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1:15~18,요한의 증거

호리홀리 2015. 5. 5. 21:37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5절. 8절에서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요한의 증거이다. “증거한다”는 말이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말이다. 계시가 sign으로 오기 때문에 믿음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증거가 중요하다. 세례요한이 첫 증거자로 나타난다. “그가 내 뒤에 오시는 자이다. ”시간적으로 뒤에 오는 자이다. “나보다 앞선 자이다. ”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6절. 14절과 연결시켜 읽을 때 이해가 된다. “우리가 그의 충만함으로부터 은혜위에 은혜를 받았다.” “그의 충만함으로부터”라는 말은 신성의 충만함을 말한다. “은혜위에 은혜러라”는 말은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Χαριν αντι Χαριτος”를 일반적으로 번역을 하면 “은혜에 대항하는 은혜”로서 반대적인 의미가 나타난다. 또 하나는 “은혜위에 또 은혜”로 번역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은혜에 상응하는 또 은혜”로 번역이 될 수 있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 17절을 일고 16절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17절은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의 표현으로서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곧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율법을 주신 행위가 은혜이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 그리고 아무 접속사가 없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다고 이어서 쓰고 있다. 이것이 17절이다. 17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대조를 이루느냐? 연속성을 말하느냐? 모세의 율법도 은혜의 표시이고 사랑의 표시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냐? 루터파 신학은 복음과 율법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칼빈주의자는 복음과 율법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곧 복음이 율법의 성취임을 강조한다. 복음과 율법의 신학은 바울신학에서 주로 바울의 가르침을 토대로 논의된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16, 17, 18절에서 바울신학의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여기에 도입해야 하느냐는 것이 첫째문제이다. 루터파 신학의 입장은 은혜대신 은혜라고 해야한다. 기껏해야 그렇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구약의 율법을 주신 것도 은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더한 은혜이다고 이해한다.




18절. “누구도, 어디에서나,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만 그 분을 나타냈다. ” 여기의 한마디 한마디가 재미있는 말이다. “아무도 어디서나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 많은 학자들이 구약성경에서 모세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으로 다 파악할 수 있는 존재이면 하나님은 인간보다 작은 존재, 이성보다 작은 존재이다.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보이지 않아야, 초월하셔야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느냐? 보이기로 스스로 결정했을 때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스스로 결정했을 때이다. 구약과 유대교의 구원사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계시자인가? 모세이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여주셨나?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어느 때나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이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적인 의미가 더 많다. 예수가 성육신한 로고스로서 비로소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논리가 전개된 것이다. 18절을 읽으면 반대쪽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나 구약성경 스스로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성육신한 예수의 완전한 하나님의 빛의 계시의 빛 아래서 본다 하더라도 구약성경 자체를 무시할 수는 있느냐? 특히 요한복음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한다는 사상이다. 그것은 구약의 예언을 궁극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은혜위에 은혜로라고 해석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점진적인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부터 보면 예수가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할 뿐 아니라 폐지한다. 이것은 반대의 개념으로 들어온다. 즉 성취와 대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변증법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 긴장이 서문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다.




“아무도 어디에나 어느 때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은 모세를 두고 하는 소리이나 보편적인 적용성이 있다. 모든 종교가 신을 논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 구원을 논하나 그것은 다 가짜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계시할 수도 없다. 그런데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만이 계시하셨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 이것을 어느 사본에는 θεος로서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 어떤 사본에는 υιος로서 나타난다. 독생하신 아들이 계시하고 있다. 요즘의 학자들은 θεος로 보고 있다. μονογηνης라는 말은 독생자라는 말이고 독생자 하나님이 계시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서시의 클라이맥스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절의 요한복음 전체의 클라이맥스와 상응한다. 도마가 예수의 왕 되심을 인식하고 신앙고백함으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요한복음의 결론은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 요한복음의 전체내용을 로고스의 존재와 활동으로 요약하는 이 서시가 결론되는 곳에서 θεος로 읽어야 전체 결론과 상응한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밀접한 관계와 사랑의 관계속에 있는 독생자이다. 아버지와 독특한 아들의 관계인데 하나님의 품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지에 있어 일치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타낸다. 이 나타낸다는 말 즉 εξεγησατο는 말이 재미있다. 이 εξεγηοναι는 지도자로서 무리를 이끈다는 뜻이 있다. 신약성경에는 이 의미로는 안 쓰인다. 해석한다는 말로 쓰인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본질에 참여하고 완전히 순종하는 독특한 아들 예수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셨다. 계시해주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계시자는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 말씀이라 소개하고 있다. 말씀의 계시활동도 해석이다. 곧 계시의 말씀성, 예수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했는데 그 계시는 무엇으로 왔는가? 말씀으로 왔다. 로고스의 찬송시와 잘 어울리는 동사로 예수의 활동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기독교의 활동도 keryguma와 복음선포로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냥 귀신을 보듯이 보기를 갈망하나 성경에서는 중요시 하지 않는다. 바울이 고전후에서 그렇다. 말씀이 중요하다. 십자가의 도가 깁자가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롬 10장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하고 있다. 기독교 계시체계 전체는 말씀선포와 들음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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