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18장,십자가재판과 처형의 의미

호리홀리 2015. 5. 19. 16:52

예수의 체포

18:9절 말씀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과 같이 동산에 갔을 때  예수를 체포하러 온다. 그때에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이 무사히 돌아가는 조건으로 자기가 찾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자기를 체포하도록 한다. 그것에 대해서 요한은 18:9절에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는 하는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이를 위해서 자기는 체포되고 그 제자들을 무사히 가게 했다고 주를 달고 있다.




그러니까 첫째로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양떼의 목자인 예수가 이리 떼 같이 달려드는 사단의 세력에 대신 싸워서 - 그 싸움은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승리를 나타내지만 - 자기 목숨을 내어 주어서 그의 제자들의 구원을 확보하고 영원까지 지킨 것으로 예수의 죽음을 해석한다.




② 18:32절, 산헤드린에서 문초를 한 예수를 빌라도에게 정식 재판을 하도록 넘겨주는 장면

그런데 산헤드린에서 자기들이 재판을 해서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겨준 의미가 무엇이냐? 그래서 빌라도에 의해서 재판을 받고 그에 의해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에 의해서 처형된 의미가 무엇이냐?

요한은 .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8:32).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이것은 12장 32-33절을 가리켜 한 말이어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보이심이러라” 내가 땅에서 들려 올림을 받을 때 내가 모든 사람을 내게 이끌겠다고 말씀했는데 바로 이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산헤드린에서 재판이 종결되지 않고 빌라도에게 재판이 넘겨지고 사형언도를 받고 처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것은 물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산헤드린에서 사형언도와 집행이 되었다면 돌로 쳐 죽임의 형을 받았을 것이다. 신명기 13장, 17장, 18장 등에 보면 백성을 오도한 거짓 선지자는 그 형벌이 돌로 쳐 죽임이다. 그런데 에수가 산헤드린이 아니라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은 로마 사람들의 반란자의 처형방법은 십자가 형이다. 그래서 산헤드린에서 빌라도에게로 예수의 재판이 이관된 것을 보고 이것은 예수가 들림 받음으로(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을 것을 말했는데 그것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다.




요 18: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왜 예수가 돌로 쳐 죽임을 받지 않고 또는 야고보 같이 칼로 목베임을 당하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느냐? 여기에서 아주 오묘한 진리를 발견한다. 십자가의 죽음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도 칼로 목 베임을 당하는 것보다도 더 잔인 한 극악부도한 가장 천한 죽음이다. 사형 중에서도 가장 천한 죽음이다. 그 낮아짐의 죽음은 동시에 지표에서 들림의 죽음인데 여기에서 엄청난 진리를 발견한다.  사랑은  자기를 내어줌이다. 곧 섬김이다. 당시 종들도 하지 않는 일을 자기의 제자들에게 한다. 종보다 더 낮아짐으로완전한 사랑을 나타냈다. 완전히 사랑한 것을 극으로 나타냈다. 이 섬김은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낮아짐, 섬김을 나타내고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낮아짐이며 가장 깊은 섬김이다.


③ 18:37절 빌라도의 재판.

예수가 빌라도에게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된 죄목은 메시야로 주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메시야 사상에 의하면 다윗왕조를 재건할 그래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할 그래서 민족의 해방을 이룰 전사 왕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 로마 치하에 있는 유대 땅에서 곧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 대한 반란을 의미했다. 그래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네가 왕이냐?”고 묻게 되었다. 예수가 스스로가 왕임을 시인하고 자기 왕 됨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는데 진리로 다스림, 진리를 나타냄, 진리의 왕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냉소적으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물음으로 빌라도는 스스로 진리를 모르는 자로 나타난다. 곧 진리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자, 어둠에 속한 자, 세상에 속한 자로 스스로를 나타내고 있다. 이 예수의 진리의 왕권에 대한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줄곧 요한복음 내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진리를 나타내고 스스로 진리이시고 진리의 말씀을 하시는 자임을 줄곧 말했는데 우리로 하여금 그런 구절들을 상기시켜준다.






빌라도의 처형에 있어서 또 하나의 역설은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해서 처형을 하기를 꺼려한다. 예수를 무죄석방을 하려고 한다. 그때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한다. 당신이 이 사람을 무죄석방하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이것은  공갈이지요. 스스로 왕이라 하고 가이사의 왕권에 반역한 자를 당신이 무죄석방을 하면 당신이 바로 예수의 반란에 동조하고 동참한 자다. 그래서 결국 빌라도가 처형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 자는 우리 왕이 아니므로 십자가에 죽여라.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 이것은 숙명적인 선언이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7장 50절에서 본 봐와 같이 대제사장에 의해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처형시켜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또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해서 율법에 근거해서(신명기 17, 18, 13장에 근거해서) 예수를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한다.




돌로 쳐 죽임을 당하면 예수의 운동이 종결되지 않고 더 활발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왜? 중간사 시대부터 아주 강력하게 흐르는 사상 하나가 하나님의 진정한 선지자들은, 의로운 종들은 패역한 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다는 “의로운 자들의 고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산헤드린에 의해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하면 이미 예수는 메시야 선지자로 추앙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진정으로 의로운 하나님의 선지자였음이 확인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의 운동이 더 확산될 수 있고 그래서 대제사장이나 산헤드린에 더 골치덩이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 군대에 의해서 백성이 다칠 수도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의 아주 영리한 꾀에 의하면 예수가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런데 당시의 그들의 메시야에 대한 통념은 자기들의 정치적인 왕임으로 다윗왕조를 재건할 왕임으로 예수를 이런 식으로 해서 송사를 하면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밖에 없다. 십자가에 못박으면 예수에게 신명기 21:23절이 적용이 된다. 그러면 성경을 존중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의로운 선지자로서 패역한 세대에 의해서 불의한 방법으로 잘못 재판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을 오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를 받은 것으로 확신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