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4:9-16,심판

호리홀리 2015. 4. 28. 10:24

 심판(4:9-16)



   이 본문은 재판형식을 보여 준다. 창세기 3장에 있는 아담과 하와의 소송과 유사하다. 하나님은 사실을 직접 확인하시고(4:9-10절), 언도하시며(11-12절), 피고의 하소연을 듣고 감형하시며,  추방하신다(16절). 3장과 4장의구조적 유사성


   1) 심문과 반문(4:9-10)


   앞 절에서 가인이 자기 동생에게 말했으나(8절), 이제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다(9절). 3장에서와 같이 주님께서 범죄한 자를 심판하기 위해 찾아오시고 범행사실을 확인하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는 주님의 질문은 통렬하다. 이것은 앞장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과 같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도망치고 있었다. 그가 아벨의 시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찾아 오시고 물으신다. 아무도 본 자가 없으나 주님은 아시고 물으신다(신 21:1).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며 반문한다. 가인의 마음 속에 아벨을 향한 가시와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내 아우를 지키는 분은 당신이지 어째서 저입니까?"

   왜 가인은 "그의 형제 아벨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가?" 형제는 그 형제가 어디에 있는지 가장 잘 안다. 두 형제는 사랑하든 미워하든 서로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그러나 가인은 "나는 알 바 없어요"라면서 하나님께 대든다.

   나아가 가인은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신성 모독적인 농담"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지키다"는 동사가 놀랍다. 이 동사는 주로 목자가 양을 지킬 때 사용된다. 즉, "아벨이 나에게 무엇입니까? 내가 그를 양처럼 지키는 자입니까?"(문자적 번역).



   2) 언도(4:11-12)



   이제 주님은 가인에게 판결을 선언하신다. 먼저 땅이 무죄한 자의 피를 마셨기 때문에, 생명력을 더 발휘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더 이상 좋은 농산품을 낼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11-12절 상). 죄의 결과로 인간의 노동이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땅은 아무 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죄에 있어서 너와 땅이 파트너가 되었기 때문에 심판도 너와 같이 받을 것이다. 땅과 사회정의는 밀접하게 연관된다. 의가 넘치면 땅도 생명력을 드러내며, 죄가 깊어지면 땅도 피폐해진다(시편 72:3, 16).

   또한 가인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 이 표현은 가인이 방랑하는 목자가 될 것이란 뜻은 아니다. 목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유리하는 자"가 아니다. 가인이 받은 저주는 자신의 가정과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것이다(시 109:9-10). 그가 받은 저주는 그의 후손에게까지 미친다.

   가인이 받을 심판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과 유사하다(신28:16-19 참조). 가인에 대한 주님의 심판은 후대에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에 대한 은유가 된다(사 26:21). 그들은 가인처럼 "방랑하며"(암 9:9), 이방 나라에서 유리할 것이다(사 27:1-5).

   우리는 이 기사를 읽으며, 왜 형제를 죽인 가인에게 사형을 언도하지 않는지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사형제도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기존해 있는 악의 세계를 청산하는 것 뿐 아니라, 범죄를 예방하는 목적이 있다. 이 순간 가인을 죽여 살인자의 죽음으로 교훈을 삼을 자가 아직 세상에는 없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에게 유배를 선언하신다.



   3) 감형과 보호장치(4:13-15; 3:21 참조)



   13-15절 사이에는 가해자와 재판장 사이에 중요한 대화가 오고간다. 주님은 가인에게 유배형을 처하셨고 가인은 불모지에서 살아야 했다(11-12절). 그러나 가인은 자비를 구한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는 가인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13절) 이것은 가인의 불평인가, 애통인가, 혹은 자신의 "죄"에 대한 후회인가?

   여기에서 "죄벌"('awon)이란 단어는 주로 "죄악"으로 번역되며, 이것의 어근('awa)은 기본적으로 (1)"굽히다", "비틀다" 혹은 (2)"잘못하다", "잘못가다"는 두개의 서로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의미는 인격이 왜곡되고 비뚤어진 것을 뜻한다(distortion). 둘째는 "잘못 간 것"으로서, 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을 뜻한다(perversion). 전자는 왜곡된 성격에서 나온 비정상적인 행동을 뜻하고, 후자는 바른 길을 떠나, 전도되고, 뒤집어지고, 도착된 상태를 보여준다. 이 단어를 "죄벌"로 번역할 때에는 "죄"와 "벌"을 포함하는 사건을 묘사한다.

   따라서 가인의 고백은 "내 죄가 너무 큽니다"로 볼 수도 있다. 루터는 "내 죄는 용서받기에 너무나 큽니다"로 해석하였다 (M. Luther; H. Schultz, A. Dillmann 등). 혹은 "내 벌이 너무 큽니다"라는 뜻도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가인은 불평하고 있다.

   가인은 이제 후회와 죄책감으로 가득 찬다. 그는 자신의 죄의 무서운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쫓김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끝없는 방랑과 노동의 저주를 느낀다. 그는 땅 위에서 "도망자, 방랑자"가 된다. 그는 "길 없는 길"과 "끝 없는 길"을 걷는다. 목적이 없고 근심에 사로잡힌 방랑 생활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의 죽음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더 이상 공동체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14절).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에서 보듯 그는 살해될까 봐 두려워한다.

   이 구절은 가인 시대에 이미 아담, 하와, 가인 외에 인간들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들은 누구며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어서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4:17)를 읽을 때, "도대체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구했는가?"는 질문을 던진다.

   사실 어거스틴도 이 구절에서 아주 큰 어려움을 느꼈다(신국론 XV, viii). 비평학자들은 이미 가인과 아벨 시대에 인구가 많았거나, 혹은 더 원시적인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5:4)는 말씀에 근거하여, 가인은 자기의 여동생과 결혼하였으며, 그가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한 공포는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영국의 보수주의 학자인 데렉 키드너(Kidner 29-30)는 이 난제를 다루며 우리의 전제에 문제가 있을 것을 비추면서, "아담 안에서의 인간의 통일성은 유전적인 것이 아니고, 연대성에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카수토의 입장이 더 흥미롭다.

   "가인은 모든 인류가 그를 죽일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모든 인류가 그에게 피의 복수자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가 살해한 동생이 첫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살해된 자의 가족만 오직 피의 복수를 생각한다. 어떤 외인들이 복수를 하는가?"(Cassuto 194).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인은 장차 태어날 아담 집안의 식구들이 그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죽은 자의 피가 헛되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 아니듯이(10절), 여기에서 살인자의 방어적 애통도 헛되지 않음이 나타난다. 가인의 고백이 참된 회개는 아니지만(14절), 그래도 주님은 그에게 자비와 보호를 약속하신다(15절).

   "그렇지 않다"로 주님의 말씀이 시작된다. 이것은 앞의 저주를 모두 철회하는 것이 아니다. 가인은 도망자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의 생명은 보장된다.

   "저주받은 가인"과 "보호받는 가인"의 모습 사이에는 갈등이 없다. 가인은 쫓겨난 자이나 보호받는 자이다. 가인은 법익을 박탈당한 자(outlaw)이나, 법의 보호를 받는다. 특히 여기에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에서 "벌을 받다"(naqam)라는 용어는 "법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창 4:24; 출21:21).

   가인을 죽이는 자가 벌을 칠배나 받을 것이라는 것은 비록 살인자라 할찌라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도록 하여, 피의 보복을 금지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가인은 형제를 죽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나,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판결을 집행할 권리는 없으며 그의 인권을 유린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칠배"는 완전수로서 "완전한 잣대로" 혹은 "가장 엄격한 벌로서"라는 뜻이다(창 4:24; 레 26:18, 21, 28; 시 79:12; 잠 6:31). 주님은 사람들이 가인을 함부로 해치지 못하게 그에게 "표"를 주신다(15절). 본문은 이 표가 무엇인지 명시하지 않는다. 가인이 받은 "표"는 종족 표시(B. Stade)나 일반적으로 보호하는 표식이 아니라, 살인자를 돌보는 법적인 규례와 연관된 것 같다. 따라서 이 표는 피의 복수자로부터 보호받는 표이다. "가인에게" 혹은 "가인을 위하여" 주어진 표는 "그의 몸에 찍힌 표"가 아니다. 이 본문은 후에 나오는 도피성 기사와 여러모로 유사하다(민 35:9-34). 하나님은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를 정당한 재판을 받기까지 피의 복수자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도피성"을 만들어 주신다. 도피성의 기본적인 목적은 고발당한 자가 피의 보복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님은 가인에게 도피성을 허락해 주신다.



   4) 추방(4:16; 창 3:23, 24 참조)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16절)에서 "놋 땅"은 "놋"이라는 이름의 땅일 수 있고, 혹은 은유적으로 "방랑의 땅"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는 이곳 저곳으로 계속 옮겨다니며 살게된다.
   가인은 "에덴의 동쪽" 놋 땅으로 떠난다. "표"에 대한 이야기 바로 다음에 "도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흥미롭다. 가인의 도시는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는 "표시"였다. 이것은 도피성의 목적과 일치한다(민 35:12). 가인의 도시는 "살인자"를 위한 도피처였다. 이곳에서 그와 그의 후손이 산다(신 19:11-13 보라). 



      창세기 저자는 바로 앞장에서는 에덴 동산에서의 하나님과 사람의 갈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첫 남녀는 완전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데 실패하였다.

   이제는 형제끼리 사는 데 실패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전자는 수직적인 관계의 위기라면, 후자는 수평적 관계의 위기를 보여준다. 인간들은 영원히 이 두 관계의 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창세기 3-4장의 이야기는 단지 옛날 옛적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이 이야기가 된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모든 형제들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어떻게 가장 가까운 형제가 가장 미운 자가 될 수 있을까? 같은 모태에서 나오며, 같은 젖을 빨고,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집에서 자란 자들끼리 서로를 질시하며 죽이기까지 할 수 있는가? 같은 종교를 가지고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같은 제단에서 헌신을 하는 형제들끼리 깊은 반목과 대립의 구도를 만들고 강자가 약자를 죽이는 극단적인 자리까지 나아가고 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제와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으며, 형제와 함께하는 공간과 시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음을 말해준다. 창세기 4장의 이야기는 형제 사이의 경쟁과 반목의 위기를 우리에게 가슴 아프게 말해준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분노와 좌절감을 버리고 극복해야 한다. 형제에게 상처를 준 짐은 우리가 지고가기에 너무나 무겁다(창 4:1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4-25). 우리 주님은 형제 사이의 화해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셨다. 그는 우리 속에 있는 가인을 구속하실 능력을 갖고 계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화답하길 기다리신다(엡 2:16, 골 1:20). 우리는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을 보며,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주님은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다."그 후에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첫 의인을 아벨로 꼽으면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11:4)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