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신명기

신 24:19-22,헤세드를 실천하는 법

호리홀리 2015. 5. 5. 10:25

신 24:19-22

  바리새인 가운데 한 율법사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라고 가르쳐주셨다(마 22:34-40).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라는 두 축이 균형을 잡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신 시기보다 조금 전에 유대에는 샴마이와 힐렐이라는 두 명의 랍비가 있었다. 하루는 어떤 이방인이 이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자신이 한 쪽 발로 서 있는 동안 율법을 요약해서 알려달라고 주문하게 되었다. 포목장사였던 샴마이는 그 주문을 불경하게 생각하여 곁에 있던 나무 자를 휘둘러 내쫓아버렸다. 힐렐은 그 이방인을 맞이하여 한 쪽 발로 서 있을 필요도 없이 금방 율법을 요약해주었다. 그것은 남이 네게 행하면 싫은 것을 너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 중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너무나 값지고 빛나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황금률(黃金律)이라고 불린다. 성경학자들은  황금률이 힐렐의 말을 긍정적으로 바꾼 것이라고 설명한다. 
  힐렐의 사상은 율법의 요점을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설명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조화시키고 있다. 율법의 요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에서부터 이웃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이웃 사랑을 최고의 법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 한 마디로 말해서, 이웃 사랑은 제왕법(帝王法)이다.   


  하나님은 몇 가지 실례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웃 사랑이라는 제왕법을 설명해주셨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그가 적당한 전당물을 가지고 나오게 하라는 것이다(24:10-13). 이렇게 해야 꾸는 사람이 모멸과 횡포를 피할 수가 있다. 또한 품꾼을 학대하지 말고 품삯을 제때에 주라는 것이다(24:14-15). 그때 품꾼이 생계를 유지하며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약자들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24:17-18). 그렇게 하면 약한 사람들이 분노에 사로잡히고 결국은 좌절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례들은 이웃 사랑이라는 제왕법의 토대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야박함의 거절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배려의 실천이다. 하나님의 법 정신은 여유와 배려에서 출발한다.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은 야박함을 버리고 여유롭게 약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에 기초한다.
  이와 같은 여유와 배려의 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비슷한 세 가지 내용을 제시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자들을 위한 배려의 정신을 고취시킨다. 밭에서 곡식을 벤 후 한 뭇을 잊어버리고 왔으면 가져오지 말고, 감람나무를 떤 후에 남은 열매를 그대로 두고, 포도를 따고 남은 것을 남겨두라는 것이다. 잊어버린 곡식 단을 찾으러 가지 말고, 감람나무의 가지를 살피지 말고, 포도를 다시 따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최소한이라도 곡식이나 감람열매나 포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여유와 배려의 정신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잊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마음과 지나간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소유물에 애착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어디엔가 두고 오고나 잃어버리면 무척 마음이 상하는 법이다. 그 물건이 머릿속에서 계속 움직인다. 특히 자기 물건을 잘 챙기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상태에서는 여유와 배려의 정신이 실천될 수 없다. 내가 두고 온 그 물건을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이 유익하게 잘 사용할 것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에는 어떤 위험성이 들어있다. 잘못하면 그것은 자신의 실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시도는 아깝고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는 심리적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여유와 배려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상심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욱 적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요구는 신자가 일상생활 중에 무심코 잊어버린 것, 무의식적으로 두고 온 것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의도적으로 남겨둠이라는 생각이 들어있다. 신자의 남겨둠의 삶이란 의도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같은 내용을 진술하는 레위기를 살펴보면 이런 정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9-10; 참고. 레 23:22). 레위기는 의도적인 남겨둠을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여유와 배려의 자세이다. 여기에 성도의 잊어버리는 지혜와 잃어버리는 지혜가 있다.
  한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존경하게 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를 구경하러 가서 표를 사기 위해서 줄을 섰다. 마침 자기 앞에는 한 남자가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서서 서커스의 재미를 들려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흥분된 마음으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시골에서 올라왔는지 행색이 초라해보였다. 드디어 그들이 표를 살 차례가 되었는데 창구에서 입장료를 지불하려던 아이들의 아버지가 갑자기 얼굴이 굳은 채 뒤돌아섰다. 그 표정을 본 사람은 누구든지 직감적으로 그에게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낭패의 순간이었다. 그때 자기의 아버지가 슬그머니 충분한 돈을 땅에 떨어뜨리고는 “아, 여기 선생님의 돈이 떨어졌네요”하며 주어주었다. 아이들이 아버지는 상황을 알아채고는 몇 차례나 눈으로 진심어린 감사를 표하면서 입장을 했다.  
  하나님은 성도가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계획적으로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바로 이런 점에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놀라운 품위가 있다. 잊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잃어버린 것을 아까워하지 말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란트 비유에서 보여준 주인의 정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런 의도적인 상실의 정신을 보여준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누어주는 것을 계획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도가 이와 같이 여유와 배려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포인트를 제시하신다.
  
1. 자신과의 관련성

  첫째로 성도가 여유와 배려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자신과의 관련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을 요구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를 기억할 것을 촉구하셨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22a). 이스라엘은 구원받지 못했던 상태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그때는 야박한 삶을 살았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동포를 착취하는 바로의 감독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동포를 구타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했다. 이스라엘은 옛 상태를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는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살면 안 된다. 우리도 과거에 우리의 영적 비참함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던 그때는 너무나 야박한 인생을 살았다. 그것은 자기의 것만을 아등바등 챙기던 삶이었다. 우리는 다시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살면 안 된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장차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밭과 감람원과 포도원을 소유하게 된다(19,20,21).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빌려 쓰던 것과 달리, 광야에서 없이 살던 것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소유물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장차 그들은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소출을 얻는 은혜를 누린다. 이런 은혜의 삶에서 베푸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은혜 받은 자로서 여유롭고 배려하는 삶을 실천할 가능성을 얻었다. 따라서 은혜 후에도 야박한 인생을 살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나눌 줄 모르고 자기만을 생각하여 그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었다(눅 12:13-21).

2. 이웃과의 관련성

  둘째는 하나님의 성도는 주위에 연약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여유롭고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각 단락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19,20,21)를 말씀하신다. 이 사람들은 세 번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성경에서 이 사람들은 인생 중에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의미한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가난과 소외의 상징이다. 나그네는 가정이 없는 사람, 고아는 부모가 없는 사람,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보통사람들은 이들보다 모든 면에서 형편이 낫기 때문에 재판이나 경제 같은 면에서 이런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
  오늘날도 영적으로 보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다 이런 상태에 있다. 따라서 신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배려해야 한다. 그들을 멸망당할 사람들이라고 냉대하면 안 되고,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그들에게도 흘러가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신자는 사회를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 사회는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에 가난의 퇴치와 같은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앞장서야 한다.

3. 하나님과의 관련성

  셋째로 이스라엘이 여유와 배려의 삶을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22b).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신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품는 것이며,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다. 만일 신자가 이런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 없이 순전히 인간적으로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는 여유와 배려의 삶을 이것을 실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이때 신자에게는 영광과 위엄과 존귀가 주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일을 행하면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19b).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는 우리의 손을 지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관여하시며,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삶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왕법을 주시면서, 제왕법의 실례를 여러 가지로 제시하셨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웃에 대하여 야박하고 인색한 태도를 버리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웃에 대하여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은혜와 풍요와 여유를 누린다. 헤세드를 실천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