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2장,메시야의 오심과 다시오심

호리홀리 2015. 4. 28. 12:18

예수께서 메시아로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사도 요한은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한다(새번역, 요 1:11). 정작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전혀 없이 살고 있던 동방의 박사들은 하늘에 새롭게 뜬 별을 보고 ‘장차 유대인의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났음을 깨닫고 그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먼 길을 찾아 왔다(마 2:2). 그렇지만,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과 심지어 그가 태어날 장소까지 샅샅이 알고 있던 당대의 지성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가 태어난 사실에 대하여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마 2:3-8). 뿐만 아니라, 메시아 왕의 탄생을 축하하고 영접해야 할 당대의 왕이었던 헤롯은 메시아로 태어난 아이를 죽이기 위하여 참혹한 살육을 자행하였다(마 2:16-18).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의 대부분 예수를 배척하였으며,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대부분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로마의 총독 빌라도와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은 다 함께 손을 잡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행 4:27). 예수님을 삼 년간 열심히 따라 다니며 재정 책임까지 맡았던 가룟 유다는 그의 스승 예수를 적들에게 넘겨주는 데 앞장서기까지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평생 기도하던 시므온(눅 2:28-32)과 안나(눅 2:36-38)만이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았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 후에는 세례자 요한, 예수를 따르던 소수의 제자들만이 그를 메시아로 영접하였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산헤드린의 위원이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의 요셉같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최소한 예수를 스승과 의인으로 인정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 자신도 ‘메시아’라는 칭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공생애 중에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으며 죽은 자들을 살리기도 하였지만, 정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엄히 경고하였다’(마 1:43, 마 9:30). 그의 공생애가 거의 마무리 되어 갈 즈음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역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를 크게 칭찬하면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 16:20). 예수께서는 ‘메시아’(히브리어) 즉 ‘그리스도’(그리스어)라는 칭호는 최대한 피하려고 하였고, 그 대신 ‘인자’(the son of man)란 칭호를 주로 사용하셨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는 “구약성경은 구원의 시대를 도래하는 예언을 하고, 구원의 새 시대는 나사렛 예수의 강림으로 도래하였다”는 확신을 가지고 구약성경을 보았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개역개정, 행 3:24)고 말함으로써, 구약의 모든 메시아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되었음을 증거하였다. 그렇다면, 왜 구약성경에서 줄기차게 예언된 메시아가 왔을 때, 정작 그의 백성들은 그를 몰라보고, 메시아 자신도 메시아로서 그의 신분을 감추고자 했을까?

  이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실제적인 메시아의 모습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는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용사로서 왕이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고난 받는 종이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 왔을 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사로서의 메시아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는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무능한 메시아를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구약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메시아의 예언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통하고 있다. 메시아의 예언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낙원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이 구원의 소망으로 주신 ‘원시복음’으로부터 시작한다(창 3:15). 주님은 장차 ‘여인의 후손’이 태어나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구약성경이 끝나는 말라기의 마지막 예언도 메시아가 와서 인류의 근원적인 갈등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예언으로 마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 4:5-6상).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은 두 개의 중심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한 축은 왕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신적 메시아이며, 다른 한 축은 고난 받는 종으로서 인간적인 메시아이다. 전자는 일반적인 메시아 사상으로서 “이 시대의 끝인 마지막 시대에 강한 구속자가 자신의 능력과 성령의 감동으로 정치적이고 영적인 구속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가져오고, 이와 함께 온 인류에게 땅의 회복과 도덕적인 완성을 가져올 것에 대한 예언적 소망”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새롭고 전혀 다른 성격의 미래가 임하는 마지막 때에 영광의 왕이 도래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메시아 사상의 뿌리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에 있었다(삼하 7:1-14). 이 본문에서 장차 하나님께서 세우실 메시아는 새로운 다윗으로서 선택된 자(삼하 7:8),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삼하 7:9), 지극히 높은 이름을 가진 자(삼하 7:9하, 빌 2:9-11 참조),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는 자(삼하 7:10-11상), 주님의 아들(삼하 7:14), 성전(즉 교회)을 짓는 자(삼하 7:13), 새 왕조인 하나님 나라의 창시자(삼하 7:11하; 16), 영원한 왕(삼하 7:13)으로 소개된다. 바로 이 메시아 사상과 신앙의 모판(-板)에서 장차 올 다윗 왕은 시편 2편에서 ‘거룩한 산 시온’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세움을 받으며(6절),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고’(7절), ‘열방을 유업으로 받으며, 그의 소유는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시편 72편에서 장차 올 메시아 왕은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고(1-4절), ‘벤 풀 위에 내리는 단비’처럼 온 세상에 ‘평강의 풍성함을 가져오며(5-7절), 그의 통치는 땅 끝까지 이르게 되어 ’스바와 시바의 왕들이 그에게 조공을 바치게 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8-15절). 시편 89편에서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 선택된 자, 주의 종,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 지극히 높은 자로 등장하고 있다. 시편 110편에서 그는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은 분’이며(1절), ‘시온에서 권능의 홀’을 물려 받고(2절), 장차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4절)으로서 ‘열국을 정복할 자’(6절)로 그려지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주전 8세기에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과 유다가 앗시리아의 위협을 받을 때, 가장 많이 나온다. 그 중 이사야는 선지자들 가운데 메시아 예언을 가장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한 자이다. 그는 유다가 시리아-에브라임의 연합군에 의하여 예루살렘까지 포위되는 정황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사 7:14). 그 아들은 바로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 될 사람이었다(사 9:6). 이사야 선지자는 물론 다윗의 집안에 위기가 있을 것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실 것”을 바라보았다(사 11:1-2). 구약성경에서 다윗은 단지 역사적인 왕으로 표상화되지 않았다. 성경 저자의 마음 속에 있는 다윗은 미래의 다윗이었다. 다윗 왕조가 망했을 때에도, 백성들은 장차 올 구원의 시대를 열어줄 새 다윗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단지 영광스러운 신적인 메시아 왕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진정한 인간성을 가진 자였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다”(사 42:2-3). 이사야는 구약의 메시아 예언 가운데 고난받는 주의 종을 가장 깊이 드러내었다. 그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라는 수사의문을 던졌다. 즉, 그가 전한 메시아의 예언을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기” 때문이다(사 53:2-4). 그가 바라 본 주님의 종은 아무런 죄도 없지만,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건제물’이 된 분이었다(사 53:10). 시편의 저자들도 메시아 왕이 아무런 죄가 없지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 받으며 죽음을 당할 것을 바라보았다(시 22편). 시편 89편의 시인도 메시아 왕이 그의 왕관과 보좌가 내동댕이침을 당하며(39, 44절), ‘젊은 날에 죽임을 당하고’(45절),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한 언약이 무효가 된 것 같은 경험을 할 것을 바라보았다. 118편의 기자도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22-23절)라고 말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영광스러운 왕의 도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커지고,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역할은 잊혀졌다. 이리하여 예수님 당시 로마의 압제 아래에 살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고난 받는 메시아상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의식적으로도 완전히 지워버렸다.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누누이 가르쳐도 제자들은 믿을 수 없어 하였다. 이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책망이 섞인 말씀을 하셨다(눅 24:25-27).

  예수께서 어느 날 그의 제자들에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물으셨다(눅 18:8).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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