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구약신학

제6강 모세 오경 신학1

호리홀리 2014. 12. 11. 14:14

6강 모세 오경 신학1



문서설에 대한 신학적 정리

문서설은 종교사학파의 가설로서 오늘날 구약학계에서도 사양길에 접어들고 장례식만 남겨두고 있다. JEDP의 문서설은 벨하우젠에 와서 설립된 것이다. 그는 1883년의 「이스라엘 역사의 서설」(Prolegomena zur Geschichte Istraels)이란 논문에서 제기 했다.


J문서; 야웨문서로 창세기 1장과2장의 하나님의 호칭이 다른 것을 주장한다.

E문서 ; 북왕국에서 상용했던 문서로서 엘 하나님을 사용한다. 북왕국의 신학이다. 남쪽에 예루살렘을 빼았겨서 벧엘과 단에 근거를 두고 다윗보다는 모세의 전통을 강조한다.

D문서 ; 마틴 노트 이후로 요시야 종교개혁의 문서로서 힐기야가 발견한 것이 아니고 그 때 이 문서를 쓴 것으로 생각.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꽤한 문서다. 그 중심은 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신명기 문서에는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한 장소로 예배하라고 했다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히브리어에는 “내가 택한 장소에서 예배하라”고 한 것이다.

P문서 ; 바벨론 포로기 주전 550년 경에 포로로 가서 반성하면서 전통적인 하나님의 율법을 법전화한 것이다. 그래서 이 문서는 율법주의를 생산하는 기초를 제공했다. 포로 이후에는 이것에 기초한 유대교 사상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모세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한 것은 여호수아인 것이다.

수 8:31, 출 17:14절의 기록과 비교하여 보라. 모세의 전승은 두 가지로 내려 왔다. 즉 문전과 구전으로 내려왔다. 여호수아시대부터 예언시대가 시작된다. 모세시대와 다른 것은 율법체계를 의존하는 시대로서 율법을 재해석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모세의 말을 기억하고 재해석해서 기록했다고 본다. 또 수 24:26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했다는 말이 나온다. 예레미야도 서기관 바룩을 채용했다. 그리고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것을 바룩이 후에 추가하여 기록하였다는 기록도 나온다.


여기에 첨가할 것은 아론자료이다. 왜냐하면 레위기에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52회나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거기에 보며 중간 중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불러 가라사대, 또 아론에게 불러 가라사대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아론의 자료가 있어서 레위인들에 의해서 보전되었다고 본다.

여호수아 사후에는 후계자가 없다. 이것이 사사시대이다. 율법의 전승은 레위 가문에 가지 않고 예언자들에게로 갔다. 삼상 12:6,8을 참고하라.

구전부분을 편집했다. 바벨론 포로에 갔을 때, 귀환한 에스라가 율법학자로서 강의를 하고 했다. 오늘의 오경은 에스라시대에 최종적으로 편집되었을 것이다. 느 8:28에 보면 에스라는 레위인들과 같이 협력하였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최종적으로 편집을 도왔다.

                


문서설을 반대한 학자들

1.19세기 말 베르린 대학의 구약학 교수 E. W. Hengstenberg(1802-1869) ; 독일 학자로서 문서설을 반대하고 「오경의 진정성」이라는 책을 써서 문서설을 대응한 학자.

2. W. L. Baxter ; 영국인으로서 「성전과 제사」라는 책을 썼다. 부제는 「벨하우젠에 대답함」이라고 붙어있다. 1869년에 출판했다.

3. 또 J. Orr 「구약의 제문제」라는 책으로 문서설에 대안 제시. 1906년에 출판

4. W. H. Green 미국인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의 구약 교수로서 「오경의 고등비평」을 1895년에 출판했다.

5. 20세기 중반의 학자 O. T. Allis 「모세의 다섯 책」 1949. 총신대에서는 이 책으로 가르친다.

6. 유대인 학자 U. Cassuto 「문서설」이라는 책으로 문서설을 반대. 1964년 영역, 1974년에 재판, 배재민 역, 「반 문서설」, 성광문화사. 유대인으로서는 처음

7. M. H. Seagl, 「오경의 구성과 그 저자에 대해서」 1967년에 히브리대학에서 영어로 번역


오경의 독특성과 통일성


역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예언자들이며, 그들의 지향은 하나님의 왕국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철학을 보여 주는 것이 예언자들의 책이다. 인간의 역사 즉 이스라엘이 자신의 의를 추구할 때(거짓 메시야를 좇음), 하나님의 역사 즉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고 거기에 구원의 희망(메시야 사상)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1. 창세기(50)

1-11장 보편사적 하나님의 계시 ; 하나님과 인간의 소외, 그리고 이것은 부부간의 소외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형제살인, 사회붕괴, 민족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갈 3:28(...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에서 해결의 점을 찍는다.

12-50장 족장들의 역사를 통한 구속사적 하나님의 약속 ;

하나님의 백성(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은 어떤가? 실패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신다. 이 점에서는 보편사와 구속사가 똑같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우리와 같은 죄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 죽었다. 그들이 훌륭한 것은 하나님의 불가해적인 사랑으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 위대한 믿음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었다는 것 즉 실패했다는 것을 창세기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실패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모세신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버려두지 않고 구원의 약속을 주신다(복음의 은혜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의 하나님은 구원의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구원의 약속과 죽음의 갈등관계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복음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가 아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은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창세기의 신학은 하나님이 약속을 붙들고 떠나지 않는 것이다. 야곱도 하나님을 씨름을 하면서까지 떠나지 않았다. 족장시대의 하나님은 엘 하나님이다.

엘 하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 즉 부모와 같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족장시대는 이러한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요셉 ; 13년간 하나님이 대단히 훈련하셨다. 그는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고자질하는 것은 아주 악한 성격이다. 그래서 형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요셉을 야곱은 또 사랑했다. 이러한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하셨던 것이다. 요셉은 형통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애굽에서 이방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스스럼없이 맞이하고 있다.

50장에서 요셉의 최후의 유언 후에 입관하는 것으로 끝내고 있다.


2. 출애굽기 (40)

창세기의 연속이다.

출애굽기의 저자는 창세기의 내용을 알고 있고 연결하여 기록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양 책의 저자가 전혀 다른 시대의 다른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 창, 출은 문학적, 신학적으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출 3장에 나타난 모세의 소명에서 보면, 그는 말더듬이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보낸다. 거기서 모세가 ‘하나님을 누구라고 하냐’는 물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내가 행할 바를 행하는 자다”

(출 13:14)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계시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들이 전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알았으나 그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셨다. 그 하나님이 이제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행동을 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고 있다. 출 6:3에서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이름을 말한 것이 아니다. 어떤 하나님인가를 말한 것이다. 출애굽기는 역사의 주인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 신명기, 에스겔 등에서 “나는 여호와로라”는 말씀이 수 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므로 JEDP에서 주장하는 첫째 조항은 폐기되어야 한다.


요 17장 26절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는 것은 피상적인 하나님 이름의 계시가 아니다. 그것은 곧 행동하시는 또 역사의 주인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출애굽의 신학은 구원과 해방과 자유이다.

그러나 여기서 ‘해방과 자유’는 그 의미가 다르다. 즉 야웨를 떠난 구원과 자유는 없다. 이것이 신학과 이데올로기의 차이이다. 출애굽기 7장에서 11장에 반복되는 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는 단순 문장이 아닌 복합문장이다. 즉 “내 백성을 보내라 그리하면 나를 섬길 것이니라”는 의미이다. 즉 참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와 해방으로 부르셨다는 것이 출애굽의 신학이다.



히브리 민족은 셈족 조상 중에 에벨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창 14:14에서 아브라함이 히브리인이라고 최초로 불렀다. 아브라함은 당시에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서 떠돌이 민족이라고 볼 수 없다.

출애굽의 자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의 자유를 말한다. 그들은 시내산으로 간다. 거기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출 3장 19장이 핵심이다. 19장에서 출애굽한 백성은 “이스라엘”이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혈연 공동체가 아니다. 그들은 신앙공동체이다. 즉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누구나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선교의 가능성이 열려져 있다.

출애굽에서 장정만 60만이라고 했는데, 거기에 중다한 잡종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이 바로 ‘아비루’들이다. 출애굽 이후 레위기부터는 히브리라는 말이 사라진다. 시편, 역사서, 예언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없다.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은 언약의 조건을 주셨다. 그것은 십계명이었다. 이것이 후에 안식일로 집중된다. 따라서 모세의 언약은 족장시대의 일방계약과는 달리 쌍방계약이다. 아이히로트 구약신학자는 '모세의 계약도 불평등계약이다'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시적 은혜언약으로 봐야지 단순한 쌍방계약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단지 백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시내산 언약의 내용은 간단하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신학이 최초의 하나님나라 사상의 출현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이 구체적으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은(시내산언약의 골자)


1)소유이다. 출 19:25-26 이것은 히브리어로 ‘스굴라’로 표현한다. 또 ‘암’은 친족 개념을 갖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녀 즉 백성이다. 따라서 스굴라는 의미론적으로 확장되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이 된다.

2) 하나님은 자녀된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의 사명을 주셨다.

제사장들의 나라(맘믈레케트 코헤님); 제사장의 역할, 직무는 하나님과 백성의 중보의 자리이다. 중보는 화해를 의미한다. 구원받은 백성의 자녀로서의 제일가는 특징은 화해이다.


거룩한 백성(고이 카도쉬) ; 암은 친족관계를 의식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 성경은 중요한 단락에서 ‘고이’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보편성을 가진 사람이다. 즉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거룩한 공동체가 거룩한 백성이다. 분명한 카도쉬의 의미는 레위기에 가서 드러난다. 레 19:2절이 핵심인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거룩은 윤리 도덕성을 말한다. 여기서 ‘윤리’는 하나님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며 ‘도덕’은 사람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즉 한 분 하나님을 섬기도 도덕을 지키는 사람들로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은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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