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4:3-8,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

호리홀리 2015. 4. 28. 10:13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4:3-8)



   
두 형제는 차별적인 성장과정을 겪으며 자라던 중,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나올 기회가 생겼다. 이제 이들은 다 성인이 되었고 각자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하와는 자신의 장자인 가인을 종교적인 인물로 교육하는 데도 성공한 것 같다. 가인은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3절). 그는 "땅의 소산" 즉, "땅에서 거둔 곡식"(표준새번역)을 주님께 가지고 나온다. 여기에서 "가져오다"는 제의적 용어로서 "제물을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이다(레 2:2, 9). 그는 높으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제물을 드리고 있다(창 32:13참조).

   궁켈은 가인이 "분명히 최고의 것"을 바쳤다고 보나, 랍비들(Bereshit Rabba 22:5)은 "가장 저급한 질의 곡식"을 가져왔다고 본다. 이 두 해석은 다 잘못 되었다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제물로 가져온 것이다. 성경은 가인 제물의 질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벨은 목동으로서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온다. 그러나 저자는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4절 상)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제물이 가인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벨은 "첫 것"을 가져오며, 동물 제사에서는 가장 좋은 "기름"을 가져온다. 이 기름은 불태워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아벨은 최선의 제물을 주님께 바치고 있다. 그는 "첫 것"의 종교성에 관심을 가지나, 가인은 무관심하다. 이런 대조적 관점에서 본다면, 아벨은 주님께 뜻과 성품을 다 바치고 있지만 가인은 단지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고 한다. 주님은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물"을 동시에 받으신다. "열납하다"는 "쳐다보다, 세심히 보다"(Akk, seu, "look closely into")라는 뜻으로서 "호의를 가지고 가납하다"는 뜻이다(서인석 119). 아벨에게 있어서는 그의 삶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종교 기술자가 아니었고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며(롬 12:1), "신령과 진정으로"(요 4:23) 예배하는 자였다.

   그러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 (창 4:5)라는 본문에서 보듯 가인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신의 제물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위 "장자 신학"의 신봉자로서, 하나님께서 장자를 사랑하시므로 장자가 하는 모든 것을 다 인정해 주실 줄로 믿었다. 그는 자신이 "피리를 불면 하나님은 당연히 춤을 추도록 되어 있다"고 믿었다(틸리케 194).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지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모든 헌신을 아끼지 않는 자기 "어머니"와 같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두 형제의 제물에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셨을까? 오래된 옛 번역을 보면 (데오도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아벨의 제물을 삼켰으나 가인의 것은 태우지 않았다"(enepurisen)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가인의 좌절감은 더욱 깊어진다.

   그는 자신의 제사 향기가 뭉개 구름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을 때, 아벨의 것은 땅바닥에 자욱하게 깔리기를 기대했는데 그 결과는 반대였다. 카수토는 좀더 자연스러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후에 주님께서 아벨의 양떼에는 복을 내리시고, 가인의 들판에는 내리지 않았다". 인간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에도 자기 형제와 경쟁한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거절된 것을 알고 화를 심하게 낸다. 분노는 가끔 살인의 전조이다(창 34:7; 삼상 18:8). 그는 하나님(4:4 하)과 동생(4:8)에 대해 동시에 분노하고 있다. 적개심이 그의 속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난다. 또한 그의 "안색이 변한다"(창 4:5). 원어는 "그의 얼굴이 떨어지다"라는 뜻이다(욥 29:24; 렘 3:12). 그는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상하여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는 시무룩해지며, 사기가 저하된 모습을 드러낸다. 가인은 한번도 상상조차 못해본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그는 한번도 아벨이 자신을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한 순간에 아벨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으며, 자신이 거절되는 것을 느끼자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는 평소 아벨을 인정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동생이 조금만 우월해져도 견디지 못하고 증오심을 드러낸다. 동생의 우월성 때문에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가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형제에 대한 우월감으로 자존심을 달래며 살다가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높일 때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좌절감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분노하고 좌절하는 가인을 구속하시고자 하신다. 



   1. 하나님의 책망(6-7절)

  

     "너희는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다"(요일 3:12)고 말하는 신약의 빛 속에서 우리는 늘 가인을 보기 때문에 이 절에서 주님께서 가인을 호되게 꾸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주님은 범죄자조차도 감형하시고 구원의 길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시므로, 가인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아버지의 권면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내 아들아 너가 지금 슬퍼하고 낙담할 이유가 없다. 너에게 새로운 제사의 기회가 있을 수 있지 않니?"

   주님은 이와 동시에 강력하게 가인에게 호소하신다. "너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왜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주님은 세 번이나 "너는 왜?"라고 물으신다. "너가 분노할 이유는 없다. 너 자신과 너의 신앙을 먼저 살피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

   이어서 주님은 두개의 가정절을 제시하신다. "네가 선을 행하면…네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가인은 기로에 서있다. 비록 사람이 타락했지만(3장), 그는 여전히 선악을 선택할 수 있다. 주님은 가인에게 "선을 선택하라"고 권하신다. 만약 선을 행하면, 그는 "들 것이다"에서 원문에는 목적어가 없다. 개역은 "얼굴을 들다"로 해석한다. "낯을 든다"(nasa' panim)는 바로 앞 절의 "낯을 떨어뜨린다"(napal panim)와 대조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가인의 태도에 달렸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가 선을 택하면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악을 택하면 다른 운명이 기다릴 것이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에서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영상은 너무나 강렬하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에서 "엎드린다"가 고대 앗시리아의 문턱 귀신(doorstep demons)에 대한 토속신앙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Duhm, Speiser). 그렇지만 이 영상은 창세기 4장에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도 죄를 이렇게 귀신화 시키지 않고 있으며, 문턱 귀신이 문 앞에 기다린다는 개념은 구약의 가르침에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창세기 49:9에 따르면, 유다 지파는 "그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엎드림"은 먹이를 노리는 동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만약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을 때, 죄가 야생동물처럼 가인 자신을 먹이로 노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는 가인의 "문" 앞에 잠복하고 있다. 그가 평소 들어가고 나가는 문이다. 가인을 삼키기 위해 잠복하고 있는 죄의 그림은 너무나 생생하다. 죄는 배고픈 사자처럼 언제든지 가인을 덮칠 준비가 되어 있다(렘 5:6). "죄는 단지 법칙을 깨는 것이 아니다. 죄는 가인을 덮치기 위해 매복해 있다. 죄는 가인보다 더 큰 자이며 그의 목숨을 자기 것으로 취하고자 한다(롬 7:17참조). 죄는 치명적이다". 따라서 가인은 자신의 분노와 좌절감을 극복해야 한다. 형제간의 갈등과 혼란을 슬기롭게 다루지 못하면 무서운 짐승 같은 죄가 잠복하며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분노와 좌절감을 주관적인 심리적 범주로 다루나, 성경은 우는 사자와 같은 무서운 권세로 다룬다(엡 6:12).

   특히 여기에서 "죄가 가인을 사모하다"라는 표현이 충격적이다.

   창세기 3:16에서 이 단어는 남녀가 서로를 향해 가지는 왜곡된 갈망과 지배하고자 하는 감정을 보여 주었다. 이제 죄는 가인을 사모한다. 의인화된 죄가 동물적인 굶주림으로 가인을 탐하고 있다. 그러나 가인은 아직까지 죄의 파괴력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자신을 죽음까지 몰고 가는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주님은 가인에게 그가 처한 위험을 말씀하신 후, 대안을 제시해 주신다. 비록 죄가 문 앞에 잠복한 짐승처럼 위협하나, 가인이 그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신다. "다스리다"는 용어는 창세기 1:28에서 남녀 인간이 모든 식물과 창조계를 다스리며, 두 광명이 밤과 낮을 다스리는 맥락에서 나타난다(1:16-18). 이와같이 가인은 문 앞에 웅크린 짐승을 길들여야 한다. 



   2. 가인의 살인(8절)



   그는 어느날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였다"(8절)고 한다.

   여기에서 "고하다"('amar)는 동사는 "말하다"(dabar)라는 동사처럼 목적어 없이 절대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예로부터 여러 해석자들은 목적어를 첨가하였다. "오라 우리 같이 들에 가자"(탈굼). 혹은 "우리 넓은 들로 가자"(페쉬타).

   여기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한 말은 설화의 구성에서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속에 있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본문 속에서는 가인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어떤 암시가 있다. "고하다"는 단어는 이디오피아어에서는 "보이다, 시사하다"는 뜻을 가지므로 "만날 장소를 정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카수토 215).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인은 아벨을 쳐죽일 장소로 은밀하게 유인하고 있다.

   가인이 아우를 죽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일한 부모의 유전인자를 공유하고 있는 자였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이 세상에서 처치하는 것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아벨과 자신은 너무나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둘은 공존할 수 없으며,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우리도 가인처럼 자존심이 상처받을 때, 생사를 건 혈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가인은 아벨을 "들"로 유인해 낸다(8절 하). 그는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아벨을 불러내고 있다(신 22:25-27). 그리고 "가인이 일어나(qum) 아벨을 쳐죽인다." 가인은 동생을 만나는 장소를 살해의 장소로 바꾸고 있다. 우정의 장소를 배신의 장소로 바꾸고 있다. "일어나"(qum) 그를 죽이니라"는 표현이 너무나 섬찍하다. 이 표현은 "만일 사람이 그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qum) 쳐서 그 생명을 상하여 죽게 하면"이란 신명기의 규례를 상기시켜 준다(신 19:11).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고, 가인을 기다리던 죄는 결국 가인을 삼킨다.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다스림을 받으며, 매복한 정욕에게 지배되며 파국적인 종점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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