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구약신학

제7강 오경신학2

호리홀리 2014. 12. 11. 14:16

제7강 오경신학2




레위기 19장, 17장, 26장 ·······“나는 여호와니라”·········.


오경신학은 바른 신앙을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레위기(27); 모세 오경의 가장 핵심적인 책 - 성화의 신학

        17장이 핵심으로서 레위기는 피를 뿌려 죄를 속하는 내용으로서 구약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1-16장 하나님에게 나가는 제사법

17장 하나님과의 관계 제사법; 신앙과 생활의 연결 고리(피의 복음)

18-26장 생활(윤리 도덕법;19:18)법

        26장 결론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

        27장 서원에 대한 내용 기록


17-26장까지 성결법전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사법전과 구별된 단위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학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다. “거룩”에 대한 개념은 앞의 부분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

1-16장 ;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법

출 19:5-6 두 구원 받은 백성의 두 가지 사명을 전 시간에 말했다. 즉 제사장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레위기는 이 두 가지 사명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1-16장에 제사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 거룩한 백성이 됨에 있어서 거룩이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거룩은 윤리 도덕적인 내용이다. 이방의 신들은 부도덕했다. 그래서 18장 이후에는 거룩한 백성의 사명으로서 윤리 · 도덕적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제사법

1. 올라(번제 הꗚ꘢) ; 제사의 의식이 제사장의 권력하에 장악되는 것이 아니고 초기 모세의 제사법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여자도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고, 그 제물도 제사장이 아닌 헌물자가 잡게 했다. 번제는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시 50편에 모든 짐승이 내 것인데, “내가 제물을 먹고 싶어서 드리라고 했겠는냐”라고 하는 책망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번제의 정신은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라고 하는 것이다. 즉 예배는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다. 선지자들(말라기까지)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예배자의 마음이지 제물이 아니다는 것이다.

올라(הꗚ꘢)는 그러므로 자기위탁이다. 짐승이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에게 올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단번에 이것을 대신 이루셨으므로 은혜 위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올라의 정신 즉 예배의 정신은 자기위탁의 정신이다. 예배의 현장, 곧 화해의 바탕은 자기부인의 삶이며 또 하나님 중심의 삶이다. 이것이 번제의 신학이다.

예배 정신의 오늘의 적용은 히 9-13장에 나타난다. 이것은 예배의 재해석의 가장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 이것은 ‘찬미의 제사’를 의미한다. 구약의 선조들의 고백은 바로 이 찬미의 제사이다. 번제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찬송과 기도가 끊이지 않는 삶이다. 시편은 찬송이다. 찬송과 기도는 분리되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찬미의 제사를 말하고 있다


2. 민하(素祭 הꖎꘁꗬ) ; 누구든지 번제나 소제를 드릴 수 있다. 제사장은 매일 의무적으로 성소에서 번제와 소제를 드리게 되어 있다. 번제와 소제는 제사의 기본적인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곡식 또는 첫 열매를 가지고 드리는 제사로서 피가 없는 유일한 제상이다. 여기서의 대표적 소재는 고운 밀가루(솔레)이다. 소제는 하나님께 기념으로 한 웅큼 제단에 바치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소유가 된다. 제사장은 제물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한다.


고운 밀가루를 하나님에게 드리는 정신은 희생의 정신이다. 고운 가루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헌신하는 삶(분골쇄신)을 살겠다는 것이다. 예배의 정신은 그러므로 자기위탁과 헌신(희생)이다. 예배의 차원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받고 그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응답인 것이다.


소제의 경우 누룩이나 꿀을 절대로 넣어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꿀은 가나안의 유명산물이다. 가나안의 신들에게는 이것을 반드시 드려야 했다. 희생과 헌신의 원리에서 볼 때, 누룩은 빵을 부풀린다. 바울은 누룩을 괴악한 것이라고 했다. 희생과 헌신에서 그것을 부풀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이런 의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부풀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또 희생과 헌신에 있어서 달콤하게 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파리와 벌이 달라든다.


유향과 기름 그리고 소금은 또한 반드시 넣어야 했다. 유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의미했다. 희생과 헌신에서는 기도 없이는 불가하다. 기름은 언제나 성경에서 성령을 상징한다. 성령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희생 봉사하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소금은 변치 않는다. 희생봉사는 억지로 또 변덕 부리지 말고 맛있게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3. 제바흐 쉐라밈(화목제 מיꗬꗚꚉ חꔨꖅ) ; 화목제는 희생 제물이다. 이 제사는 3가지 경우에 드렸다. 이 제사는 오늘날 선행의 제사에 해당한다(히브리서 참고).

번제와는 달리 화목제의 정신은 나눔에 있다. 초대교회의 성공비결은 나눔에 있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히브리서에도 나눔의 제사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셋째 날에는 먹지 말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내일 마음이 변하기 전에 지금 나누라는 것이다.


4. 하타트(속죄제 תאꚓꖏ) ; 짐승을 도살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그 중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도 부지중에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제사의 원리는 겸손이다.

칼빈은 겸손을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구약신학적으로는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겸손이다. 이것이 겸손의 본질이다. 딤전 6장에서 바울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제사장이나 회중 또는 이스라엘 전체가 죄를 지으면 평민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짓는 죄보다는 더 무겁다(레 4장 참고). 왜냐하면 그 죄가 그들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5. 아솸(贖愆祭 מꚂאָ) ; 속건죄는 소유권 침해의 죄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경제 개념이 예민하게 발달했다고 본다. 수염소를 잡아 드리는 희생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나 이웃의 재물을 훼손 했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 단 그 잘못에 대하여 먼저 갚고(원물+1/5)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다(레 5장 참고). 여기까지 와야 온전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삭개오의 태도에서 그 의미가 더 잘 발견된다. 이 제사의 정신은 채무자의 정신이다.


거룩한 생활의 원리의 핵심은 19장에 있다. 절기의 문제는 23장에서 강조된다. 모든 절기의 기초는 안식일에서 시작된다. (안식일 - 안식년 - 희년을 중심으로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등이 강조된다.) 절기의 의미는 ‘생활의 리듬’(생활의 맥박)이다. 즉 생명의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활기가 있고 건강한지를 볼 수 있는 것이 절기적 삶이다.



민수기(36장) ; 광야의 책이다. -- 훈련


행 7장에서는 ‘광야교회’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교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했는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그것은 원망과 불평이었다. 즉 현실의 문제를 다루어 주는 것이 민수기이다. 구원받은 자들의 특징은 바로 원망과 불평이다. 이것이 민수기의 내용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말이 “목이 곧은 백성”이다.

만약 민수기가 P문서로서 후기에 지어진 문서라면 어패가 있다. 출애굽한 모든 1세대를 위와 같이 말하고 있다. 현실의 적나라한 표현들로 볼 때, 지어낸 이야기로 보는 것은 무리다.

발람과 발락에서 보듯이 목회에서 제일 문제는 거짓 예언자, 목회자들이다.


민수기의 신학은 훈련의 신학이다. 훈련에 있어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제 1세대는 다 광야에서 엎드러졌다. 26장에서 제 2세대는 다시 인구조사를 해서 여호수아가 조직하고 훈련했다. 교회는 조직을 해야한다. 즉 거짓 예언자나 원수, 광야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조직을 해야 한다. 조직에서 뒤에 쳐지는 자는 다 엎드러진다. 훈련에는 권징이 포함된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과 권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는 권징이 없다.

민수기에는 원망과 불평과 아울러 요단 동편을 점령하는 기쁨도 있다.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내용을 34-36장에서 볼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을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쁨을 부분적으로 맛보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모세는 백성들이 치려할 때,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것은 오늘날 목회자의 처신에 있어서 깊은 통찰을 주고 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온유함이 온 땅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지도력은 탁월했다. 그의 자식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웠던 것이다.



신명기(34장) ;

신명기의 ‘신’의 의미는 하나님의 계명을 되풀이한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주신 제 2의 계명이다. 신명기의 신학은 샤마(עꗫꚂ)의 신학(신 6:5 עꗫꚉ)이다.

신명기에서 “들으라”는 순종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רꗈꕾ”(기억하라 신 15:15)는 모세 연설의 기본적 두 가지 핵심이다. 따라서 신명기는 되풀이 신학이다. 즉 신명기는 “마음”을 겨냥한다. 들어야 기억하고, 기억해야 듣기 때문이다.

결국 신명기는 기억과 순종을 되풀이해서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다.



여호수아(24장)

창세기에서 주어진 “땅”에 대한 언약의 완전한 약속은 여호수아에서 성취된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육경의 구원사 신학”으로 보기도 한다. 즉 신명기까지 부분적인 약속의 성취가 신명기에서 완전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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