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신명기

신 11:26-32,복과 저주

호리홀리 2015. 5. 5. 10:30

신 11:26-32,복과 저주 

   
  성경은 처음부터 인생에 두 가지 길 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복락을 누리는 길과 사탄의 대리자인 뱀의 말을 따라 범죄하는 타락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창 3:1-5).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복락을 준비해주셨지만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서 그것을 선택할 권한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의지로 타락하는 길을 선택했다.
  가인과 아벨은 두 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가인은 하나님께 가장 마지막에 거둔 곡물을 예물로 드렸고, 아벨은 가장 처음에 난 양을 예물로 드렸다(창 4:1-5). 가인과 아벨에게 하나님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게 다르게 나타났다. 가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재물보다 뒤에 두었고, 아벨은 하나님을 자신의 재물보다 앞에 두었다.
  두 길과 관련하여 아브라함과 롯을 피해갈 수 없다 (창 13:1-18).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땅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면서 서로 다른 장소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롯은 자신의 눈으로 외면만 보고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였다. 이 두 도시는 외견상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기 때문이다. 롯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와 안목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공간을 선택하였고 결국에는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면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두 길의 역사는 수없이 반복되었다. 사울과 다윗의 경우에서도 두 길이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울은 왕이 된 후에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중에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보면 북 왕국 이스라엘은 사울의 길을 따른 것이고 남 왕국 유다는 다윗의 길을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남 왕국 유다도 마지막에 가서는 두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서 시드기야 왕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렘 21:8). 생명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고, 사망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바벨론에게 저항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두 길에 관해서 분명하게 일러주셨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26). 이 말씀은 앞으로 몇 번이나 반복된다(신 30:15,19).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두 길이 놓여있다. 하나는 복과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화와 사망의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에게 주실 복과 생명과 즐거움을 이미 준비해두셨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절로 임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복과 생명과 즐거움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견과 권한을 존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우리 앞에 두신다. 다시 말하자면 복은 하나님이 준비해두셨지만 그것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릇을 주셨는데 그것을 엎어놓고 있으면 복을 담을 수가 없다. 그러면 복의 길은 무엇이고 저주의 길은 무엇인가?

1. 복의 길(27)

  하나님은 복의 길을 아주 간단하게 알려주셨다.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27). 복의 길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다는 표현은 신명기에 수없이 반복된다. 이것은 복의 길에 대한 가장 간단한 요약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복의 길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생각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부터 하나님의 명령이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음성학적으로나 문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글씨에 담겨있는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생각하신다. 이것은 뜻을 이루기 위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뜻을 이루기 위하여 생각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다는 것은 어려운 문자를 판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아들 비유에서 예를 발견할 수 있다(마 21:28-31). 아버지는 포도원을 경작할 뜻을 세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길까 생각을 한다. 마지막에 아버지는 그 생각을 아들들에게 표현한다. 아버지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 명령을 듣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음성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려는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포도원을 경작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가장 압축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마 22:37-40). 이것은 조금 확대되면 십계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더욱 확대되면 율법이고 가장 큰 범위는 성경 전체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또는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영원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어떻게 창조할 것이며 어떻게 구속할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생각을 여러 가지 명령으로 자세히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명령 가운데 들어있는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의 생각의 핵심인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복의 길이다. 복의 길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이 때문에 듣는다는 말은 단순히 청각의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귀를 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의 문제이다.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보면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나아가보면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며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활의 문제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의 길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 복이다.

2. 저주의 길(28)

  하나님은 저주의 길도 간단하게 알려주셨다.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28). 저주의 길은 복의 길과 달리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복의 길에 언급된 것에 정반대가 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의 길에만 독특하게 나타는 내용이다.
  첫째로 복의 길에 정반대가 되는 저주의 길은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모세가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이다(28a). 저주의 길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은 단순히 청각의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귀를 닫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는 것이다. 또한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내 안에서 몰아내고 나 자신이 왕처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주의 길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내 안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명령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이 저주의 길이다.
  둘째로 저주의 길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이다(28b).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떠나는 인생이 도달하는 지점은 다른 신들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다른 신들에게 도달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필연적으로 다른 신들과 관계를 맺는다. 인간은 공허함을 참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만족하던 것을 떠나면 다른 신들로 만족하는 것을 찾는다.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은 단순한 탈선이 아니라 적극적인 악행이다. 그것은 단순히 궤도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궤도를 벗어나 충돌하여 파괴되는 것이다.그것은 잘못이 아니라 멸망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더욱 불행한 일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신들을 찾는다는 것이다.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이 표현에는 불명하다는 성격이 들어있다. 놀랍게도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신들을 따라간다. 그 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따져보지도 않은 채 따라간다. 신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나 정보가 있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신문조각에 인쇄된 한 구절을 보고, 버스나 전철의 벽에 붙어있는 광고를 보고, 누군가에게 언뜻 들은 말을 믿고 정체불명의 신들을 찾는다.
  “알지 못하는 신들”이라는 표현에는 막연하다는 성격이 들어있다. 사람들은 다른 신들에 대한 뭔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다. 다른 신들을 만나면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다. 그것은 되면 좋고 안 되도 할 수 없다는 식의 막연함이다. 기계가 내뱉은 종이나 새가 쪼아 물은 쪽지에 들어있는 내용이 기분 좋은 것이면 기뻐하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면 잊어버리는 그런 막연함이다. 그런 메시지를 주는 신들의 정체를 구태여 알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알지 못하는 신들”이라는 표현에는 우연하다는 성격이 들어있다.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과 접촉하여 뭔가 메시지를 듣고는 어쩌다 우연히 들어맞는 내용이 있으면 그 우연함을 무조건 신뢰를 해버린다. 그리고는 마치 그것이 생명인 냥 여러 사람에게 자랑삼아 떠들어댄다. 그러다가 만일에 그 우연한 일치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금방 풀이 죽고 만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은 저주의 길이다. 다른 신들은 불명하고 막연하고 우연하다. 다른 신들에게는 정체도 분명하지 않고, 과정도 확실하지 않고, 결과도 진실하지 않다.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은 안전을 보장하지 않고, 생명을 수여하지 않으며, 진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른 신들을 찾는 것은 깜깜한 무지를 따라가는 것이며, 끝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이며, 예리한 암초에 부딪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신들을 찾는 것은 저주의 길을 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가지 모양의 다른 신들을 따라가기 쉽다. 때로는 재물이 다른 신으로 등장하며, 쾌락이 다른 신으로 등장하며, 때로는 이념이 다른 신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재물에 더욱 큰 유혹을 받는다. 재물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아주 무서운 신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우리는 또한 쾌락의 유혹 앞에 서 있다. 쾌락은 말세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갉아먹는 최대의 적이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딤후 3:1,4).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또 다른 강한 원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는 이념이다. 오늘날 우리의 주위에는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는 사상과 운동이 도처에 널려있다. 이런 것들은 반기독교적인 정신을 이론화하며 체계화하고, 사람들에게 침투하여 유인하고, 사회에 보급하고 확장시킨다. 우리는 이런 정신과 싸워야 한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는 무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4-5). 재물과 쾌락과 반기독교적인 이념은 오늘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로서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세력들이다. 이런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은 저주의 길이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복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저주의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을 볼 때 복과 저주라는 두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다.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29). 그리심 산은 축복을 기억나게 하며, 에발 산은 저주를 기억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복과 생명과 즐거움을 예비해두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것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그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언약을 지키면 언약약적축복이 주어지지만,어기면 언약적저주가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