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1:27-30,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호리홀리 2015. 5. 5. 09:24

마 11:27-30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지를 설명한다 (27).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어떤 분인지 드러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27a). 부활 후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마 28:18).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에 충만하고 풍성하신 분이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분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27b).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마 3:17; 17:5).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고통과 아픔도 아셨다. 예수께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어주셨다 (히 5:7).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시다.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7c).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신다 (마 11:26).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신다면 사람을 아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모든 것을 소유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아주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요청하신다. "내게로 오라" (28), "나의 멍에를 메라" (29), "내게 배우라" (29).

1) 내게로 오라 (28)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8).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을 줄 수 있는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쉼을 줄 수 있다. 사실상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가 없다. 죽은 자는 산 자를 위로할 수 없고, 거지는 부자를 위로할 수 없다. 지식이든 물질이든 지위이든 충분하고 풍성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위로라는 것은 말로 그치고 만다. 예수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고 풍성하신 분이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수고와 부담에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쉼을 줄 수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은 예수께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쉽게 인정하고,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쉽게 사랑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고통과 아픔을 헤아림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잘 헤아리는 법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신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아시는 예수께서는 사람의 수고와 부담을 꿰뚫어보신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아신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시는 분으로서 인간을 완전히 아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에 자신을 완전히 돕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다. 사람이 타인을 돕지 못하는 것도 그를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우리가 다른 사람과 상담하면서 늘 느끼는 일이다. 인간은 자신이나 타인의 문제의 근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해결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시는 분으로서 인간의 문제의 근본을 아시기 때문에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관계에 있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을 주실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초청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이다.


2) 나의 멍에를 메라 (29)
  둘째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멍에를 메라" (29).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수고와 부담을 없애기 위하여 예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것은 언뜻 보면 매우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냥 수고와 부담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멍에를 메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잘 생각해보면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휴식이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휴식이란 것은 종래 하던 것과 다른 것을 할 때 생긴다. 예를 들면, 노동을 하는 사람은 운동을 함으로써 피로를 푼다. 일터에서 벽돌과 목재를 나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집에서 아령과 역기를 드는 것은 언뜻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것이다. 힘든 일을 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이 다른 힘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축구선수들은 휴식하는 방법으로 격렬하게 족구를 하거나 수영이나 골프를 하는 것과 같다. 인생의 수고와 부담을 벗는 방식은 예수의 멍에와 짐을 지는 것이다. 인생의 짐을 벗는 좋은 길은 신앙의 짐을 지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멍에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30)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멍에가 쉽고 예수의 짐이 가벼운 이유는 그것들은 즐거움과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멍에는 즐거움을 주고 예수의 짐은 기쁨을 준다. 즐거운 일은 어렵지 않고 기쁜 일은 힘들지 않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수업의 일환으로 산에 오르면 몹시 힘들어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오르면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다. 수업은 귀찮은 일이지만 여행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의 멍에와 짐을 지라고 말씀하신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예수의 멍에와 짐을 지면 참 휴식이 주어진다.

3) 내게 배우라 (29)
  셋째로 예수께서는 사람들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로부터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내게 배우라" (29). 이 말씀도 역시 언뜻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쉬는 것과 배우는 것은 서로 반대가 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쉬는 것과 배우는 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그러나 참된 휴식을 얻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배움은 휴식을 준다. 왜냐하면 배움은 새로운 사실과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하기 때문이다. 배움은 신선함을 더해주고, 재미를 더해주고, 호기심을 더해준다. 배움은 환희를 일으킨다. 배움으로써 새로운 사실이 다가오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배움은 탄성을 자아낸다. 배움은 사람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고 신선하게 만들고 재미있게 만들고 열정적으로 만든다. 바로 여기에 휴식이 있다. 작은 지식에 매이지 않고 큰 지식을 얻을 때, 낡은 지식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접할 때 휴식이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아직도 세상에 지식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된다. 학습과 교육은 휴식을 준다.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휴식이 된다면, 예수로부터 배우는 것은 얼마나 큰 휴식이 되겠는가? 예수로부터 배우는 것은 참된 휴식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에게서 성경의 사실을 배우며, 영적인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세계를 배우며, 하나님 자신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과 인생에 휴식을 가져다 준다.
  특히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29)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가 있다. 이때 우리는 예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된다. 온유와 겸손을 습득하면 우리의 영혼에 참된 휴식이 주어진다. 사실상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동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온유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유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으면 절대로 휴식을 얻을 수가 없다. 온유하고 겸손할 때 참된 휴식을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휴식을 얻기 위하여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휴식(안식)의 신학이 있다. 휴식은 성경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통하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 중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29, 렘 6:16). 특히 휴식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수고와 부담으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누구도 인생이 수고와 슬픔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다. 인생은 수고와 부담으로 엮어져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수고와 부담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이기만 하고 결국은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일생을 마치고 만다. 우리 자신에게는 인생의 수고와 부담을 풀만한 해결책이 없다. 이렇게 일생동안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휴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외면적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나름대로 인생의 수고와 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문제거리이다. 아무도 스스로 인생의 수고와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인생의 수고와 부담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예수께서만 사람들에게 참된 휴식을 주시고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8), 사람들은 예수에게서만 참된 휴식을 발견한다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 29).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7).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신 분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는 분이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기에 충분하고 풍성하게 사람들에게 쉼을 줄 수 있다. 예수의 휴식은 그의 멍에를 메고 그의 교훈을 배울 때 극대화된다 (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