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2:1-3,창조의 완성

호리홀리 2015. 4. 27. 11:04

창조의 완성 (2:1-3)



   제 7일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앞의 육일과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 세절은 아주 아름답게 배열되어, 창조기사를 끝맺어 준다. 2:1에서는 "하늘과 땅"을, 2:3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다"를 언급함으로써, 1:1과 교차 대귀적으로 연결된다.




   1) 창조의 완성 (2:1)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에서 "만물"은 보통 하늘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 "하늘의 만상"을 뜻한다. 시편 찬양에서는 땅도 포함되어, "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물"이란 표현이 나온다. 별 (신4:19; 사40:26)과 아주 드물게 천사들 (왕상22:19)이 하늘의 만물로 언급된다. 아마 여기에서는 천사가 제외되었을 것이다. "땅의 만물"은 그 어디에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절은 1장의 요약적 결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아직도 마치지 않은 일을 끝내었다는 뜻은 아니다" (F. Delitzsch).



   2) 하나님의 안식 (2:2-3)



   저자는 제 7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고 있다. 이 날에 대한 설명 문체도 독특하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다른 날처럼 말씀하시거나 일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안식일을 축복하시는 것이 독특하다. 성경에서 축복은 주로 생물에게 제한된다. 즉 인간, 동물 등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동물을 축복하실 때, 그것은 생육과 번성과 성공을 뜻한다. 하나님이 창조적 활동을 마치신 날을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에서 "거룩하게 하시다"도 이례적이다. 날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 날 속에 "거룩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선포적인 의미를 가지며 (declarative), 이 날을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왜 "거룩하다"고 선포하는가? 왜냐하면, 이 날은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에게 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며, 하나님과 연관된 장소와 사람과 물건들이 거룩한 것으로 선포된다. 안식일 외에, 축제일이 거룩하다고 불린다 ( 느8:9, 11에서만). 구약에서 거룩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선택하여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특별한 위치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는 안식일의 거룩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에서 "마치다" (kalah)는 "완성하다"는 의미이다. "안식하였다" (shabat)의 일차적인 뜻은 "중단하다" (cease)이다. "휴식하다"는 동사는 따로 있다 (nuah). 여기에서는 "휴식" 보다는 "중단"이 더 강조된다 (출31:17 참조). 엿새 동안 하나님은 일을 완성하셨고, 제 7일에는 중단하셨다. 이 노동의 중단은 안식 개념에 대단히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쉬지 못한다. 창세기 저자는 노동의 중단을 통한 하나님의 안식을 강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표현은 세 번 나와서 안식을 강조해 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도 제 7일에는 쉬어야 한다 (출 20:8-11). 지주나 사장 만이 쉬는 것이 아니다. 이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출 20:10; 신5:14).

   제 7일의 하나님 "안식"은 신학적 표상으로 미래에 중요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안식" 주제는 앞에 있을 것에 대해 미리 예시해 준다 (2:15; 5:29; 8:4; 19:16; 출 20:11; 신 5:14; 12:10; 25:19). 후대 성경 저자들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과 경건한 자를 위해 기다리는 미래의 "안식" 사이에 있는 연관성을 말해 준다 (시 95:11; 히 3:11).





    천지 창조에 대한 신학



   1) 천지 창조는 스스로 계시며 천지를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창세기 1장은 고대의 신화적인 세계관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천지 개벽과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그들은 우주의 삼라만상 속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겐 태양도 달도 별도 나무도 곰도 뱀도 다 신이었다. 창세기 1장은 세상의 종교가 신성화 시킨 모든 것을 비신화화 시키며,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음을 증거해 준다.

   창세기 1장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된 자존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일부가 아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채우시는 초월적인 인격이시다. 구약의 신관은 물활론이나, 정령 숭배나 다신론이나 일신교 등을 통해 진화해 간 것이 아니다. 구약 신앙은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과 창조로 계시한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은 암울한 바벨론 포로 시대를 살던 어느 제사장의 신학적 사색이 아니다.

   "누가 창조를 지켜보았는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창조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있으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도 없고, 천지가 만들어지는 것을 본 목격자도 없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마치 목격자의 증인이 말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틸리케 16). 이런 논리는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위협적이다. 이것은 "내세를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직접 체험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는 인식론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중에서 "부자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면, "죽은 자를 보내면 믿을 것이다"라고 부자가 말하자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창조의 말씀과 내세에 대한 모든 말씀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계시이다. 이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믿기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천지 창조의 구조를 유심히 볼 때, 여기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저희가 핑계치 못할 것" (롬 1:20)이다. 또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탄성을 지른다 (시 19:1).

   창세기 1장은 단지 유일하신 하나님 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지으시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신다. 천지 창조는 "말씀"과 "하나님의 신"으로 이루어진다. 이미 창세기 1장 속에 삼위일체의 씨앗이 나타나고 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2) 천지 창조는 창조 질서를 증거한다.



   가끔 우리는 "왜 교회당 꼭대기에 피뢰침을 달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다는 것은 신성 모독은 아닐지라도, 약간 방정스러워 보인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떤 상황에도 주께서 교회를 지키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피뢰침을 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수하실까 두려워 피뢰침을 다는가?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자연 질서와 초자연 질서의 관계 문제가 단지 피뢰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우리가 병이 들 때, 자연 질서를 따라 약을 먹고 쉴 것인가, 아니면 초자연적인 기적이 나타나길 기다려야 하는가? 많은 신자들 중에 병이 들면, 기도와 안수를 받고 금식으로 낫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믿음이 좋을수록 의사를 기피하고 약도 사양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기도원에서는 손톱으로 병든 환부를 파내는 소위 "성령 수술"을 한다고도 한다. 이런 곳에서는 멋있는 순환 논법을 사용한다.

   "나는 고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고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고침을 받지 못할 때에는 나의 능력이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나는 고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이 고침받지 못한 것은 당신의 불신앙 때문이다."

   좀 더 과격한 사람들은 모든 병을 귀신에게 돌린다. 감기까지도 귀신의 역사로 보므로, 귀신을 내어쫓아야 한다. 이런 사람은 모든 질병을 영계의 역사로 본다. 이 세상에는 성령과 악령 뿐이며,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은 악령의 것으로 본다. 이들은 창조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카톨릭 교회에서는 초자연적인 생활을 추구하며 이상적이고 신비로운 품성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적인 생활이 해롭고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적인 생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장애가 된다. 가장 선하고 가장 확실하게 완전에 이르는 길은 빈곤, 순종, 청빈과 성결의 네가지 덕행이다. 따라서 보다 경건한 삶과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수도원적인 삶을 추구하며, 인간의 자연성을 구성하는 식욕과 성욕과 혈연을 부인해야 한다. 카톨릭 신학에서는 자연과 초자연이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초자연의 우월성 때문에 자연에 대한 억압이 있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것이야 말로 본연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삶이야 말로, 자연적인 생활을 넘어 높이 우뚝 솟아 있으며, 이것을 위해 자연적인 삶을 가능한 많이 부인해야 한다. 수도승은 종교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신자이다. 이런 신앙은 인간의 기본 질서가 원래 창조 질서였음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 주위의 여러 교회에서는 입시철이 되면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를 하게된다. 물론 정신적인 스트레스 속에서 고통받은 수험생과 그 부모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성적과 상관 없이 운수 대통하여 내가 아는 문제가 많이 나오고, 모르는 것도 잘 찍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면, 비성경적인 기도회가 될 것이다. 사업에도 우리는 가끔 "별미 축복"을 운운하며, 야곱이 이삭에게 맛있는 음식을 드려 축복을 받은 것을 가지고 목회자를 대접하여 복받으려고 한다. 이런 행태는 신앙을 주술로 바꾸는 것이다.

   신명기 22:8에는 "집을 지을 때 지붕에 난간을 세우라"고 명한다. 난간의 유무에 따라 지붕에서 떨어진 사람에 대한 책임 문제가 가려진다. 난간에서 떨어지는 것을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실수로 먼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건축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말한다. 예수 믿고 난폭 운전을 하는 사람은 이런 구절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신 가장 기본적인 질서는 창조 질서이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나는 것이 주님의 질서이다. 주님은 창조 질서의 아버지이다. 창조 질서도 하나님의 질서이다. 우리는 이 질서를 더욱 사랑하고, 이 질서 속에서 참된 지혜의 기초를 찾아야 한다 (잠 3:19-26; 8:22-31; 14:31; 20:12; 욥 38장 이하).



   3) 천지 창조는 구원 질서를 증거한다.



   첫 창조가 완전한 창조였다면, 구원은 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창조질서를 더욱 견고하게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과 창조 사이에 있는 내재적인 통일성을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 주님은 "구속주와 창조주"이시다 (사 44:24). 우리의 구원은 창조와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가 아니며, 창조의 질서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1) 창조는 구원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혼돈의 깊음을 가르고, 어둠에 빛을 비추어 질서를 세운 창조는 구원의 파라다임이 된다 (시 74:12-17). 하나님께서 물을 정복하신 사건은 역사에서 그의 구원을 보증해 준다 (사 42:5; 43:1; 49:5; 시 22:9; 139:13-16).

   (2) 창조는 출애굽 구원의 모델이 된다. 주님은 홍해를 가르고 육지를 내사 자기 백성들로 통과하게 하시며,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신다 (사 51:9-11).

   (3) 교회의 구원은 새로운 창조이다 (고후 4:6; 5:17). 창조주 그리스도께서 (요 1:1; 골 1) 옛 것보다 더 나은 새 창조를 이루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