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1:2,혼돈과 공허

호리홀리 2015. 4. 27. 10:49

혼돈과 공허 (1:2)



   1:2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땅을 준비하시기 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리고 땅은"이란 절은 분절 접속사절로서 3절의 주절을 이끄는 상황절이다. 따라서 2절은 3절에 있는 첫 창조 명령 직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해 준다. 이와 유사한 구문 구조가 3:1과 4:1에도 나타난다. 1:2은 현재 우리가 사는 땅이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삼중적으로 묘사한다. 그 중 두 가지는 부정적이며, 하나는 긍정적이다. (1)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2)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3)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신다."


   첫 두 가지는 부정적인 상황이며, 세번 째는 긍정적 상황을 보여준다.



   1)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혼돈과 공허"는 히브리어로 "토후 와보후" (tohu wabohu)로서 아주 아름다운 시어이다. 이 단어는 "황량하고 텅빈" (waste and void) 상태를 말하는 중언법 (hendiadys)이다. "황량함"은 "무" (사29:21), 혹은 여기에서 처럼 "무질서, 혼돈"의 두 가지 개념을 갖는다. 그렇지만 성경의 "혼돈" (tohu)은 우리가 생각하는 "마구 헝클어진" 상태나 "혼잡한 물질 덩어리" 상태가 아니라, 길 없는 사막이나 문명 이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신명기 32장에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던 시간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신명기 32장10절; 욥 6:18).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면, 땅은 "거주할 수 없는 곳" (토후)이 되며, 백성은 포로로 잡혀간다 (렘 4:23-26).

   포로로 잡혀간 후 땅은 창조 이전의 상태로 묘사된다. 창세기 1:2의 "혼돈"은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 이루어진 질서와 대조되는 짜여지지 않은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공허"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질서를 만들기 전에 아무 것도 아직 존재하지 않은 "텅 빈" 상태를 강조해 준다. 이 두 단어는 곧 보겠지만, 창조 과정의 두 중심 축을 이루어준다. 즉, 첫 삼일 동안 하나님은 "혼돈"에 대항하여 구조를 짜시고, 나머지 삼일 동안은 "공허"에 대항하여 채우신다.

   문맥을 통해 볼 때에도,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어둠"이 있고, 땅은 "물로 덮여 있는 상태"이다. 이 용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평가하시기 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한다. 이 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not-yet) 상태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이전의 상태이다. 이런 점에서 2:5-6의 땅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두 본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묘사한다. 이것은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인간이 거주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안된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Young 28).

   그렇다면, 3절에서 "빛이 있으라"는 첫 창조 명령 전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였다"는 상태는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했을까? 이 점에 대해 에드워드 J. 영은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물론 알 길이 없다. 그러나 2절에서 볼 수 있듯이 지구의 상태는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 그대로이며 하나님께서 현재의 세계와 같은 형태로 만들기 시작할 때까지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26쪽)라고 말하였다.



   2)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라는 상황이 제시된다. 아직 빛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3절), 어둠이 온 세상을 덮고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세상은 "깊음"에 덮여 있었다. 여기의 "깊음"은 "깊은 물"이다. "깊은 물"은 태초의 바다로서 땅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이 깊음은 항상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며 하나님의 구원사를 거스린다 (출 15:8). 여기에서 "깊음"은 바벨론의 창조 신화에 있는 티아맛 같이 독자적인 신적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어둠이 깊음을 싸고 있는" 상태는 태초의 황량함을 묘사해준다. 이 상태는 곧 나타날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고 있다. 은유적 관점에서 보면, 빛은 하나님을, 어둠은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인 모든 것을 상징한다. 악한 자 (잠 2:13), 심판 (출 10:21), 죽음 (시 88:13)은 모두 어둠으로, 구원은 빛으로 묘사된다 (사 9:1). 이 어둠은 특히 사람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암 5:18, 20). 깊음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욘 2:3, 5). 그렇지만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도 다 보시며 (시 139:12), 또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다 (신 4:11; 5:23; 시 18:12).



   3)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신다"



   이제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신"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을 "강한 바람", 혹은 "하나님의 바람", 혹은 "하나님의 숨결" (서인석)로 번역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야웨의 영은 단 한번도 "강한 바람"으로 사용된 적이 없고, 항상 하나님의 영으로 나타난다.

   히브리어 "운행하다" (rachap)는 시리아어에서 "알을 품다" 혹은 "부화하다"라는 뜻을 가지므로, 김이곤은 "마치 알을 품고 있는 날짐승처럼 하나님의 창조적 영이 혼돈의 물을 품고 있었고 그 어느 것도 그분의 품에서 벗어나 있을 수는 없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페니시아의 창조론에 나타나는 개념이며, 창세기 1장에서는 이런 뜻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Wehnam, 17참조).

   이 단어는 신명기 32:11에서는 독수리가 그 새끼 위를 "너풀거린다"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우가릿어 라하프 (rhp)도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며 (Gordon 1965:484), 바알이 얌과 일전을 할 때, 바알의 힘찬 행동은 매가 위에서 갑자기 급습하는 영상으로 묘사된다 (Kline 1977:253, n. 7). 신명기 32장에서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 위를 "너풀거리는" 모습은 기본적으로 자기 새끼를 지키고 보호하며 돌보는 영상을 준다. 동물들은 새끼를 낳을 때, 그 보호 본능이 강하다.

   이 영상을 창세기 1:2로 가져온다면, 하나님의 신이 아직 혼돈과 공허, 깊은 물로 가득찬 세상을 지키며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의 동사형은 지속적인 동작을 가리키므로, 성령은 현재의 땅이 수면 위로 나타나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이 될 때까지, 혼돈과 공허로 뒤덮힌 땅, 깊은 어둠으로 뒤덮힌 땅을 지속적으로 지키고 있다. 마치 독수리가 새끼의 보금자리를 보호하고 준비하듯이 하나님의 신이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