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스가랴(언약적해석)

스가랴서에 나타난 메시아

호리홀리 2015. 4. 21. 12:40

스가랴서에 나타난 메시아

 

  스가랴 1-14장은 두 개의 큰 단락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락인 스가랴 1-8장은 보다 임박한 미래의 회복 공동체를 이상과 환상의 신탁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이 단락의 주제는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우주적 심판을 통한 열방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회복(슥 1:7-21; 6:1-8), 두 번째로, 하나님의 개입과 예루살렘의 정결(학 2:1-13; 5:1-11), 세 번째로, 대제사장과 지도자의 회복(슥 3:1-10; 4:1-14; 6:9-15), 네 번째로, 정의와 다가올 축복(슥 7:1-8:23).

 

  두 번째 단락인 스가랴 9-14장은 미래적, 묵시적 신탁을 통해 마지막 날(“그날”)에 성취 될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한다. 스가랴서 전체를 볼 때 신탁은 포로 후기의 이스라엘 회복과 더불어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함께 그려 주고 있다. 따라서 이 흐름과 함께 등장하는 메시아 예언은 자연스럽게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신탁을 함께 담게 된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오실 메시아를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다. 하나는 직분의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사역의 측면이다. 직분의 측면에서 스가랴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제사장, 왕과 목자다. 사역의 측면에서 스가랴는 메시아가 직분과 관련된 사역을 감당할 것을 선포하지만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은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제시되고 있다.

 


 

⑴ 제사장과 왕이신 메시아(슥 3:8-10; 4:11-14; 6:9-15)

 

  스가랴는 6:9-15에서 메시아를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통합하는 다윗의 후손으로 예언한다. 스가랴는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가서 바벨론에서 온 자들에게서 금과 은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든다(6:9-11). 그리고 이 관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운 후, ‘순’에 대한 신탁을 전하면서 메시아 예언을 선포한다(12-13절). 성전을 건축하는 인물이 바로 이 ‘순’이며 이 신탁은 오실 메시아의 정체성과 사역을 다룬다. 스가랴가 선포하는 ‘순’은 다윗의 후손을 의미 하며(슥 6:12, 참고 사 4:2; 렘 23:3-5; 33:14-26; 겔 17:22-24), 그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며, 영광을 얻고 왕의 보좌에 앉아 통치권을 행사할 것이다(슥 6:13). 이 신탁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내용은 이 메시아 왕이 제사장으로 그의 위에 앉아 왕권과 제사장직을 통합한다는 것이다. 즉, 오실 메시아가 제사장-왕임을 예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번역상의 논의가 있다. 개역한글 성경은 13절 마지막 문장(“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을 고려하여 제사장과 왕이라는 두 인물이 언급되는 것으로 번역한다(“또 제사장이 자기 위(자기자리: 개역개정)에 있으리니”). 이 번역을 따르면, 제사장이라는 또 다른 인물이 “그 자신의 위”에 있을 것이며 이 제사장은 왕권을 상징하는 ‘순’과 더불어 평화의 의논을 나눌 것으로 이해된다.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은 “그리고 제사장이 그의 오른편에 있을 것이다”라고 의역하면서, ‘순’이라는 인물 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통합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을 피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역한글 성경이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라고 번역하고 있는 문장은 히브리어 문법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제사장’이라는 단어를 주어로 보지 않고 부사구나 서술어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문장의 동사는 완료 연계형(perfect consecutive)을 앞의 ‘순’을 주어로 하는 동사 연계형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이 경우 ‘그가(‘순’) 그의 보좌에 앉아 제사장이 될 것이다‘ 또는 ’그가 제사장으로 그의 보좌에 있을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뒤따르는 마지막 문장을 메시아 안에서 통합된 제사장과 왕의 모습간의 조화(샬롬)를 의미하게 된다. 메시아 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통합되는 것은 스가랴만의 독특한 신탁이 아니다. 시편 110:4은 이미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을 선포하였다.

 

  스가랴 6장의 “순” 라고 불리는 다윗 후손이 제사장직과 왕권을 왕의 보좌에 앉아 통합하리라는 해석은 스가랴 3-4장의 신탁과 함께 살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스가랴 3장은 사탄(“고소자”)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여호와 앞에서 대적하는 장면을 스가랴가 목격하는 것으로 신탁을 시작한다(1절).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고 대신에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정한 관을 쓰게 된다(4-5절). 여호수아가 정결케 되는 사건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결케 됨에 대한 전조다. 여호와의 도와 율례를 준행할 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집(“내 집”)과 여호와의 뜰(“내 뜰”)을 지킬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더 나아가 죄 사함을 입어 정결하게 된 여호수아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예표의 사람들이 되어 여호와의 종(“내 종”)인 “순”이 날 것을 보증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9절에서 언급하는 돌은 성전이 세워질 기초석이라기보다는 4:7에 나오는 머릿돌과 연관하여 고려할 수 있다. 즉, 이 돌은 성전건축의 완성을 확증하는 증표가 되는 머릿돌을 의미하며 성전완성을 통한 죄 사함과 평안을 이루는 데 정결케 된 제사장과 여호와의 종 ‘순’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3장에서 이미 제사장과 다윗의 후손으로 올 메시아(“순”)의 중요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6장에서의 통합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과정은 4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순금 등대와 이 등대 곁에 있는 두 감람나무의 이상을 통해 스가랴는 성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축될 것(4:6)과 이 성전건축에서 다윗의 후손인 스룹바벨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4:9)을 선포한다. 스가랴의 이상에 등장하는 순금 등대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이것이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때 이 등대가 계속 불을 밝힐 수 있도록 금 기름을 내는 두 감람나무의 역할은 성전과 관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감람나무가 “기름 발리운 자 둘”이라는 14절의 설명을 볼 때 이 감람나무 중 하나는 성전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로 해석 될 수 있다. 두 감람나무는 순금 등대  (“성전”)에 금 기름을 제공하며 “온 세상의 주”를 섬기는 사역을 감당한다. 즉,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가 같은 위치에서 성전건축 과업과 성전을 이끌어 갈 하나님의 원동력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의 신에 의해 건축된 성전(슥 4:6)을 유지하고 섬기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과 성전의 회복에서 여호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에스겔의 신학적 관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성전 건축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으로 완성을 보증하는 학개의 신탁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참고, 학 2:5).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상호 보완적 역할이 6장에서는 메시아 안에서 통합되는 것으로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스가랴서의 신탁 흐름에 따라 제사장과 왕인 메시아 예언을 정리하면, 정결하게 된 대제사장이 여호와에 의해 세워지고, 이것은 성전 예배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3장). 이 대제사장은 왕과 함께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4장), 결국 왕의 보좌에 앉게 되는 다윗의 후손(“순”)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통합될 것이다. 스가랴는 이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 회복 공동체가 종교적, 정치적 질서를 새롭게 갖출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회복 공동체에서 왕과 제사장의 협력 및 중요한 역할은 이미 예레미야의 신탁(렘 33:14-18)에서 강조되었다.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서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렘 33:15)과 여호와 앞에서 제사를 항상 드릴 레위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않을 것(렘(33:18)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로기 이전에 선포하였다. 포로기가 되어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그의 성전 환상(겔 40-48장)에 이들의 역할과 중요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같은 맥락에서 포로 후기에 스가랴는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 안에서 이 두 직분이 통합될 것을 예언한다.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논증한다(참고 히 7:1-28; 8:1).

 

  스가랴는 9:9-10에서 왕이신 메시아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슥 9:9, 참고 마 21:1-11; 막 11:1-11; 눅 19:28-40; 요 12:12-19). 겸손한 왕의 모습이지만 이 왕은 우주적 평화를 선포하고 우주적 정권을 가진다.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두굿(Duguid)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시편 72편을 이 신탁의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라”(시 72:8). 이 통치의 특징은 공의(슥 9:9; 시 72:3)이며 그 결과는 우주적 평화와 구원이다(슥 9:9; 시 72:4)

 

  그러나 스가랴 9:10-11과 시편 72편 사이에 드러나는 한 가지 차이점은 스가랴서 본문은 하나님이 전면에서 적극적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시편의 본문은 다윗 왕이 적극적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가랴서에서는 이 왕조차도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개역한글 성경에서 “구원을 베풀며”라고 번역하고 있는 원어는 수동태 분사로 능동적 의미로 구원을 베푸는 것으로 해석되기보다는 구원을 받게 되는 수동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여기서 묘사되는 왕은 승리를 얻어서 등장하게 되는 왕의모습이 된다. 같은 동사가 시편 72편에서는 다윗 왕이 구원을 베푸는 장면에 능동형 동사를 사용하면서 다윗 왕의 적극적인 역할을 보여 준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 72:4). 이러한 차이는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회복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사역을 강조하는 에스겔의 신학적 관점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포로 후기의 백성이 여전히 완전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에 스가랴는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전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대적을 멸하시며 친히 그의 집을 지키는 자가 되실 것이다(슥 9:1-8). 또한 여호와께서 친히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의 병거와 마병과 활을 끊으실 것이며(슥9:10), 사로잡힌 자들을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모르시는 분도 여호와이시다(슥 9:11-17, 참고 10:6-12). 스가랴 9장에서 언급하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왕은 회복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바가 없다.

 

  결과적으로 스가랴서에서 언급되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몫이 되며 9:9에서 언급되는 왕도 역시 하나님의 이러한 개입을 누리게 되는 자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것은 에스겔 34장에서 여호와께서 적극적으로 양떼를 회복하는 사역에 관여하면서 다윗 목자를 세우시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스가랴는 에스겔의 신학적 관점과도 한 가지 차이를 나타낸다. 에스겔이 바라보는 회복이 이스라엘 안에만 한정되는 반면 스가랴는 우주적 회복의 소망 속에서 왕이신 메시아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다. 겸손한 모습을 하고 구원을 얻어 등장하는 메시아지만 그는 이방인들과 열방에 화평을 전하게 된다. 이러한 메시아 사역의 우주적 측면을 6:15의 성전건축에 관한 신탁에서 이미 암시된 바다(“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참고 슥 4:14; 8:20-23).

 

  결론적으로 스가랴가 3장, 4장, 6장, 9장에서 제시하는 메시아는 제사장직과 왕권을 통합하는 다윗의 후손이며, 그의 위치와 역할은 예배 공동체 회복에 집중하고 있는 포로기와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신학적 관점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 메시아 왕이 하나님 백성의 회복 사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지만 그의 임재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예배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⑵ 선한 목자이신 메시야(슥 10:1-12; 11:4-17)

 

  목자의 이미지로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은 스가랴에게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 주제는 이미 이전 선지자들을 통해 언급되었던 것이며 구약의 메시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유다. 목자의 이미지가 지도자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임을 구약성경과 고대 근동의 문헌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다. 특히 에스겔 34장은 스가랴가 전하는 목자이신 메시아 신탁의 배경이 된다.

 

  스가랴 10:2는 목자가 없어서 백성이 양떼와 같이 유리하며 곤고를 당하고 있음을 묘사한다. 이는 실제적으로 목자의 부재 문제가 아니라 목자는 있지만 양떼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실신한 목자의 부재 문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친히 실신하지 못한 목자들과 숫염소들에게 책임을 묻고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슥 10:3),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백성을 돌보실 것이다(슥 10:6-12). 스가랴 10:4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그의 양떼를 위해 불의한 목자들을 대신할 지도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이 지도자가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로 묘사되고 있다. 불의한 목자들을 대체할 지도자가 여호와 때문에 세움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그에게로”라는 표현의 계속적인 반복을 통해 강조된다. 이러한 문제와 해결 패턴은 에스겔 34장이 이미 선포하고 있는 바다. ①목자들의 실패, ②여호와의 심판, ③여호와의 회복 사역, ④선한 목자를 세우심. 에스겔 34:1-6은 불의한 목자들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서술하며 7-16절은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백성의 목자가 되어 돌보실 것을 약속한다. 불의한 목자들은 결국 여호와의 심판 대상이 된다(겔 34:18-22).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친히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더 나아가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목자로 세워 그의 회복 약속을 보증하신다(겔 34:23-24).

 

  스가랴는 10장에서 언급한 선한 목자의 공급을 11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 주고 있다. 하지만 11장의 목자 비유를 통해 에스겔 34장과 상반되는 신탁을 추가하면서 12장과 13장에 등장하는 찌름을 당하여 죽음을 겪게 되는 목자에 대한 신탁을 예비한다. 스가랴 11장에서 여호와가 양떼를 위해 두 목자를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여호와는 죽임을 당할 양떼를 먹일 목자를 세우신다(슥 11:4). 스가랴 선지자가 이 목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그들의 양떼를 불쌍히 여기거나 돌보지 않는 정황이다(11:5). 또한 여호와께서도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고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신다(11:6). 이 정황 속에서 스가랴는 목자가 되어 “은총”이라는 막대기와 “연락”이라는 막대기로 양떼를 먹이며 양떼 안에 은총과 연합이 있기를 기대한다(11:7). 그러나 목자는 양떼를 싫어하게 되고 양떼도 이 목자를 미워하게 된다(11:8). 목자는 양떼를 그들의 불행 가운데 그대로 방치하면서 여호와께서 양떼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음을 반영한다. 결국 목자는 두 막대기를 자르고, 양떼는 그의 고가 은 삼십을 주고 목자의 관계를 세우시는데, 이 목자는 양떼를 돌보기보다는 강포를 행한다(11:15-17). 이 목자가 실패한 목자들의 행위를 그대로 행하므로 양떼가 고통을 당하게 되겠지만, 결국 양떼를 버린 이 못된 목자는 심판 대상이 된다. 이 못된 목자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선언은 스가랴 10장과 에스겔 34장에서 선포하는 선한 목자의 등장을 다시 소망하게 한다. 하지만 이 소망은 찌름을 당하여 죽게 되는 목자를 통해서 성취된다(슥 12:10; 13:7-9). 스가랴는 12장과 13장을 통해 10장과 11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선한 목자가 고난 받는 종 메시아임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⑶ 찌름과 칼로 침략을 당하는 메시아(슥 12:10; 13:7-9)

 

  스가랴 12:1-9는 열국이 미래의 한 날에 예루살렘을 파괴하려고 모일 때 여호와께서 친히 그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을 선포한다. 이날에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한다(12:10). 결과는 대대적인 애통과 통곡이다(12:11-14). 이것은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개혁한글)” 그를 찌른 행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애통과 통곡으로 보인다(12:10). 이들이 찌른 행위를 묘사는 동사[ (다카르)]는 칼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상처를 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개역한글 성경에서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로 번역하고 있는 맛소라 히브리어 원문(BHS)을 직역하면 “그들이 그 찌는바 나를 바라보고”라고 번역된다. 이와 같이 맛소라 본문을 따라 번역할 경우, 그들이 찌른 자는 여호와(“나를”)를 의미하게 된다. 즉, 그들은 여호와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이것은 추상적이거나 비유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상처를 의미함)에 애통하며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 고통을 경험하심으로써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회개하고 죄 사함에 이르게 된다(참고, 슥 13:1). 여기서 언급하는 찌름을 당한 자는 스가랴서의 흐름을 고려할 때, 11:4-14에 나타나는 양떼에게 거절당하는 목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여호와와 목자가 동일시되는 대목이다. 이 목자가 13:7에서는 칼로 침을 당하는 자로 묘사되며 여호와의 짝된 자(“내짝된 자”)로 불린다. 따라서 여호와는 이 목자의 거절당함(11:4-14), 찌름을 당함(12:10), 또한 칼로 침을 당함(13:7)을 통하여 이 고통에 참여하기에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이 찌른 자가 여호와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고난 받는 종을 통해 여호와는 이 고통에 참여하시며, 스가랴 12:10의 찌름을 당한 자의 모습을 신약의 저자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께 적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참고 요 19:37; 1:7). 스가랴 12장에서 언급하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의 애통과 통곡은 단순한 괴로움의 표현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애통과 통곡이 13:1에서 죄 사함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족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스가랴 12:10에서 언급하는 찌름을 당한 자는 13:7에서는 칼로 침을 당하는 목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치는 행위가 여호와에 의해 행하여진다. 즉, 여호와께서 칼을 휘두르시고 이 칼로 그의 목자(“내 목자”)를 치신다. 이것은 이사야 53;10에서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 짝 된 자”라는 표현은 이 목자가 신성을 여호와와 함께 나누고 있는 자를 암시하며 “내 종”이라는 표현(참고, 슥 3;8)과도 평행을 이룬다. 이 목자가 칼로 침을 당할 때 양떼가 흩어짐과 심판을 경험하게 된다(슥 13:7-8, 참고 단 9:26). 그러나 삼분의 일은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목자의 죽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와 그의 백성 간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내 백성”과 “내 하나님”). 마태복음 26:3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를 버리게 되는 것을 이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라 기록된바 내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스가랴는 에스겔의 선한 목자이시며 제의적 역할을 감당하시는 메시아의 이미지(겔 34:23-31; 37:24; 40-48장)를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사 53장)와 하나로 묶어 찌름과 칼로 침을 당하는 목자(슥 12:10; 13:7)로 묵시적 신탁을 통해 전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그의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시는 방법이며 창세기 3:15에서 언급하는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신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를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증거 한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8:27). 또한 복음서 저자들은 스가랴의 메시아 신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19:34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창에 옆구리를 찔리셨을 때 물과 피가 흐른 것을 기록하며 예수님의 확실한 죽음을 전한다. 하지만 같은 장 37절에서 저자가 스가랴 12:10을 인용하는 것을 볼 때 이 물과 피는 아마도 두굿이 지적한 것처럼 스가랴 13:1에서 언급하는 속죄하는 물과 칼로 침을 당하여 죽음에 이를 때 흘리게 되는 피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속죄와 언약 관계 회복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가랴 10-13장의 흐름을 목자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10장에서 여호와는 불의한 목자들을 대체할 그의 목자를 제공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실제로 제공하시는데, 양떼는 이 목자를 거부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슥 11:4-14). 하지만 여호와는 이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그들의 행위에 대해 애곡하고 회개에 이르게 한다(슥 12:10). 양떼가(칼로) 찌른 목자(슥 12:10)는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칼로 치심(슥 13:7)의 대상이며, 이 목자의 죽음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남은 자들(“삼분지 일”)의 언약 관계가 회복되며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참고 슥 13:1). 여호와와 그의 백성 간에 위치하여 백성의 죄 사함과 언약 관계를 회복하는 목자의 중재자적 역할은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서 왕의 역할 속에서 이미 그려진 바다.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 따르면, 왕은 자신과 백성의 속죄를 위한 제물을 제공하는 제의적 책임을 감당하는 인물이다(참고, 겔 45;15, 20, 22) 왕이 속죄를 위한 제물을 제공하지 않으면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속죄제를 드릴 수가 없게 된다. 다라서 백성의 속죄를 위해 왕의 제의적 역할은 중요하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려 주는, 속죄 제물을 제공하는 메시아적 왕의 중재적 역할이 양떼로부터 버림을 받고 찌름을 당하고 여호와의 칼에 죽게 됨으로 성취될 것임을 스가랴 선지자는 선포하는 것이다. 스가랴서에 제시되는 메시아 신탁의 배경이 에스겔서에만 제한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시간적, 신학적 관점의 연결성을 고려할 때 이들간의 밀접한 관계를 또한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