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2:18-25,최초의 가정

호리홀리 2015. 4. 28. 11:35

최초의 가정(창2:18-25)


   1) "독처하는 것은 선하지 않다"(2:18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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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는 창세기 1장이 배경에서 볼 때, 아주 역설적이다. 주님은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창 1:31). 그러나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 못하다"고 평가하신다. 마치 자신의 창조에 결함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이리하여 주님은 남자를 위해 여자를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다. 남녀가 어우러져 더불어 살며,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주님은 결혼 제도를 세우시기로 결심하신다.



   2) 돕는 배필(2:18 하)



   "돕는 배필"('ezer kenegdo)이라는 말은 현대어 번역에서 "도우는 자"(a helper; RSV), "배필"(a helpmate; JB), "적절한 도움"(a fitting helper; New Jewish V), "그에게 적합한 도움"(an aid fit for him; AB), "돕는 사람, 곧 그의 짝"(표준새번역) 등으로 번역된다. 우리말 번역의 "돕는 배필"은 독자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마치 여자가 남자의 "조수" 혹은 "시녀" 같은 느낌을 시사할 수 있다. 사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돕는 배필"이라는 번역에 근거하여 남성우월론과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성의 여성 지배론을 정당화 시켰다( Calvin, Genesis 129). 따라서 우리는 "도우는 자"('ezer)와 "그 맞은 편에 있는"(kenegdo)이란 두 용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먼저 "도우는 자"('ezer)는 우리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종속적인 개념을 내포한 듯이 보이나,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돕는 자"는 "도움을 받는 자" 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나타나므로, 종속과 열등의 개념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용어는 구약성경에서 약 21번 나타나는데 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며(출 18:4; 신 33:29; 시 20:2; 121:1, 2; 124:8; 89:19 등), 세 번에 걸쳐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것도 강자가 약자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는데 사용되고 있다.1) 따라서 이 단어는 "구원자"란 뜻으로 사용될 수 있다.2)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근원적인 고독을 풀어줄 존재를 만들려고 하지, 그의 구원자를 만들려고 하지 않으므로 "구원자"라는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도우다"(히, 'azar)는 동사는 "건지다"( to rescue), "구원하다"(to save)는 뜻 뿐 아니라, "강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페니키아어 가자르, gzr, "강한").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돕는 자" 뿐 아니라, "힘센 자", 혹은 "강한 자"로도 번역할 수 있다.3) 만약 이런 뜻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아담의 배필로서 동물과는 다른 "강한 자"를 만들려고 하신다. 사실 하와는 강한 자이며, 강한 여자는 아름답다(잠 31:10-21).

   두번째로, "그 맞은 편에 있는"(kenegedo)이라는 용어를 직역하면 "그를 마주 보는"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꼭 같은 자"는 아니지만, "동등하고, 어울리는 자"(BDB 617)로서 "그에게 적합한 자" 혹은 "그에게 적절한 자"를 뜻한다. 특히 미쉬나 히브리어에서 "앞에 있는 것 같은"(keneged)은 "동등한"이란 뜻을 가진다.

   "토라 연구는 다른 모든 계명에 동등하다(keneged)".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여자는 "남자 앞에 있는 동등한 강자"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혼자 있지 않고, "그와 동등한 강자"와 함께 살도록 하셨다. 여자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동역자(partner)이다. 그들은 서로가 동등한 인격과 힘을 가진자로서 서로에게 힘이 되도록 지음받는다. 남녀는 땅을 다스리는 사역을 함께 하는 동료이며 동역자이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는 개념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남녀 간의 상호 의존성이 명백히 나타난다. 그들은 다른 인격이나 동등하며, 다르지만 상호 보충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어진다.

   "남녀는 서로를 동등하게 받아야 하며, 그들의 차이는 모든 삶의 영역과 일에서 상호 보충적이어야 한다"(Jewett). 비록 남녀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나, 달리 만들어졌으므로 서로를 보충하고 완성해야 한다.



   3)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2:23)



   하나님께서 중매자로서 그 앞으로 인도하시는 하와를 보는 순간 아담은 탄성을 지른다. 그는 성경의 첫 시로서 자신의 흥분과 감격을 드러내고 있다. "드디어 이 자는 나의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와는 문자적으로 아담의 뼈와 살로 창조된다. 그러나 숙어로서 "뼈와 살"은 친인척 관계를 표시하는 구절로서 "아주 가까운 친척"을 뜻한다. 라반은 그의 조카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나의 뼈요 나의 살"(개역, "골육")이라고 말한다(창29:14). 우리는 가족관계에서 "핏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구약의 히브리인들은 "뼈와 살"을 중요시 한다.

   창세기 2:23의 문맥을 살펴 보면, 인간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인간과 골육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며, 오직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골육관계가 이루어진다. 이런 사상적 배경 때문에 후에 레위기에서는 짐승과의 교합을 가장 가증하게 여긴다. 창세기 2:23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란 최상급을 사용하여 부부관계는 인간관계 중 가장 가깝고 친밀하고 지속적임을 강조해 준다.

   또한 "뼈와 살"은 언약체결을 통해 이루어진 상호 연대성을 말할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삼하 5:1). 이스라엘 다른 지파와 다윗 사이에는 친인척의 관계가 없었지만, 언약체결을 통해 그들은 다윗에게 항구적인 충성을 맹세하며 "골육관계"를 형성한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 임을 생각하라"고 말한다(삿 9:1-2). 그 때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고 응답하였다. 여기에서는 실제적인 혈연을 말하는 것 같지만, 문맥은 정치적, 공동체적 연대성을 통해 권력을 나누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언약을 통해 서로에게 "골육지친"이 된다. 이 세상의 여러 언약 중에서 결혼은 가장 근원적인 언약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살"과 "뼈"는 한 쌍의 단어로서, 인간의 "약함"과 "강함"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Bruggemann 532쪽). 욥기 2:5에서 사단은 하나님을 충동질하여 욥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뼈"와 "살"은 욥의 가장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을 총체적으로 말해주는 합성어이다. 바로 앞 절에서는 "사람이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고 말한다. "가죽" 혹은 "살갗"은 역사적 신체적 실존으로서 가장 민감하고 어려운 상황을 가리킨다. 이리하여 살의 약함과 뼈의 강함이 대조를 이룬다. "이 두 단어가 한 쌍으로 나타날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뜻을 시사한다. 모든 심리적-신체적인 차원을 다 포함한다"(Bruggemann 532쪽).4) 따라서 결혼식에서 우리는 "부할 때에나 가난할 때에나, 건강할 때에나 병들 때나"서로 사랑하기로 서약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사랑할 것"을 서약한다.



   정리하면, "뼈와 살"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에서 나왔으나, 결혼으로 아담의 "뼈"와 "살"이 된다. 즉 그들은 결혼으로 언약을 맺고, 같은 관심을 가지며 충성과 책임을 함께 나누어질 것이다. 부부는 언약의 파트너(당사자)로서 자발적인 헌신을 통해 책임을 함께 지는 사랑과 우애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한다. 이 한 쌍은 삶의 모든 상황에서 반려자가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신랑과 신부와 같은 연대성과 충성심과 책임을 서로에게 진다고 말한다(엡 5:21-33).



   4)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24절)



   여기에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떠나 이제 결혼이 모든 인류를 위한 창조질서로 제도화된다. 결혼관계는 "떠남"과 "연합"으로 이루어진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에서 "떠나다"는 원래 "버린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아시아의 사회에서 남자가 결혼으로 부모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부모 집을 떠나 남편 집안으로 들어왔으므로, "버리다"는 단어가 충격적이다. 먼저 문법적으로 보면, 여기에서 "버리다"는 당위성을 말하지 않는다.5) 이 표현은 보다 중립적이다. 히브리어의 미완료는 허용적으로 사용되므로, "자기 부모를 떠나야만 한다"라기 보다, "떠나서"로 보아야 한다. 또한 여기에서 "버리다"는 말은 상대적인 의미로서(호 6:6; 눅 16:26), 결혼으로 신랑과 신부는 삶과 헌신에 있어서 우선권에 변화가 생김을 말해준다. 결혼 전에는 부모에게, 결혼 후에는 부부 상호에게 우선권이 있어야 한다.

   "떠나다"는 "연합하다"(dabaq)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연합은 상호간의 사랑을 전제한다. 이 연합은 정략적이거나 이기적인 동기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신을 주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부부 사이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밀착성이 "연합"을 통해 표현된다. 이들의 연합은 거룩하고 완전했기 때문에, 바울은 후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절한 모델로 사용하였다. 아담과 하와의 연합은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바로 "나"와 "당신"의 인격적인 관계였다.

   이 둘은 "한 몸"을 이룬다. "한 몸"은 남자와 여자가 한 "뼈와 살" 임을 보충하고 해석한다. "둘이 한 몸이 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육체적인 결합을 뜻한다"(김중기 108)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한 몸"은 "성적 관계의 아름다움과 일상생활에서 나눌 수 있는 모든 육체적 관계"를 뜻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몸"은 단지 신체적 연합이 아니라, 결혼 관계의 모든 풍부한 친밀성을 말한다. "한 몸"은 신체적이며, 정서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다 포함하는 전인적인 연대성을 말한다. 나아가 "버리다"와 "연합하다"는 언약개념이므로 "한 몸" 역시 언약의 완성을 시사해준다. 사람들이 언약을 맺을 때, 이전 관계를 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듯이(레 18:20; 신 24:1-4), 결혼으로 새 공동체를 이룬다.

   또한 "한 몸"은 결혼이란 사회적 기관임을 시사한다. 복음서도 이런 관점에서 결혼을 해석한다(마 19:1-6; 고전 6:15-20; 엡 5:31). 따라서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단지 협소한 의미에서 "부부의 관계"로 끝난다는 뜻이 아니다.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자녀를 낳아 집안을 이루며, 더 큰 가족을 형성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한 몸"은 단지 신체적 연합 뿐 아니라 정신적 연합을 말하며, 부부의 연합 뿐 아니라 그들이 생산하는 후손까지 다 포함하는 더 넓은 사회적 연대성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