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마 4:23-5:12,복이 있다

호리홀리 2015. 5. 4. 21:45

마 4:23-5:12
무리를 보시고 

    1) 무리의 정체(4:23-25)

  본문은 무리의 출처를 알려준다(4:25). 주님을 따라온 청중은 지역적으로 보면 북쪽에서 ("갈릴리와 데가볼리"), 남쪽에서 ("예루살렘과 유대"), 동쪽에서 ("요단강 건너 편") 왔다. 이것은 필요를 채우기 위한 사생결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본문에서 무리의 수효는 간단히 "허다하다"는 말로 묘사되지만 이것은 대단히 많은 군중을 암시한다. 그들은 서로간에 필연적으로 경쟁자가 되고 만다. 주님의 청중은 신체적으로 보면(4:24)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 본문은 무리의 상태를 알려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님 앞에 몰려온 청중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었던 것이다. 무리의 출처와 수효와 상태로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리의 외면적인 비참성이다.
  그런데 이 무리를 조금 자세히 관찰해 보면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무리의 성향이다. 본문은 무리가 보여준 동작을 설명하기 위하여 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4:25). 무리의 성격을 규정하는 이 한 단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무리가 지니고 있는 성향가운데 가장 큰 특징은 이동이라는 것이다. 무리에게는 이동의 성향이 있다. 무리는 결코 중립적이 아니다. 무리는 매우 이기적이다. 무리는 결코 밀가루 반죽 덩어리와 같은 것이 아니다. 무리는 이렇게 둥글리면 칼국수 판이 되고, 저렇게 뭉치면 수제비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무리를 물질적인 개념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 물론 때때로 개인이 무리 속에 들어가면 개인성을 상실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에게 있는 이기적인 의지는 무리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나타난다. 개인의 이기적인 의지는 계속해서 무리의 집단 속에 굳게 자리잡고 머문다. 무리는 개인의 욕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리는 개인의 욕구를 선명하게 표현한다.
  이러한 이기적인 의지 때문에 무리는 이동을 한다. 간단한 예로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거나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을 하면 사람들이 이동을 시작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조금 더 심층적으로 보면 학군중심의 이동이나 신도시로의 이동 같은 것도 이런 현상에 속한다. 무리는 밥을 찾기 위하여 이동하고, 집을 얻기 위하여 움직인다. 무리에게는 경제적인 의지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의지가 있어서 필요할 때는 어떤 정치가든지 받아들이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어떤 정치가든지 내버린다. 이것은 무리의 세력이다. 무서운 것은 무리의 세력은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서 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이 같은 세력이 예수를 향하여도 작용했다. 무리는 필요 따라서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또한 필요에 따라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받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무리는 집단성을 가지고 있다. 무리는 집단성에 의하여 행동을 강요당한다. 무리가 이동하고 있을 때 이동하지 않는 개인은 큰 불안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바로 집단성에 포함되어 있는 개인의 비참함이며, 동시에 개인성을 소유하고 있는 무리의 비참함이다. 무리의 이동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리의 내면적인 비참성이다.

2) 무리에게 주신 예수의 설교(5:3-12)

  예수께서는 외면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비참성에 사로잡힌 무리를 향하여 산상설교를 시작하셨을 때 입을 열자마자 첫 마디로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을 자그마치 아홉 번이나 반복하셨다. 산상설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님께서는 온갖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천국의 복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세상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는 너무나도 비참한 인생들이지만 주님의 눈에는 천국의 복을 받을만한 영광스런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무리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받아야 할 존재였지만 주님에게는 축복받을만한 존재였다. 주님께서는 누가 뭐라고 하든지 무리가 영광스러운 존재임을 알려주셨다.
  예수께서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낮고 천한 인간을 귀중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나오는 선포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항상적인 인간정신에 대하여 싸움을 거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주님의 "복이 있다"는 선포 앞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앞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이 말씀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이 있다"라는 말씀은 철저하게 인간의 존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신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심에 대한 가장 분명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선포 앞에 설 때 무시되고 상실되고 파괴된 인간의 존엄성이 다시 기억되고 회복되고 건설된다.
  주님께서는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무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의 영광을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2-13)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 (마 11:19)라는 말을 듣기를 싫어하지 않으신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 11:28)고 초청하시는 주님께서 그 앞에 몰려온 무리에게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육체적으로 질병에 고통을 당하고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던 무리에게 찬란한 천국의 영광이 비추었다(마 4:16; 사 9:2).
  질병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하고 별별 조롱과 박대를 받던 무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겠는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는 가슴이 벅차 오르고, 마음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무리에게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뜀박질하였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무리에게는 감격의 눈물이 쏟아지고 입술에 찬송이 흘렀을 것이다. "복이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무리는 너무나도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주님의 축복의 선언 앞에서 무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람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