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2: 5-25,에덴축복

호리홀리 2015. 4. 27. 09:55


   에덴 동산 (2: 5-25)

  
   주님은 여기에서 "인간을 만드시며"(7절), 그들이 거처할 "동산을 만드시고"(8절), 인간에게 "노동"(15절)과 "삶의 규범"(16-17절)과 "결혼 제도"(18절)를 정해 주신다. 특히, 주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을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시고 그를 자신의 대리인과 대표자로 세우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는 모습이 특이하다(7절; 욥 10:8-12; 시 139:13- 17). 창세기 2:7의, "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인간 창조 보고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라는 1:26-27의 인간 창조와 달라 보인다. 그러나 2장의 인간 창조는 2:7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전장에 걸쳐 나타나므로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2장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표현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모습 즉, 인간이 천상의 존재는 아님을 강조해 준다. 그는 하나님이 만드신 다른 피조물처럼,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2:19). 즉 인간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흙에서 나온 존재로서 창조주의 피조물임을 강조해 준다. 이것은 타락 후의 인간 운명을 내다보게 한다. 타락 후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3:19). 주님은 토기장이가 진흙을 주물러 작품을 만드는 것 같이 인간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드셨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땅에서 나온 자이며 흙으로 빚어진 자이다. 땅 자체도 주님의 선물이지만, 인간 자신은 땅의 진흙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생명의 기식을 불러일으킬 때까지, 그는 진흙에 불과하다. 인간이 흙에서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주님의 "생기"를 얻은 존재이다. 여기에서 "생기, 혹은 생명의 호홉"(nishmat hayim)은 창세기 7:15, 6:17과 에스겔서 37장에 있는 "생기, 혹은 생명의 바람"(ruah hayim)과는 다른 단어이다. 우리 말로 "기"로 번역된 단어는 "호홉"이란 뜻으로서 "바람"보다 더 협소하고 드문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호홉"(neshama)은 "바람"(ruah)보다 좀 더 희소하게 나타나며, 이사야 2:22과 신명기 20:16에서와 같이 "일반적이고 조용한 호홉"을 뜻한다(Snaith 1944:144). 여기에서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기"를 주셔서, 인간이 부드럽게 호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데 있다. 호흡은 주된 인간의 중심 특징이다(수 11:11; 사 2:22).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으로 인간이 호흡할 수 있게 하셔서 인간이 숨쉬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창세기 2:7에 따르면, 주님께서 그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인간은 비로소 "생령"(nepesh haya)이 되었다고 한다. 동일한 표현(개역에서는 "생물"로 번역됨)이 창세기 2:19에서 들짐승과 새들(창 9:9) 뿐 아니라 바다 고기에도 적용된다(1:20). 동물들도 동일한 생명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창 6:17; 7:15, 22; 전 3:19, 21). 그러나 동물 창조는 인간 창조만큼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만이 하나님께서 직접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된 것이다. "생령"에서 "영"으로 나오는 단어는 구약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로서, "식욕, 목구멍, 인간, 영혼, 자신, 신" 등의 뜻을 갖고 있다(Wolff 1974:7-25pp). 그러나 본문에서 그냥 "영"이라고 하지 않고, "생령"이라고 말한 것이 흥미롭다. 형용사 "산"은 죽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즉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써, 인간이 살아 있는 전 인격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지정의를 가진 인격체로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앞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역사의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1) 동쪽의 산(8절)



   ① 동쪽은 생명의 장소를 가리킨다. 에덴 동산은 "동방의 에덴"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동쪽은 생명의 장소이다. 동방은 해 뜨는 곳으로, 빛이 오는 곳이다. 따라서 에덴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첫 인간을 자신의 임재가 충만한 생명의 땅에 두셨다. 에덴은 동산(garden)이다. 동산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이 동산을 만드시고, 이곳에 인간을 초대하여, 자신과 교제를 나누게 하시며, 인간과 동물, 식물이 조화를 이루는 복을 누리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인간을 만나시고, 함께 교제를 나누신다(3:8참조). 이곳은 생명과 평화의 장소로서 죄와 죽음이 배제되어 있다(3:22; 계 21:8). 하나님의 그룹이 동산의 평화를 지키고 있다(3:24; 대하3:7).



   ② 에덴은 산으로 묘사된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10절). 강이 시작하는 지점이므로 이곳은 산이다. "산"으로서 에덴은 불가침성과 높은 위엄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영광스러운 곳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영광스러운 두로 왕이 마치 "하나님의 성산"으로 묘사된 에덴 동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겔28:13-16). 사도 요한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 에덴의 산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그린다(계 21:10, 22:1-2). 출애굽기 15:17에 따르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거룩한 산이 출 이집트의 최종적인 목적지이다(히 12:22; 골 3:1-4 참조). "산"으로서 에덴의 영상은 이후에 "시온산"과 "교회"로 이어진다. 이 거룩한 산에 살기 위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요구된다(시15:1).



   (2) 동산의 나무들(9절)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아름답고 무성한 나무들이 있었다. 이 나무의 열매들은 잔치상에 놓인 과일들처럼 생명과 번영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복이 나무와 과실의 영상으로 그려진다. 이 세상의 나무들은 여름의 가뭄에도 싱싱하게 살아 있어, 하나님의 생명을 상징해 준다(시 1:3; 렘 17:8). 특히 에덴 동산의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아는 나무"가 있었다. 저자는 이 두 나무가 동산 중앙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두 나무는 에덴에서 뿐 아니라 이후 이스라엘의 예배에서도 중심에 자리잡는다. 먼저 생명나무는 성경에서 잘 알려진 나무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노년에 젊음"을 주는 깊은 바다의 약초를 언급한다(11:268-89). 창세기 3:22도 이 나무가 그 과실을 먹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 열매 속에 어떤 신비하거나 주술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영원한 생명이 됨을 이 나무가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고 보아야 한다. 잠언에서는 지혜(3:18)와 의의 열매(11:30)와 소원 성취(13:12)와 부드러운 혀를 "생명나무"라고 한다. 즉, 이것들은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게 넘치는 생명을 준다. 성막에 있는 금촛대는 생명나무를 상징한다. 열두덩이의 빵에 빛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먹이심을 상징한다(출25:31- 35; 레24:1-9). 주님은 또한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두셨다. 주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원래의 창조된 상태를 넘어, 더 나은 도덕적, 윤리적 성숙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셨다. 이리하여 이 나무는 인간의 지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은 원 창조 상태를 넘어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자신의 인격적인 결단을 통해 진정 하나님의 모습을 내면 속에서 이루어갈 수 있는 길이 이 나무를 통해 제시된다.



   (3) 동산의 강들(10-14절)



   에덴 동산에는 땅의 네 방향을 나누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10절). 에덴 동산은 강의 근원에 위치한다(13-14절). 저자는 강의 위치를 분명히 하여 그 강이 흐르는 땅의 성격을 묘사하려고 한다. 두 강은 우리가 잘 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힛데겔) 강이다. 나머지 두 강인 비손과 기혼은 찾기가 어렵다. 성경에서 "구스 땅"은 이디오피아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디오피아를 흐르는 강으로서 "이집트의(나일) 강"으로 볼 수 있다. "이집트의 강"은 후에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의 땅의 경계가 된다(창 15:18). "하윌라" 땅은 찾을 수가 없다. 에덴 동산에 흐르는 강은 문자 그대로의 강이지만, 영적인 의미와 천상적 의미를 함께 갖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 땅의 사방으로 흐르는 것은 하늘의 복이 성전을 통해 온 세상으로 흘러 가는 것과 같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신약에서는 신자의 내면에 하나님의 성령이 생수처럼 흐른다(요 7:37-39). 생수의 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 내린다(렘 17:13; 겔 47:1; 계 22:1). 그 물이 풍성함은 바다를 채우며(슥 14:8), 그 매력은 하나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고(시 36:8-9; 46:4), 그 아름다움은 수정처럼 깨끗하며(계 22:1), 그 능력은 소금물을 단물로 바꾸며(겔 47:8-9), 그 정결케 하는 힘은 예루살렘 거민의 죄를 씻고(슥 13:1), 그 치료의 힘은 생명나무를 소성케 한다(겔 47:12; 계 22:2).



   (4) 동산의 보석들



   에덴 동산은 끝으로 보석 모티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동산에는 "금"과 "정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었다(12절). 이 동산의 보석은 에스겔 28:13(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에 더 자세히 나타난다. 후에 모세의 성막도 보석으로 가득찬다.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하는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다"(사 54:11-12). 보석은 주로 사치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보석은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할 때에는 보석이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동산의 금과 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준다. 학개 선지자는 성전의 금과 보석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2:7-8). 사도 요한도 새 예루살렘의 보석을 언급한다(계21:18). 보석으로 가득찬 에덴 동산의 모습은 구약 성전과 신약 교회의 참된 모습을 상징해 준다. 



   (5) 인간은 제사장이다(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동산에 "두신"(2:8) 목적을 설명해 준다. 주님께서 그들을 두신 목적은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한다"(le'abedah uleshamrah)로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그것"은 여성형 의미(-ah)로 나타나 대부분 "동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보면, 아담에게 주신 사명은 기본적으로 동산을 돌보고 지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타락 이전에도 노동이 주어졌다. 그러나 "동산"(gan)은 남성형이다. 따라서, "예배하고 순종하다"(to worship and obey)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동산에 살게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그의 삶은 예배와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단지 동산에서 일하는 일꾼이나 동산지기가 아니라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았다. 이것은 오경의 주제와도 일치한다. 후대에서도 "일하다"('abad)는 성전에서 일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된다. 시편 104편에서 우주는 주님의 성전이며, 인간은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다(겔 28장).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부름받는다(출 19:6).



   (6)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자유의지를 가진다(16-17절)



   2:16-17은 성경에서 나타난 첫번째 금령이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선악과"는 성경에서 오직 이 이야기에만 나오기 때문에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2:9, 17과 3:5과 끝으로 3:22에 나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그 뜻을 문맥에서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가 주는 "생명의 복"을 상징하듯이, 선악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조건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주님과 아담의 관계는 주님의 주권적인 은총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관계의 유지는 그가 먹어서는 안되는 금령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인간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 먹는다는 것은 앞으로 "선악"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인간의 자율성"을 추구하겠다는 것이 된다. 즉, 선과 악의 기준이 주님과 그의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 "선악과"를 따 먹는 시험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형태의 "선악과"를 주님으로부터 얻는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전해 주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땅에서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선악의 기준인 계명을 지키는데 달려 있었다(신 30:16). 성경의 첫 금령이 지닌 중심 내용은, 하나님 만이 인간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점이다. 우리가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를 믿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불순종하면, 우리 자신이 선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현대인에게는 이것이 아주 좋아 보이지만, 창세기 저자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최악의 운명이 된다.



   (7) 인간은 부부 간에 서로 연합하며 사랑한다(2:18-25)



   2:16-17절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조건을 일반적으로 제시한 후, 하나님이 알고 계신 "선"을 제시한다. 즉 남자를 위해 여자를 창조하신다. 창세기 첫 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 선인지 아신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제 여자 창조가 하나님이 아시는 선의 원형적 예가 된다. "남자가 독처하는 것은 선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의 "동반자적 성격"(partnership)이 강조된다. 사람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지만, "아담에게는 배필이 없었다." 동물의 이름을 짓는 이야기가 여자를 창조한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20절). 사람이 동물의 이름을 짓는 것은 자신의 적절한 배필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배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른 존재였다. 아담은 자신과 같은 자를 발견하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노래한다. 남자는 자기를 닮은 자를 여자에게서 찾았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2:18)에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돕는 배필"이란 단어에 근거하여 남성 우월론과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성의 여성 지배론을 정당화 시켰다. 이 단어의 원어('ezer kenegdo)는 "그에게 어울리는 조력자"를 뜻한다. 문맥이 이 점을 더욱 잘 드러내어 준다. 아담은 동물들 중에서 그를 닮은 자, 혹은 그의 짝('ezer kenegdo)을 찾을 수 없었다(2:20). "그의 짝" 혹은 "배필"이란 단어 원래의 뜻은 "그의 맞은 편에 있는 자"로서 성경에서 단 두 번 여기에만 나타난다. 이것은 "똑 같은 자"는 아니지만, "동등하고, 어울리는 자"(BDB 617)를 뜻한다. 따라서 "배필"이란 개념 속에 여성의 열등성은 없다. 두번째로, "돕는 자" 혹은 "조력자"는 우리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종속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나, 성경에서는 이런 종속과 열등의 개념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돕는 자"는 "도움을 받는 자" 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주로 나타난다.

   이 용어는 구약성경에서 약 열 아홉번 나타나는데 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며(출 18:4; 신 33:29; 시 20:2; 121:1, 2; 124:8; 89:19), 세 번 인간에게 사용되는데 이것도 예언서에서 군사적인 도움을 강자가 약자에게 주는데 사용되고 있다(예, 사 30:5 [이집트의 바로]; 겔 12:14[예루살렘 왕을 호위하는 자]). 물론 창세기 2장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해서, 여자가 남자 보다 강하다는 뜻은 아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중요한 사실은 남자 혼자로서는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데 있다. "돕는다"는 개념은 일상 생활에서 가사나 생업을 도우는 것 정도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서로 받쳐주며, 함께 해 주는 것이다. 땅을 다스리는 사역을 함께 하는 동료요, 동역자인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는 개념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남녀 간의 상호 의존성이 명백히 나타난다. 그들은 동등하나 다르며, 다르나 상호보충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8절)는 인척관계를 표시하는 구절이다. 라반은 그의 조카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뼈와 나의 살)이다"고 말한다(삿 9:2; 삼하 5:1; 19:13-14). 우리는 가족관계에서 "핏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히브리인들은 뼈와 살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창세기 2:23의 문맥을 살펴 보면, 인간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골육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며,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골육관계가 이루어진다. 이런 사상적 배경 때문에 후에 레위기에서는 짐승과의 교합을 가장 가증하게 여긴다. 창세기 2:23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란 최상급을 사용하여 부부관계는 인간관계 중 가장 가깝고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임을 강조해 준다. 우리는 천지 창조 직후의 첫 이야기인 에덴 동산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으신 하나님께서 전인격적인 인간을 만드셔서, 산과 나무와 강과 보석이 넘치는 거룩한 동산 에덴에서 두시며, 그를 제사장과 자유인으로 세우셔서 자신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을 살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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