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1:19~끝,증언

호리홀리 2015. 5. 5. 21:44


19-28절은 첫째 날의 증언이다. 바리새인들로 부터 파견된(24) 제사장 레위인들이(19) 세례요한에게 와서 질문한다. “네가 그리스도냐?” 세례요한의 답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 그 다음 질문 “누구냐? 엘리야냐?” “나는 아니다. ” 그 다음 질문 “그 선지자냐” “아니다”고 답이 줄어든다. 질문들은 그리스도냐? 선지자냐? 엘리야냐? 이것들이 예수 당시 메시야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메시야 사상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 주된 메시야 사상은 나단의 신탁이었다. 나단의 신탁에 의거하여서 정치적 군사적인 메시야 사상이 민속 메시야 사상이었다. 대표단이 물은 이유는 세례요한이 종말론적인 회개운동을 하니까 메시야라고 주장하는가 보다하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까 엘리야냐고 물었다. 엘리야는 말라기 3:23절에 의하면 메시야 보다 먼저 와서 메시야를 소개할 자로 되어 있다. 마11:14, 17:12절에서는 예수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다. 말3:23절의 예언 대로 메시야인 자기를 소개하는 자로 이해를 하고 있다. 변화산에서 율법의 대표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가 예수의 메시야 됨을 준비한 분으로 같이 나타난다.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런데 왜 요한복음 여기서는 요한이 자기를 엘리야가 아니라고 하는가? 얼핏 보기에 모순이 하나 생겼다. 아마 마, 막에서는 예수가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기능을 성취한 것으로 엘리야라고 말한 것 같고 요한복음에서는 엘리야가 다시 살아나서 오는 것으로 믿는 유대 묵시문학적 엘리야가 아니라고 요한자신이 부인을 한 것 같다.




그 다음 “그 선지자냐” 그 선지자란 신명기 18:15절에 근거해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제 2의 출애굽을 구원을 이룰 것으로 믿었다. 이것을 종말의 선지자가 한다. 거기에 대해 요한이 부인한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네가 무엇이냐?” 하니까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해서 “광야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부르짖는 목소리다”고 한다. 이것은 로고스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로고스인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반해서 요한은 소리다. 그리고 예수는 빛인데 비해 요한은 등불이다고 대조를 이루고 있다. 26절에 “너희들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서 있다.”는 말도 당시 메시야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메시야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다는 사상이 있었다. 나중에 예수와 대적자들 가운데 이 사상으로 논쟁이 벌어진다. 우리는 메시야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너를 잘 안다. 즉 나사렛에서 난 요셉의 아들인 줄을 잘 안다고 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그런데 세상적인 것만 보는 사람들은 예수를 잘 안다고 하지만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 자격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는 예수는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 실제로는 예수가 메시야 사상을 충족시키는 사람이다. 이것을 요한복음적인 메시야 비밀이라고 한다. 첫날은 자기에 대한 부정으로 끝났다.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29-34절은 둘째 날의 증언들이다.

예수에 대한 증거는 두 가지이다. ①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② 성령이 그 위에 머무는 자이다. 즉 성령으로 안수 받고 기름부음 받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로 증거하고 있다.

① “하나님의 어린양”은 무슨 뜻이냐?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느냐? C. H. Dodd는 계시록의 양을 의미한다. 양은 죄악의 세계를 정복하고 그의 백성으로부터 모든 죄악을 제하는 양을 말한다. 아람 말로 “팔리아”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양이라는 뜻도 된다. 이사야 53장의 주의 종이 ‘팔리아’로서 양이라는 뜻도 된다. 예수가 주의 고난 받는 종이라는 뜻이다. 사 53장의 주의 종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사 53장의 주의 종, 고난 받는 주의 종,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대신적으로 고난 받는 주의 종을 하나님의 양이라고 그랬다. 70인경에는 ‘암노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르미’로 되어 있다. 예수가 주의 종으로서 자기 백성과 세상의 죄를 없앨 분으로 세례요한이 증거한 것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증거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만찬을 위해서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온 양들을 성전에서 잡아 음식으로 준비하는 그 순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힌다. 닛산 14일 날 못 박힌다. 이 날 유월절 만찬을 하고 typology를 완성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십자가의 못박힘을 그릴 때 유월절의 의미를 많이 부여한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새로운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나타낸다. 바로 예수가 유월절 양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월절 양은 제사의 의미가 없다. 잔치에서 먹기 위해서 잡았다고 하며 어떤 학자들은 이 해석을 반대한다. 그러나 고전 5장 7절에 보면 “그리스도 우리의 유월절 양이 제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유월절 양이 제사의 의미로 해석이 되었다. 이것은 원래 구약에서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다양한 제사들이 각기 다양한 뜻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 당시 제사의 의미가 섞여 버렸다. 그래서 원래 제사의 기능이 없던 유월절 양도 제사의 기능을 갖는 것으로 바울이 인식을 하게 된 것 같다. 이런 것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를 세상 죄를 져 없애 버리는 어린 양이 될 수 있겠다.




많은 학자들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다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세례요한이 예수를 유월절 양의 의미로, 주의 고난 받는 종의 역활을 감당하는 분으로 나타낸다. 예수의 구원의 사업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없애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곧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② 둘째 증거는 “성령이 그의 위에 머물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요한복음은 세례 주는 장면을 그리고 있지 않으나 32절에서 세례요한으로 부터 예수가 세례 받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그때에 메시야로서 성령으로 안수 받음, 성령으로 기름부음받 음을 전제하고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고 성령으로 전능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라는 말이다. 31절에 보면 “나도 그 분을 몰랐으나 그 분을 이스라엘에게 ······”




35-42절. 여기는 요한복음의 특징 중 하나인 이중의미가 가득 들어 있다. 그래서 가령 36절의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다시 증거함으로 두 제자가 예수를 따랐다. “따랐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뒤따르다는 말이고 근본 의미는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44절, 8:12절, 10:4, 27절, 12:26절, 21:19절 이하, 22절 등에서 따르다는 의미로 제자가 된다는 말로 자주 나타난다.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38절 따르는 것을 보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다. 이 말도 표면적인 의미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무엇을 기대하고 오느냐? 는 말이나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세계에 속하는 분입니까?”라는 고백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는 하늘에서 온 로고스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분이다. 예수의 거하시는 곳은 하늘의 영의 세계이다. 그런데 “어디에 거한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어휘중 하나이다.




39절. “와보라.”도 이중의 의미가 있다. 예수에게로 오는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 3:21, 5:40, 6:35, 37, 45, 7:37절 등에 믿음을 ‘예수에게 나아오는 행위’로 표현하고 있다. “본다.”는 말도 지식과 믿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와보라”도 문자적 표면적인 의미이나 예수께 믿음으로 나아와서 자기가 영원의 세계에서 온 구원자임을 와서 보라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에게로 와서 예수를 보고 예수를 깨닫고 그와 함께 영원의 세계, 하늘의 세계에 머무는 자이다. 이들은 결국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며 그를 믿게 될 것이다(2:31)




그때가 한 십시 쯤 되었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는 때를 한 날의 시작으로 보았다. 따라서 10시는 오후 4시쯤 된다. 주석가들은 10시가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어냐? 금요일 10시는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제자들이 예수와 더불어 안식에 참여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냐? 토론을 한다.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다.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의 첫 제자들이 된 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첫째가 안드레였다. 시몬의 형제 안드레였다. 안드레는 헬라이름이다. 위의 빌립도 헬라이름이다. 이것은 헬라어가 예루살렘의 유대인에게도 널리 쓰이는 언어이며 헬라이름을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하나의 제자도 이름을 밝히지 않으나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서 세베대의 아들 요한자신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요한의 증거를 듣고 와서 확신하고 예수를 믿게 되고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메시야를 발견했다.”고 증거한다. 증거를 받은 자는 시몬인데 예수가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준다. 게바는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공관복음 전승과 마찬가지인데 요한은 게바라는 베드로의 이름을 강조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사실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중요한 역활을 할 사람에게 역활을 상징하는 새로운 이름을 주는 일이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시몬에게 바위라는 이름을 준 것은 예수가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사에서 바위와 같은 역활을 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공관복음에서는 강조하며 다루나 요한복음에서는 그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 또 이튿날 예수가 갈릴리로 가려고 할 때에 빌립을 발견하고 예수가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였다. “따르라”는 문자적인 의미가 있는 동시에 내 제자가 되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빌립이 베드로 안드레와 동향 사람이었는데 빌립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또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쓰고 또 선지자들이 쓴 그 사람을 내가 발견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다는 말은 아마 신 18:15절에 나오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약속했는데 그 선지자가 종말에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룰 종말의 선지자로 그려졌다. 안드레는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증거했다. 또 “선지자들이 쓴 분이다”는 말은 선지자는 엘리야이다. 모세가 율법의 대표였다면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이다. 엘리야가 다시 살아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예비한다는 사상이 있었는데 이 빌립은 예수에 대해서 종말의 선지자라고도 하고 다시 올 엘리야라고도 증거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수의 제자 된 자들의 예수에 대한 증거는 세례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 한 것과 같다. 이 section은 예수의 메시야 됨에 대한 증언들의 section이다. 이것이 주된 제목이라고 하면 제자도에 대해서도 나타나 있다.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다. 제자는 예수께 와서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자임을 보고 알고 믿고 증거해야 한다. 제자도를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모본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와서 보고 믿고 함께 거하고 그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은 부제로 나타난다.




**** 나다나엘과의 대화 **** 

나사렛에서 무슨 메시야가 나겠느냐? 구약에는 나사렛에서 메시야나 선지자가 난다는 말이 없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나온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예수를 진짜로 아는 사람들은 예수가 구약의 메시야의 고향을 충족시키는 줄을 안다. 나다나엘 처럼 피상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모르나 진짜로 아는 사람들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실제로 나셨고 실제로는 하늘에서 오신 메시야인 줄을 안다. 이 대화에서 이런 것이 나타난다. 예수가 나다나엘을 보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 속에 꾀가 들어있지 않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다고 지칭한다. 이에 대해서 나다나엘이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하니까 예수가 대답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하셨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이 예수에 대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다”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말하면서 나다나엘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들이 볼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구약의 세 개의 중요한 구절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① 삼하 7:12-16절의 나단의 신탁이다. 나단의 신탁을 보면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서 신탁을 준다. 네 수가 다하면 네 씨(다윗의 씨)를 택해서 네 다음 왕위에 앉히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겠다. 그래서 너의 아들이 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위에 하나님 대신 합법적으로 통치하고 왕을 삼겠다. 그리고 너의 가문(집)을 세우겠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야웨의 집(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다윗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오르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대신에 그의 백성을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 그래서 가령 시2:7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의 등극시에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왕위에 오를 때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고 선언이 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백성위에 합법적으로 군림한다. 나단의 신탁은 다윗왕조를 건설하는 것이고 다윗의 자손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할 수 있는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방민족의 오랜 지배와 바벨론 포로의 과정에서 이것이 메시야적으로 메시야적인 예언으로 이해되었다. 종말에 다윗의 씨 다윗의 가지를 하나님께서 일으켜서 자기 아들로 선언하고 다윗의 왕좌에 앉힌다.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성군의 통치와 이방민족을 정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태평성대를 가져오리라는 메시야 사상의 중요한 뿌리가 여기서 나온다. 예수 당시 메시야적 칭호는 “다윗의 아들”“다윗의 가지”등이었다. 메시야 이름이 다윗이었다.




삼하7장12-16

삼하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다나엘과 예수와의 대화에서 나다나엘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을 예수가 다윗의 신탁을 성취할 메시야로서 다윗왕국을 재건할 사람이다. 즉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여기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은 정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택한 목적, 하나님의 구원사가 성취될 것을 믿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고 육신적으로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후손들이지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반대한 사람이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은 세상의 대표이다. 유대인들이 가령 요6장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서 제2의 모세로 예수를 정치적인 왕으로 만들려고 하자 예수가 도망을 갔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이스라엘 왕으로 사람들이 환영을 했다. 빌라도와의 토론에서 세상적인 왕이 아님을 예수가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아래 십자가에 못박힌다. 실제로 요한복음이 보여준 것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다. 이스라엘이 육신적인 유대인이 아니고 예수를 믿어 하늘에 속한 영적으로 새롭게 창조된 공동체가 이스라엘이다. 민족주의적인 개념, 물리적인 개념의 왕이 아니라 영적인 그들의 주로서 왕임을 보여주고 있다. 나다나엘이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분으로 예수를 고백한다. 이에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튼 것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한다. 완전한 계시를 약속한다.




② 하나님의 나타남에 대한 비젼을 본 것이다. 9절에 어좌들이(복수) 놓여있고 “옛적부터 계신 이”(하나님)이 어좌에 등극하고 책이 펴지고 심판을 베풀고 13절에 그리고 내가 보니 또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인자)”가 하나님 앞에 구름을 타고 나아와서 14절에 하나님으로 부터 왕권과 영광을 받는 것을 보았다. “왕권을 받았다”하는 말은 하나님 대신에 통치권을 받았다는 말이다. 구약의 언어를 빌리면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왕권을 부여받아 하나님 대신에 통치할 수 있는 분은 누구냐?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을 해야 한다. 실제로 다나엘이 본 것은 하나님이 등극하시고 그의 아들이 그 앞에 나와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받아 통치하신 것을 보았다. 그 아들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같이 생겼다. 사람의 아들이란 셈족오에서 사람이라는 뜻이다. 구름을 타고 하나님 같이 나타났지만 동시에 사람 같이 생겼다. 이것이 다니엘이 본 환상이다. 이 환상이 의미하는 것을 18···, 22···, 26···에서 천사가 설명을 해준다. 그 비젼의 뜻이 무엇이냐 하면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 그림에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으로 부터 왕권을 받는다는 의미를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다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여기는 개인이고 여기는 복수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 체현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단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서의 이 환상은 묵시 문학의 특성상 종말에 지상에서 실재가 될 하나님의 구원의 게획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게획이 이미 하늘에 짜여있다. 이 게획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나 묵시가들을 통해서 미리 내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하지 말고 타락한 세상에서 같이 타락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종말에 실재가 될 것을 바라며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히 거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다. 역사적인 현실은 바벨론, 알렉산드리아가 헬라군대와 로마군대 등에 짓밝힘을 당하고 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서 약속(언약)을 지킬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약속을 신실히 지켜 종말에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구원을 주시겠다는 계시이다.




③ 창세기 28장 12절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이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을 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잠을 잤다. 그때 꿈을 꾸었는데 사다리가 자기 몸에서 하늘 끝까지 놓여지고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벧엘이라고 야곱이 그 곳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이야기가 유대신학자들에게는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탈굼의 여러 판들이 일관되게 이 이야기를 확대시킨다. 또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에도 길게 서술이 되어 있다. 거기에 야곱이 그의 형을 속이고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을 갈 때 천사들이 동행해서 보호하고 있다. 벧엘에 이르러서 야곱이 잠이 드니까 천사들이 하늘에 올라가서 다른 천사들에게 빨리 내려와서 보아라. 그래서 자고 있는 야곱의 얼굴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자고 있는 야곱의 얼굴을 보았다. 왜 이럴 필요가 있느냐? 하늘의 궁전 하나님의 어좌에 야곱이 앉아 있다. 천사들이 야곱을 보기를 원했으나 보지 못했다. 지상에 잠자고 있는 야곱은 천상의 야곱의 모형이다. 그래서 야곱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저녁 내내 오르락 내리락했다. 이 이야기는 황당무개한 이야기 같으나 어떤 신학적인 진리를 표현하려고 하느냐?를 물어야 한다.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내포적인 대표이다. 야곱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이다. 야곱 이스라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숙명은 하나님의 어좌에 높힘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자기 형에게 쫓기는 신세로 방황하고 있다. 로마 사람, 바벨론 사람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이방민족으로 부터 짓밟히고 살지만 종말에 하나님의 어좌에 높힘 받아서 그와 교제하고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 영생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의 숙명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신앙을 북 돋우려고 하고 있다.




예수가 중요한 유대신학적인 용어와 이 신학적인 용어를 확장해서 말하고 있다. 더 이상 야곱 이스라엘이 아니라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했다. 예수도 자신이 인자여서 옛 하나님 백성의 조상이며 옛 하나님의 내포적 대표인 야곱과 대치해서 자기에게 소속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늘에 속하게 하는 자인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인자에게, 속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나다나엘처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진짜 이스라엘이다. 진짜 이스라엘은 그 속에 간사한 것이나 꾀가 없다. 옛 이스라엘 백성은 그 속에 야곱의 잔꾀 간사함이 들어 있다. 진짜 이스라엘 됨은 나다나엘과 같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신앙고백함으로서 나타낼 것이다. 이들을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51절 말씀은 창세기 28:12절 말씀을 해석한 것을 이어 받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예수가 인자로 대치함으로서 다니엘에게 계시된 단 7장의 구원의 약속을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어좌에 높힘을 받는다고 예언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 지상에 사는 인간들이 예수 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세상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것을 영생이라고 한다. 이 구원을 나다나엘에게 약속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1: 51절은 서론의 결론이다. 서론을 전체적으로 결론지으면서 요한복음의 본론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창28:12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