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3장,미쉬파트와 헤세드

호리홀리 2015. 4. 16. 13:11

아담과 이브의 타락(3:6-7)



    타락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 이제 히브리어 산문체가 그 위력을 드러낸다. 여자는 치명적인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다. 여러 개의 접속사로 이어진 연속절이 나타나 여자의 행동이 얼마나 신속한지 드러내어 준다. "그녀는 보았다", "잡았다", "주었다…". 이 중앙에 "그리고 그도 먹었다"가 나타난다(7절 하). 이어서 그들이 먹고 난 후의 영향이 나타난다. 즉, 그들의 "눈이 열리고", "벌거벗은 것을 알고", "나무에 숨는 것"이 나타난다. 이런 대조는 의도적이다. 여인의 뱀이 제시한 지혜를 알고 싶었던 기대가 6절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 실제적인 결과는 정반대였다. 시험은 하나님을 떠난 "지혜"를 찾는 데 있었다. 여자는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3:6 하).". 결심을 하자 말자, 죄를 범한다. 왜 남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아내의 말을 따랐는가? 여자가 뱀의 말을 쉽게 듣는 것처럼, 남편도 아내의 말을 쉽게 듣는다. 결과적으로 뱀이 약속한 것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그 열매를 먹자 말자 "눈이 밝아졌고" 선악을 아는 데 "하나님처럼"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모순(아이러니)이 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창 1:26),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다. 뱀은 그들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 것이라고 약속했다. 남녀는 "선악" 지식을 가지게 되면, "선"을 즐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먹자 말자 그들의 눈은 밝아졌고, 그들이 본 것은 "선"이 아니라 벌거벗은 "수치"였다. 그들이 새로 얻은 지식은 그들의 벌거벗은 상태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지만, 그들조차 서로 같지 않음을 발견하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그들의 다른 점을 감추었다. 하나님이 입히시는 "영광"의 옷을 그들이 벗게 되었을 때, 그들은 스스로 만든 "대용품"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담과 이브는 전도자처럼 지혜와 지식을 찾았지만, 오히려 허무와 고생만 발견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오시는 소리를 듣고 자신을 숨겨야 했다. 




    하나님의 심판(3:8-22)



   1) 장면(3:8)



   아담과 하와는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을 거니시는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여기에서 "날이 서늘할 때에(leruach hayom)"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난해 구절로 여겨져 왔다"날이 서늘할 때" 보다 "폭풍의 바람으로"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Niehaus 157). "폭풍은 주님의 오심"을 말해준다. 주님은 심판을 위해 오신다. 여기에서 "소리(qol)"도 주님에게 적용될 때는 "천둥"을 가리킨다(출 20:18). 또한 "거닐다(mithallek)"는 동사는 구약에서 신현의 맥락에서 사용된다(겔 1:3; 시 77:16-17).

   따라서 창세기 3:8은 주님의 무서운 신현을 묘사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폭풍으로 동산을 몰아치시는 주님의 천둥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Niehaus 159).



   2) 심문(3:9-13)



   하나님은 판결을 내리기 전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9절). 하나님은 판결을 내리기 전에 질문을 던지곤 하신다 (4:9-10; 18:21). 이 때 아담은 자기 말로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0절). 그리고 아담은 즉시 책임을 이브에게 전가한다. "여자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여자입니다"라고 말하며 궁극적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브를 만드셔서 아담에게 배필로 주신 의도에 대한 풍자이다(2:18). 이리하여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창 2:23)이 자기 재앙의 원천이 되었다며 죄를 여자와 하나님에게 전가한다.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기 보다 책임을 자신의 아내에게 일차적으로 전가하는 아담의 모습은 그가 처음 이브를 만난 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탄성을 지른 모습과 아주 대조적이다(2:23). 그러나 여자도 만만치 않다. 하나님께서 이브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심문하시자, 여자도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대답한다(13절). 여기에서 여자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뱀"이 나를 꾀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직접적으로 뱀에게와 간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전가한다. 우리가 우리의 죄와 잘못을 남에게 잘 전가하는 이유는, 우리의 첫 부모 아담과 이브에게 배운 것이다. 이리하여 남녀 사이에 있던 친밀성과 상호 의존성과 깊은 신뢰는 이제 산산조각이 났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한다. 아름다웠던 이중창은 불협화음으로 변질된다. 서로를 향한 순수함과 열정과 헌신은 이중성과 냉담과 책임전가로 바뀐다.



   3) 판결(3:14-20)



   여기에서 뱀과 여자와 남자는 단지 개인으로 묘사되지 않고, 각각 대표로 나타난다. 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의 대표로, 하와는 여자의 대표로, 아담은 남자의 대표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옛날 옛적의 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1) 뱀에게(3:14-15)



   뱀은 "간교하지만" 이제 "저주를 받는다." 그의 "저주"는 다른 모든 육축과 들짐승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었다. 즉, 이후로 뱀은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는 것"이다. 뱀이 배로 걷는 것은 원래 뱀이 걸어다니다가 이제 기어다닌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뱀의 현재 행동을 보면서 하나님의 저주를 보는 것이다"(Gunkel). 즉, 뱀이 기어다니는 것이 마치 현상학적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임을 말해준다. 또한 뱀은 "종신토록 흙을 먹을 것이다." 이 구절의 문제는 뱀이 실제로 "흙을 먹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흙을 먹는다"는 표현은 히브리어에서 숙어이다. 마치 우리가 사용하는 속어 "엿 먹는다"가 문자 그대로 엿을 먹는 것이 아닌 것처럼, "흙을 먹는 것"은 싸움에서 패배하여 철저한 수치를 당한다는 뜻이다.

   즉 이것은 "철저한 패배"를 뜻한다[사 65:25; 미 7:17; 시 72:9, "그 원수들이 티끌(흙)을 핥을 것이다"; 사 49:25)]. 뱀이 받은 저주는 인간 타락에 있어서 그가 택한 역할의 결과이다. 뱀은 세상이 회복되어도, "흙이 [여전히] 뱀의 음식이 될 것이다"(사 65:25). 따라서 이 구절은 궁극적으로 뱀으로 상징된 마귀의 패배를 말해준다. 저자는 뱀과 그의 "후손"을 지속적으로 명시한다. 15절은 "뱀"과 "여인" 그리고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적대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다. 우리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갈등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깨는 것을 기대하지만, 그는 "뱀의 머리"를 부순다. 달리 말하자면, 뱀과 "그의 후손"은 하나이다. 미래에도 그의 "후손"은 원래의 뱀이다.

   따라서 이 뱀은 누군가 혹은 그 무엇인가를 대표한다. 뱀의 "후손"이 부수어질 때, 뱀의 머리도 부수어진다. 후대의 성경 저자들은 뱀 배후에 사탄이 있음을 보았다(롬 16:20; 계 12:9). 창세기의 이 이야기는 원형적인 의의를 지닌다.



   여기에 등장한 "여자의 후손"은 창세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독자들에게 계속 궁금증을 던져 줄 것이다. 그는 "가인"인가, "아벨"인가? 아담의 수많은 후손들 중 누가 뱀의 머리를 깰 "여자의 후손"이 될 것인가? 창세기 저자는 "여자의 후손"의 계보를 이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로 이어간다. 그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진다. 그가 뱀의 머리를 깨시고,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골 2:15).



   (2) 여자에게(창 3:16)



   여자에 대한 판결에서 출산의 고통과 남편과의 관계에서의 고통이 나온다. 출산에 있어서 이제 더 무거워진 고통 가운데 자녀를 낳게 된다. 원래 여자는 자녀의 축복을 받았고(1:28),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축복을 받았다(2:18). 그러나 남편과의 관계도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이 양면적 축복이 이제 저주로 얼룩진다. 그렇지만 여자와 남자에게 내려진 주님의 판결은 주님의 정의와 은총을 동시에 드러내어 준다. 주님의 정의에 따라 여인의 해산의 고통은 심화되나, 이를 통해 인류가 번성하며 하나님께서 바로 앞절에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 구원자로 태어날 것이다. 최종적인 승리는 여인의 "후손"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원래 남녀가 만들어질 때, 생육이 축복의 중심에 있었다(1:28). 이제, 타락 후 생육의 축복은 뱀이 궁극적으로 패배하고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축복이 회복되는 수단이 된다. 모든 아이가 태어나는 고통은 하나님의 약속에 깔려 있는 희망을 상기시킨다. 해산의 고통은 타락의 허무를 말해줄 뿐 아니라, 다가오는 기쁨의 표시이다(롬 8:22-24; 마 24:8).



   (3) 남자에게(3:17-20)



   남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판결은 창조주가 주신 좋은 땅이 저주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3:17-19). 그는 땅의 소산을 더 이상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2:16). 시험자는 "먹는" 문제를 제기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하였다(3:1-3). "그녀가 먹었고…그가 먹었다.". 따라서 먹는 것에 저주를 받는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3:17).

   땅이 받을 저주도 심각하다(3:18).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상태는 2장에 묘사된 에덴 동산 창조 이전 상황으로 역전되는 것이다 (5절). 타락 전과 후에 땅의 상태가 달라진다. 현재의 땅의 상태는 인간 반역의 결과이다. 이리하여 저자는 성경 종말론의 구조에 있는 땅이 변하는 모티프를 깔아둔다(사 65:17; 롬 8:22-24; 계 21:1).

   땅의 상태에 변화가 있는 것처럼, 인간 존재의 상황도 변할 것이다(2:7). 타락으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3:19). 아담과 땅(아다마)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 아담은 자기 아내를 "하와"라고 부른다. 첫 이름 "이브"는 여자의 기원("남자로부터")을, 두번째 이름인 "하와"는 그녀의 운명("모든 산 자의 어머니")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온 자신의 아내에게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놀랍다. 여기에서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이 나타난다. 아담은 하와에게서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4. 하나님의 대책(3:21)



   2장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마치신 후에 안식하셨다고 한다(2:1-3). 그러나 타락 후에, 그리고 타락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더 생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의 벌거벗은 것을 감추기 위해 "가죽옷('or)"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가죽옷"은 동물의 죽음을 전제한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전에 "벌거벗었지만('arum)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25). 그러나 타락 후에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보고 부끄러워 숨으며,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린다(3:8). 하나님은 동물을 죽여 가죽 옷을 만든 것 속에서 희생 개념을 예기하신다. 오경의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주님은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장을 위해 옷을 만들어 그 "벌거벗음('erwa)"을 감추어, 죽지 않도록 하라고 말한다(출 28:42). 이것은 "영원히 지킬 규례이다"(출 28:43). 즉 제사장 역할의 그림자가 이미 에덴 동산에서 옷을 만들어준 사건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류로 하여금 자신의 임재를 누리고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희생제물에 근거하여 새 옷을 만들어 주셔서, 자신과의 관계회복을 준비하신다.



   5. 실락원(3:22-24)



   이 후에,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없었다. 아담과 이브는 동산 안에서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이들이 동산에서 쫓겨 나는 것은 레위기 13:46에 있는 피부병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과 유사한 점을 갖고 있다. 즉, 타락은 오염과 같은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을 잃는 사건 속에 인간 타락의 어리석음이 부각된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다 (3:5-6).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처럼"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데 있다(시 16:11).

   2:15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abad)" 그에게 "순종하도록(shamar)" 동산에 두어졌으나, 이제 타락으로 인간은 "토지를 갈고('abad)", 생명나무의 길에 못가도록 하나님께서 화염검으로 그 길을 지키신다(shamar). 이리하여 2장에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사명과 축복이 역전된다. 그렇지만, 이후에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계명을 주심으로 인간에게 주신 복을 회복하고자 하신다. 에덴 동산에서 생명나무는 "그룹들"로 지켜지는 것처럼, 시내산 언약에서도 토라는 "그룹들"로 지켜지는 언약궤 안에 있다(출 25:10-22; 신 31:24-26). 이리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통해 둘 사이의 교제가 회복된다(출 25:22). 그렇지만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으로 실패한다. 시내산 언약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새 언약으로서 생명나무의 길을 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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