수는 그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자기가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다.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스스로 드러내도록 하기 위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 간에 처음에 논쟁이 붙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기 때문이다. 또 다fms 반응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눈을 띄우는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이 논쟁이 유대인들 간에 붙었다가 나중에 바리새인과 소경과 똑같은 논쟁이 벌어진다. 유대인들이 처음에 부모들에게 갔으나 진짜로 네가 치유함을 받았느냐? 받았다. 너는 이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소경은 17절에 선지자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눈을 띄어주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부모들에게 가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런데 여기서 배경을 이루는 것은 이사야 29:18-19절, 35:5-6절 같은 예언에 종말에 메시야가 와서 소경의 눈을 띄우고 절름발이의 병을 고치고 하는 예언들. 예수는 나사렛에서 처음 메시야로 취임설교에서도 사61:1-2절을 인용하면서 주로 설교를 했으나 거기에 바로 두 구절 사29:18-19, 35:5-6절을 덧붙여서 인용했다. 성경에서 안수 받는 자기가 전쟁포로를 석방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소경의 눈을 띄우고 절름발이의 병을 고치고 이런 일을 한다. 이런 일들이 바로 자기를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말하는데 이 인용이 사61:1-2과 56장에 있지만 여기에 소경의 눈을 띈다는 말은 없는 말인데 일부러 사29:18-19절과 35:5-6절을 가져와서 인용한다.




사 29:18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사 35: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또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오시기로 한 그 사람이요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오 하고 물었을 때 예수가 나사렛 회당에서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사 61장 등의 구절을 인용하고 자기가 그 당시 하고 있었던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에게 하는 일들을 지적하면서 지금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하라 한다. 거기에서도 사29:18-19절과 35:5-6절을 덧 붙여서 인용을 한다. 바로 눈을 띄우는 것을 인용한다. 지금 요한복음 9장에서의 토론의 배경도 이사야서와 같은 예언이다. 종말에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셔서 소경의 눈을 띄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유를 경험한 소경은 예수를 어떻게 고백을 하는가? 신앙고백이 발전한다. 17절에 그는 선지자이다. 그 다음에 33절에 보면 이 사람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지 않았으면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즉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이다. 그런데 그 앞에 부모와의 토론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느냐하면 22절에 부모들이 한 이야기를 보라.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부류를 볼 수 있다. 첫째로 소경이다. 둘째 부모. 세째 바리새인.

부모들도 예수가 하나님께로 부터 온 자임을 안다. 왜냐하면 눈을 띄웠으니까.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모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그리스도이다. 이 분은 분명히 하나님으로 부터 오신 자인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아까 이사야 19:18-19 35:5-6절에서 종말에 메시야가 하나님으로 부터 와서 절름발이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띄는데 그가 자기 아들인 소경의 눈을 띄웠다. 그러니까 그가 그리스도이다. 다만 그 부모는 그 신앙고백을 하기를 회피하는 자들이다. 공개적으로 하기를 회피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고 한 자들은 출교하기로 결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 부모는 유대공동체로 부터 �겨나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가 분명히 하나님으로 부터 온 선지자로 출교를 당했다. 당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종교적으로는 구원의 가능성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으로 부터 온 선지자 메시야로서 출교당하는 것이 구원의 가능성으로 부터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얻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엄청난 피해가 오느냐면 유대 공동체로 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완전히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팔레스타인도 그렇고 디아스포라 세계에서도 그렇다. 그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출교를 당하면 삶의 터전을 잃는다. 그래서 부모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자들이 있다. 구원은 체험하고 능력을 알고도 공개적으로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출교를 무릎 쓰고 신앙고백을 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가 찾아온다. 찾아와서 대화 가운데서 더 깊은 더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한다. 대화를 잠깐 보겠다. 35절부터 보면 예수가 나음 받은 소경이 �겨 났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인자를 믿느냐?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그를 보았고 내가 그 사람이다. 38절에 주여 내가 믿는다. 36절의 주여는 선생이여 정도이고 38절의 주여는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고 신앙고백의 대상이고 자기의 병을 고쳐준 분임을 알기 때문에 38절의 큐리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는 주이다.




절하였다. 무릎을 꿇었다. 예배했다. 예수가 스스로가 그 사람의 아들임을 그 사람에게 계시하자 소경은 그를 주로 부르고 주에 대한 마땅한 태도는 무릎을 꿇고 예배했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신앙이 점점 발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자기의 눈을 띄운 것으로 선지자 하나님으로 부터 온 그리스도라는 것 까지 고백을 한다. 결정적인 것은 그 사람의 아들임을 스스로 계시했을 때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게 예배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34절 까지는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그리스도 사상의 테두리에 그냥 머무는 것이다. 유대 묵시문학 랍비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종말에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오며 이 민족을 해방하고 모든 감옥에 갇힌 자들 포로들을 석방하고 병자를 고치고 등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메시야이다. 그런데 그 정도의 메시야가 아니다. 예수의 메시야성의 중심은 그의 대속의 죽음에 있다. 요한복음적으로 말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메시야 됨. 구약적으로 말하면 사 53장의 고난 받는 주의 종으로서의 메시야성. 그가 죽어서 죄인들의 죄를 씻고 죄인들을 하나님과 다시 연합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교의 메세야 사상에 머물러 가지고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 정도에서 신앙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풍성한 삶, 영생을 얻게 하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 담고 있는 말이다. 공관복음적인 언어로 하면 그 사람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분이다. 요한복음 언어로는 그 사람의 아들은 들림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 연합시키고 부요함에 참여케 한다. 신앙고백의 중심이다.

예수를 유대교의 메시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이것은 소경이 깨달은 것이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그 사람의 아들을 깨달았다. 육신적으로만 본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도 보게 되었다.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빛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의 빛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진리를 발견했다. 이 사람이 육신적인 눈을 띄은 것은 표적이다.



자 부모들은 자기 아들의 고침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분으로 간접적으로 체험을 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리스도임을 마음속으로 안다. 그러나 신앙고백하기를 피했다. 출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더 깊은 신앙의 단계로 들어가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예수가 죄인이라는 것을 제삼 제사 확인하려고 한 사람들이다. 무엇에 의해서 예수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려 하는가? 모세의 율법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계시인 모세의 율법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빛인 율법에 의거해서 판단한다. 자기들의 율법에 의해서 예수의 하신 일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이다. 즉 마음이 닫힌 사람들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눈을 감아버린 사람들이다. 예수의 계시를 보지 못했고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의 적대자가 되었다.




이 사람들을 예수가 무엇이라 하느냐? 39-41절에서 이들은 스스로 본다고 주장함으로 스스로 소경이 되었다. 볼 줄 모른다. 왜냐하면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 눈을 감아 버렸다. 왜 사람들이 예수의 계시에 대해서 못 알아듣느냐? 자기들이 빛이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소경이다. 세상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많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진리를 겸허하게 열려진 마음으로 추구하지 않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지식을 빛으로 삼아서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그 빛에 의해서 진정한 빛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아마 요 9장의 바리새인들의 이야기. 요 9장 전체의 이야기를 가장 웅변적으로 신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고전 1:18절 이하가 될 것이다.




고전 1:18절 이하에서의 바울과 요 9장과는 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다. 세상의 지혜 있다는 자들 헬라 철학자들, 선비 유대서기관 신학자등. 헬라철학자들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입장으로 신에 대해서나 진리에 대해서 다 안다고 주장한다. 세상을 다 안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의 계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 받아 들인다. 유대 신학자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모세 율법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다 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계시를 가지고 왔을 때 거부한다. 그 결과는 스스로 소경이 된다. 고전 1:18절 이하를 빌리면 이 소경은 미련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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