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구약신학

제8강 예언서

호리홀리 2014. 12. 11. 14:17

  제8강 예언서




여호수아 1장(약속), 21장 43-45절(성취), 겔 18장 21-32(예언자들의 주요 개념들)


모세신학은 실제적으로 구약신학의 바탕이요 기초가 된다. 여호수아는 전기 예언서이다.


예언서

예언자들은 역사철학자라고 이해하고 싶다.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삶의 장이고, 그 백성들의 관계와 삶의 경험들의 이야기이다. 그런 뜻에서 구약학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History를 His + story로 이해하기도 한다.

토라의 약속이 여호수아에 와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성취가 그 신학의 핵심이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었다. 그러나 예언자들, 예언 신학에서는 율법과 말씀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수 1장 참고) 자신의 뜻을 전하신다. 이것이 예언서의 특징이다. 여호수아 1장에서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예언자는 누구인가?

구약신학적으로 예언자는 율법의 수호자이다. 또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고 삶 속에서 율법을 말씀으로 재해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언자는 말씀의 직이다.(렘 18:18)

여호수아서는 24장으로서 토라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내용적 강조점을 가진다. 즉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핵심이다. 여호수아(ꘞꚈוֹהꖾ)라는 말은 여호와는 구원하신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과도 연결되면서 중요하게 제시된다.

그러나 여호수아 시대가 지나고, 300년 이상 사사 시대가 진행된다.

사사기는 사사들이 다스리는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사(쇼페팀מיꚕ꘰ꚇ); 싸움의 스승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사사는 외적의 침입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용사들이었다. 공통번역은 판관(샤파트תꘪ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사사기는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 상대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300년 이상 사사들을 통하여 지켜주셨다.


사무엘서(לꔞוּמꚉ 상 31장, 하 24장)는 에브라임 산지의 엘가나의 이야기로 시작하며, 한나의 출산으로 시작한다. 혼란의 극복을 보여주며, 기도의 책이라고 한다. 즉 기도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무엘서의 3대 인물은 사울, 사무엘, 다윗이다. 사울은 한 번도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는 나중에 군급하자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묻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의미이다.


열왕기서(מיꗉꗚꗱ)는 47장으로 구성된다. 주전 922년에 왕국이 분열해서 주전 722년에 북왕국이 멸망하고 587년에 남왕국이 멸망했다. 북왕국은 왕하 17장에서, 남왕국은 왕하 25장에서 멸망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여호야긴이 바벨론에서 풀려났다는 이야기로 끝난다. 열왕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가 모든 것이 성취되고 좋았던 상태에서 더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고 멸망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역사는 모든 좋은 것으로 준비된 것에서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로 시작한다.

이사야(הꖷ꘤ꚃꖾ)는 예언서 중의 예언서, 구약의 로마서라고도 한다. 39장까지는 하나님의 정의, 66장까지는 하나님의 공의를 기록한다. 정의와 공의는 거룩하신 분을 의미한다. 즉 이사야의 하나님의 역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으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로서 그 신학은 구원의 신학이다. 즉 심판으로 끝난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 여기에 역사의 희망이 있다.

B. Duhm은 40-55장을 제2이사야 / 56-66장을 제3이사야라고 구분하였다. 전자는 고레스 칙령을 기준으로 해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주조가 되어있다. 그러나 돌아와서 보니 너무나 현실은 암담하고 좌절적이었다. 그래서 후자는 묵시적 내용을 보인다.

제1이사야는 웃시야부터 히스기야 시대에까지 활동한 시기이다. 여기는 주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했다. 그러나 35장에는 구원의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심판을 말했으나 구원도 말하고 있다.

학자들은 고레스의 등장은 주전 539년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이사야의 활동은 거리감이 있다. 160년의 간격이 있다. 그래서 이것을 사건 후의 예언이라고 독일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2000년 전에도 예수님을 예언했다. 무당들도 예언을 하고 있다. 심지어 정감록도 예언을 하고 있다.

다니엘서에 보면 고레스 원년까지 활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래서 고레스에게 이사야 문헌을 보여주었다는 기록이 유대교 문헌에 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사야의 전반부는 전기 이사야/ 후반부는 후기 이사야라고 부르는 것이 이사야를 이해하는 데 통일성을 갖을 수 있기에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이사야는 50년간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의 문체나 말투가 바뀌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전자는 청장년 시절에 기록되고, 후자는 말년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사야의 구원은 하나님의 거룩을 말하면서 임마누엘(לꔞוּנꗲꘟ) 사상(사 7:14)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메시야 사상이 본격화된다. 메시야(마시야); 9장, 11장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성경은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예언이라는 것을 누누히 말하고 있다. 신약도 이 구절들을 계속 인용하고 있다.

후기 이사야에도 메시야 사상은 에베드 야웨(הוꕘי דꔫ꘡) 사상으로 이어진다. 53장 대속의 종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고난의 신비를 말해주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이해는 탈고난을 말한다. 그러나 예언의 역사철학은 고난의 신학이다. 여기에 역사의 비밀이 있다고 보여진다. 예언자들은 다 고난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언자로의 부름을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탈고난이 아니다. 고난을 없애주는 것이 역사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예언의 신학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적 일하심은 연약한 순같은 인간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이사야의 메시지는 새 출애굽의 역사이다.


예레미야 (이르무야 הꖷꗱꙣꖹ);

어근이 룸(מוּר)에서 왔다고 보여진다. 여호와께서 높여준다는 의미이다.

예레미야의 신학은 하나님이 높이는 역사이다. 핵심 메시지는 새 언약이다.

이 시대에 거짓 예언자가 많이 나온다. 23장-28장의 하나냐와의 대결이다. 예레미야의 신학은 고난의 신학, 하나냐의 신학은 탈고난의 신학이다.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내 피로 새우는 새 언약’이다.


에스겔(여헤즈켈 לꔞקꖂꖒꖾ)

어근-하자크(קꕿꖎ); 힘있게 한다. 능력있게 한다.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힘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 그 메시지이다. 그 신학은 새 성전의 신학이다.


12소선지(호세아-말라기) ; 새역사

호세아 ;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요엘 ; 여호와의 날

아모스 ; 정의와 공의

오바댜 ; 에돔의 저주

요나 ; 하나님의 이방선교

미가 ; 이사야와 호세아와 아모스의 사상을 종합

나훔 ; 니느웨의 멸망

하박국 ; 여호와의 날

스바냐 ; 여화의 날

학개 ; 성전

스가랴 ; 하나님의 나라

말라기 ; 메시야 준비-엘리야가 먼저 와야한다.


이러한 다양성 속에 이루는 기초는 앞의 사, 렘, 겔의 신학이다. 종합하면 그것은 새 역사이다. 새 역사는 Reform이며, 그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예언서의 사상적 두 축은 정의와 공의이다. 아모스 5장 24절에 보면

정의는 ‘미슈파트’ 하나님의 주권 ; 인간이 역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다는 사상이다. 예언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정의이다. 경제/ 사회적 정의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공의는 ‘쯔다카’ 또는 ‘체덱’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계약관계), 이웃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

양자를 밑받침하는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사랑)이다. 예언자들의 거룩의 뿌리도 이 사랑에 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이다. 참 예언자는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이다. 거짓 예언자는 증오와 미움이 주도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예언자의 눈에는 눈물이 있다. 그러나 거짓 예언자의 눈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

                        

나비(איꔩꗺ)

히랍어로는 προφητης로서 προ + φημι(미리 말하는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자)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선지자(암 3:8)라고 번역한다. 예언자(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윌리암 혹스벨 올브라이트 : 아카드어의 나붐(nabum)에서 왔다고 했다. 그 의미는 부른다는 뜻이다. 나비는 고대 히브리어로서 수동분사형이다. 즉 앞의 뜻을 적용하면 나비는 부름받은 자라는 뜻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말에 동의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주변에는 이방 예언자들이 많이 있었다 ; 바알의 예언자 등. 그들의 특징은 명성 / 부 / 권력이다. 이것은 고대 세계의 3대 가치로서 기득권층의 가치이다. 삼상 9:9에 구약의 나비를 전에는 선견자라고 불렀다고 되어있다. 또 이방예언자들의 특징은 엑스타시의 체험이다. 엘리야의 갈멜 대결에도 바알의 특징은 엑스타시로 나타난다. 초기의 선견자들은 이 엑스타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약의 예언시대는 사무엘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에녹, 아브라함, 모세도 예언자라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역사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은 사무엘 부터이다. 예언자의 직무는 제사장 직무의 타락으로 인해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들과 갈등관계에 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제사장 직무의 파수꾼(ה꘭צ)의 사명을 가졌다. 이사야의 소명에서 그는 제사장은 아니지만 소명장소는 성전이다. 그래서 양자의 관계는 갈등과 보완관계로 보인다. 또 왕권에 대한 파수꾼의 역할에서 출발한다. 메시야 사상의 통일성은 사무엘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역사관이다. 요나서에도 나타나고, 후기 이사야도 그렇고 보편적인 역사의 바탕을 가지고 새로운 예언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예언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선교사상도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보여진다. 예언자들의 하나님 호칭의 특징은 ‘만군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되지만 온 세상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만군’이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의 기준 ; 신 18장, 렘 23-28장, 겔 13장 1-16절

구약학자들이 대체로 7가지로 정리(참 예언자 / 거짓 예언자)

1. 율법에 기초해 있다. 즉 말씀에 기초해 있다. / 말씀과 상황이 기초가 된다. ; 거짓 예언자들은 상황과 말씀을 함께 보고 있고 참 예언자들은 오직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 백성들은 거의 대부분 거짓 예언자를 선택했다.

2. 심판과 구원의 예언을 통전적으로 한다. 양자가 공존한다. / 심판예언이거나 구원예언이거나 한 가지를 택한다.

3. 권력층이나 기존의 특권층에서 독립해서 단독자로 나타난다. / 권력층이나 기존 특권층과 밀착해 있고 집단행동을 한다.

4. 하나님의 백성의 조직 속에서 활동한다. /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면서 세속 정치권 또는 세속조직의 일원으로서 일한다. 즉 정체성이 이원적이다.

5.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방법론으로서 회개를 강조했다. / 현 기득권층의 수호자로서 나타난다.

6. 하나님 중심의 윤리적인 삶을 보여준다. / 인간 중심의 윤리 도덕성을 중시한다.

7. 하나님을 위한 고난이 언제나 따른다. / 대중의 인기를 바라며, 고난을 받아도 인기와 권력을 얻기 위한 고난이다.


왕상 13장 참고

베델의 두 예언자 이야기. ; 거짓 예언자도 하나님의 참 말을 선포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참 예언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만 의존하는 자이다. 아무리 참 예언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거짓 예언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