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11:1-9,바벨탑

호리홀리 2015. 4. 28. 12:03

바벨탑 (11:1-9)

바벨탑 기사는 족보를 다루는 창세기 10, 11장에서 셈의 두 계통 사이에 놓여 있다. 즉, 이 이야기는 (1)셈으로부터(10:22) 에벨(10:24)과 욕단(10:26-29)으로 이어지는 한 계통과 (2)셈으로부터(11:10) 에벨을 거쳐(11:14) 데라로 이어지는 두번째 계통(11:25) 사이에 나타난다. 현재의 위치에서 바벨론 건설 기사는 욕단으로부터 14대 끝에 놓여있다(10:26-29). 그렇지만 벨렉의 계통에서는 10번째 끝에 아브람의 부름이 나온다(11:27-12:3). 따라서 셈의 후손들은 에벨의 두 아들에 의해 두 계통으로 나누어지며(10:25) 하나는 바벨론에 다른 하나는 약속의 땅에 자리잡는다.

바벨탑 이야기는 짧지만 아름다운 시처럼 핵심단어들을 반복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게 대칭을 이루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들을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름"(shem)이 중심 역할을 한다. 건축가들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shamayim)에 이르는" 성과 탑을 쌓는다(11:4). 그러나 이름을 내려고 한 "거기서"(sham) 흩어진다(2, 8절). 그들은 도시의 이름을 "바벨"(babel) 즉, "하나님의 대문"(Akk. bab'el)이라고 지었지만, 그 이름은 그들의 언어가 "혼돈"(balal)에 빠진 것과 이어진다(11:9). 인간들은 "벽돌을 만들어"(nlb) "모여 살자"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을 혼잡케 하여"(nbl) "흩어버리자"고 하신다.


우리는 바벨탑 건축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배우게 된다.
첫째, 노아의 후손들은 이제 바벨론의 고대 명칭인 시날로 왔다(11:2). 이곳은 약속의 땅 동쪽에 있다. 건축가들은 "동쪽"으로 가서 도시를 세웠다(11:2).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동쪽"으로 가서 집을 세웠고, 가인도 "에덴의 동쪽"에 거하였다. 롯도 "동쪽"으로 갔다. 그러나 동쪽으로 간 사람들마다 모두 바벨론과 소돔을 세우는 것처럼 헛된 일을 하고 만다. 창세기 저자는 "생명"과 "번영"을 찾기 위해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복을 떠나고 있음을 말한다.
둘째, 인간들은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성을 쌓는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사람들은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벽돌"과 "역청"으로 도시와 망대를 쌓아 하나됨을 드러내고 싶었다. 만약 바벨탑의 배경이 가나안 땅이었다면 그들은 돌과 회반죽(mortar)으로 건물을 만들었을 것이다(11:3). 그들이 만든 "성"과 "대"는 전문적으로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한다. 이것은 피라미드처럼 삼각형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꼭대기에 오르게 하며 그 위에는 조그만 사당을 갖추고 있다. 예배자들은 외부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그들은 신들이 이 사당에 내려와 그들을 잠깐동안 만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야곱이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28:12)를 본 것은 "하늘에 닿는 탑"(11:4)과 유사하다. 고대의 사람들이 하늘을 찌르는 종교적인 건물을 세운 것은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높은 성을 짓고 그 안에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에서 세우시고자 하는 통일성과 다르다.
셋째, 인간들은 "흩어짐"을 두려워한다(11:4).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흩어지지 않고, 자기 자신의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성과 탑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흩으시는 사역을 거부하는 자율적인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성곽심리"(fortress mentality)라고 한다(브루거만 100). 자기 자원으로서만 생존하고자 한다. 그것은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넷째,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명성을 위해 하늘을 찌르는 성을 세우는 자들"을 심판하신다(5절). 이 절은 마치 노아 홍수 기사에서 8:1처럼, 모든 이야기를 돌려주는 고리 기능을 한다. "이 절 앞에는 오직 인간의 행동 만 나타나며, 뒤에는 하나님의 행동만 나타난다. 항상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말씀하신다"(Youngblood 126). 바벨탑 이야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탑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나빠서 하나님은 갑자기 심판하시는가? 여기에서 실마리는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그들의 말에 있다. 즉 탑이 너무 높기 때문에, 뭔가 공격적인 느낌을 준다. 유대문헌에서는 이 점이 다양하게 해석된다.

우리 모두 그곳에서 하늘로 올라가자"(주빌리 10:19).

그들[탑을 세우는 자들]은 송곳을 가지고 하늘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진흙이나, 놋쇠나 철 중 어떤 것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살펴보자.'(바룩 3서 3:7-8).


우리가 탑을 만들어 궁창에 올라가 그 물이 쏟아질 때까지 도끼로 찍어보자(b. Sanhedrin 109a).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전쟁으로 보았다.

[천사가 바룩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하나님과 전쟁하려고 탑을 세운 자들이며, 주께서 그들을 제거하셨다(바룩 3서 2:7).

현대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영웅주의적 거인주의, 문화적 낙관주의, 과학적 낙관주의 이데올로기"를 찾는다. 바벨탑은 "고대의 대성당"(cathedral of antiquity; Parrot)이라기 보다 인간 교만의 상징이었으며, 인간의 제국이 추구하는 교만과 자족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들이 하는 것을 확인하시고 심판하신다.
다섯째, 이 도시는 "온 지면에 흩어짐"(parats)을 피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parats)"(11:8). 이 사실은 결론에서 두 번이나 반복된다(11:8-9). 이것은 두 의지와 계획의 대립과 싸움을 보여준다. 바벨탑을 쌓기 전에 "온 땅"의 구음은 하나였고, 언어도 하나였다(11:1). 그러나 주님은 그들은 "온 땅에" 흩어버렸다(11:8). 바벨탑을 쌓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1:28)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 문화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왕국을 구축할 때, 결국 의사소통이 깨어지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여섯째, 언어 혼잡의 모티프는 후에 스바냐 3:9-11에서 "주님께서 뭇 나라의 언어들을 정화시키시고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며 그의 성산에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으로 재해석된다. 이리하여 선지자는 바벨탑으로 흩어진 인간의 언어와 사상을 새롭게 회복하는 것을 바라본다. 이 스바냐의 예언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진다(행 2:8-21).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의 언어는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참으로 이해하고 한 마음 한 뜻을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셈의 후예(11:10-26)

셈의 후예는 다른 "후예들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 짧지만, 창세기의 고대사에서 여섯 번째 주된 단락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정확하게 10명이 등장한다. 5장에서 유명한 인물들인 "아담"으로 시작하여 "노아"로 마치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셈으로 시작하여 아브람으로 마친다.
10장에서 인류는 "번성하여" 70나라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바벨탑을 짓다가 흩어졌다(11:1-9). 이제 셈의 후손들이 길게 소개되며(11:10-29),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부름으로 넘어간다(12:1-3). 즉 전자는 "모든 나라들을 돌보시고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후자는 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