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1:1~13,로고스

호리홀리 2015. 5. 5. 21:29

1절.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태초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상기 시킨다. 태초에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태초에 계신 하나님이 3절 부터 창조의  일꾼으로 그려져 있다. 태초에는 창조 때부터가 아니라 창조이전부터이다. 창 1:1절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로고스와의 긴밀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말씀과 하나님은 긴밀한 관계에 있으나 두 개체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여호와의 증인은 관사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헬라어 문맥에서는 보어가 주격일 때는 관사가 생략이 된다. 이것을 칼루이스 rule이라 한다.” 말씀이 하나님이셨다 “고 번역하기도 어렵고 ”말씀이 신적이었다“고 번역하면 좀 약하다. 이 문장의 의도는 1절 후반부의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말하면서 분리한다.

3절-5절은 로고스의 우주론적인 역활, 창조에서의 역활을 말한다. 모든 것, 온 우주가 다 그를 통해서 생성이 되었다. 로고스는 창조의 수단, agent 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창조의 source이고 로고스는 창조의 수단이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역활을  이렇게 구분한다. 예로 고전 8장 6절에 보면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고전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생성된 것이 없다. 여기는 구두점을 어디에 찍느냐?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그가 없이 아무 것도 생성된 것이 없다. 그 안에 생성된 것은 생명이었다.”고 번역할 수도 있고 “그가 없이 생성된 것 어떤 것도 생성된 것이 없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원래 헬라어는 띄어 쓰기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로고스를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의 참여 없이 아무것도 창조된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로고스를 통해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에서 세상이 로고스성을 띈다. 도자기는 만든 사람의 성격이 나타난다. 만든 사람을 계시한다. 세상은 하나님을 계시한다. 세상에는 창조주의 도장이 찍혀있다. 창조주의 성격, 능력, 합리성이 그 속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질서가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계시를 띄고 질서가 있다. 타락으로 많이 망가지고 희미하게 되었다. 이런 계시를 자연계시 일반계시라 한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와 “그 안에 생성된 것은 생명이었다.”로 둘로 번역할 수 있다. 5절에 “ 그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다”(현재형) “그러나 어두움이 극복하지 못했다, ”. 로고스가 생명을 주는 분이었다. 그를 통해서 생성된 것에 생명이 주어졌다. 생명은 피조물들이 산 것이 되었다. “그 생명은 인간들의 빛이었다” 빛이란 말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말이다. 4절은 창 1:1-3절 까지의 빛과 연결된다. 빛은 우리에게 활동하게 한다. 빛이 있어야 우리는 안심하게 된다. 빛이 없으면 캄캄함 속에서 불안하여 한다. 이것은 생명의 본질과 관계가 있다. 생명이 살아있는 상태를 가능하게 한다. 빛은 행복과 관계가 있다. 반대로 암흑은 죽음의 상태, 불행의 상태, 활동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빛은 종말에 주어질 구원의 상징으로 쓰여진다. 종말에 우리가 근심과 불안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피조물로 된다. 우리를 제약하는 모든 요소가 없어진다. 빛은 지식과 관계가 있고 행동의 원칙을 제시한다.

“이 빛이 어두움 가운데 비친다.” 과거형을 쓰다가 갑자기 현재형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현재 비추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냐?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인간과 세상에 영원히 비추이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냐? 후자이다. 영원한 현재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태초부터 암흑속에 있는 세상을 계속해서 비추어 왔다. 세상은 ① 하나님의 피조물이나 ②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께 적대해서 암흑속에 있는 적대세력이다. 그래서 고난 속에 있고 구원의 대상이다. ③ 세상이 구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피조물을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계속해서 빛을 비추어 오고 있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καταλαμβανιν 이 말은 “붙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긍정적으로 쓰였느냐? 부정적으로 쓰였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다. ① 부정적인 의미로 붙든다, 체포한다. 극복한다의 뜻이다. ② 긍정적인 의미로 붙든다, 환영한다, 받아들인다의 뜻이다. ③ 긍정적인 의미로 붙든다, 터득한다, 이해한다,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①, ②, ③의 의미 중에서 어느 의미로 쓰였느냐? ①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도 말이 된다.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보면 어둠의 세력이 빛의 세력을 덮어 버리려고 했다. 어둠이 빛을 극복하려고 했다. 어둠, 사단의 세력이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좌절시키려고 했다. 아담과 이브를 꾐으로서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계시하고 구원의 행위를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구원을 하셨다.



5절은 우리에게 세상은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으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계시하시고 빛을 비추신다. 그러나 세상은 깨닫지 못하고 암흑 속에 있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빛이 승리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이 세상은 도둑질 잘 하는 사람이 잘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승리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승리할 수 밖에 없다.




6-8절은 세례요한의 기사이다.

요한은 “한 사람”이다. “났으니” 는 “생성이 되었으니” 즉 “피조물”이다. 이것은 로고스와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으로 부터 사명을 위임받은 자이다. 빛에 대해서 증거하러 왔다. 모든 사람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7절). “빛이 아니었다” “증거하러 왔다”가 세 번 나온다. 이러한 문구들은 어떤 학자들은 요한을 깍아 내리는 문구라고 한다. 즉 요한의 추종자들이 요한이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계시자였다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고 예수가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계시자였다는 것이다.



9절. 9-12절까지는 시내산에서 토라를 줌으로 해석을 하려는 사람들은 14절에서 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전의 로고스의 계시활동을 성육신 전의 계시활동으로 보아야 한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토라를 주심으로 나타나셨으나 그의 백성이 영접치 않고 남은 자만 영접하였다. 이 로고스가 드디어 성육신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거해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 성육신한 로고스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진리와 은혜가 가득한 것으로 모세를 통해서 계시된 율법보다 능가하는 것이다. 율법과 성육신을 통한 계시가 대조된 것을 보고 이렇게 언급한다. 즉 로고스의 성육신전 계시는 모세를 통한 토라의 계시이다. 로고스의 성육신을 통한 계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9-12절은 로고스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의 활동을 말한다. 


11절에 “그가 자기 것들 속으로 왔다. ”이 세상도 특별한 이스라엘도 로고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세상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예수에게 한 것이 세상이 예수에게 한 것이다. 예수의 오심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오심이다. 성육신 가운데 오심이나 같은 것이고 이스라엘의 반응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래서 여기서 자기 것도 이중의 의미이다. 즉 이스라엘과 세상의 이중의미이다.




10절. “세상에 빛이 있었다”·····“알지 못했다”는 aorist인데 시점이 아니라 항상 알지 못했다. nomic aorist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말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유대인들이 영접하지 않으므로 첫 책에서 보여준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 정도로 볼 수 있다.

11절. 토라를 통한 계시와 성육신의 계시를 영접치 않했다.

12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아니고 로고스가 주는 것이다. 은혜의 사상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에게만 적용했다. 자녀는 τεκνα를 쓴다.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하는 부차적인 의미이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 됨이 주어지느냐? 믿는 자들, 주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준다. 믿음의 근본의미를 잘 정의하고 있다.



13절.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무엇이냐? 피, 혈통으로도 아니고 육신의 의지로도 아니고 남자의 의지로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난자이다. 피와 육은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전혀 인간의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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