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스가랴(언약적해석)

스가랴서12:1-13:6,예루살렘의 구원

호리홀리 2015. 4. 21. 11:07

예루살렘의 구원(12:1-13:6)

 


 

1)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보호하실 것이다(12:1-9)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뜻하지 않고 포로 귀환 후 새롭게 형성된 이스라엘 사회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경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맛사’는 흔히 동사 ‘나사’(들어 올리다, 지고 가다)에서 유래한 명사로 간주되며, ‘짐’(burden)으로 번역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전해 받아서 백성에게 가져가 선포해야 한다는 점에서 선지자가 지고 가는 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R. L. Smith). 그러나 성경에서 “선지자의 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는 반면, “바벨론의 짐”(사 13:1) 혹은 “니느웨의 짐”(나 1:1)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는 것을 볼 때, ‘맛사’는 선지자가 지고 가야 하는 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 지우시는 ‘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들을 때 듣는 자에게 짐을 벗게 하는 능력이 있게 하기도 하고 듣는 자에게 그 말씀이 선언하는 책망과 심판으로 짐을 지듯 지고 가야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는 ‘맛사’는 경솔히 대할 수 없는 엄중한 말씀이며,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경고가 된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지만 침공하는 열국의 눈에는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술잔,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약한 성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은 작은 성이며, 이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민족들은 그 수와 힘에서 예루살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강하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작고 연약한 예루살렘이 크고 강한 열국 군대를 이길 것이다. 이 약한 예루살렘이 열국들에게 그들이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릴 술잔이 된다. 예루살렘이 어느 정도 파괴되며, 그 백성이 고난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루살렘이 먼저 여호와로부터 분노의 잔을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사 51:17). 하지만 예루살렘은 더 이상 그 잔을 마시지 아니할 것이며, 잔은 열국 백성에게로 옮겨질 것이다(사 51:22-23; 렘25:15), 열국이 마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곧 예루살렘이다. 열국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힘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 이 예루살렘이라는 돌을 들겠지만, 돌을 든자가 그 돌의 무게 때문에 크게 상할 것이다. 열국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셨다. 예루살렘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자기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인하여 힘을 얻게 된다(슥 12:5). 유다는 불이 되어서 자기를 공격하는 열국을 태울 것이다(슥 12:6). 유다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열국을 멸하시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이다(슥 12:9). 사람의 결심은 바뀔 수 있고, 결심을 굳게 지키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결심한 대로 이룰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세상을 존재하게 하셨고, 세상의 역사를 만드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포로 이후 사회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의 세 집단으로 구분 될 수 있다(슥 12:7). 다윗의 집은 왕족이며, 예루살렘 거민은 관료와 제사장을 비롯한 지도층이 주된 구성원이며, 유다는 평민 계층을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만 구원하실 것이 아니라, 유다는 구원하시며, 유다의 영광을 예루살렘의 영광보다 못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스가랴서는 왕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실 것이다(슥 14:9). 예루살렘으로 오는 열국의 백성은 다윗과 솔로몬을 만나려고 오는 것이 아니며, 여호와를 경배하고 그에게 예물을 드릴 것이다. 후에 형성될 새로운 사회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유다 족속을 똑같이 귀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선언한다(슥 12:7). 메시아로서의 왕이 예루살렘에 임할 것이고(슥9:9) 그 왕은 공의로우며 그가 구원을 베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귀를 타는 겸손한 왕이며 직무와 책임은 있으나, 특권은 배제된 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정치 조직에도 변화가 생겨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2) 배반했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회개하고 애통할 것이다(12:10-14)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혜를 구하며 용서를 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슥 12:10), 독자를 잃은 것처럼 통곡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조금씩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들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잠겨 철저하게 변화하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을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것이 용서라고 한다면 스가랴서이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돌아 오셔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건설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그렇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성도의 긷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므깃도 골짜기에서 요시야 왕이 죽었을 때, 유다 온 백성이 통곡하였던 것처럼 큰 통곡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슥 12:11).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에 돌아오셨다. 이제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부르셔야 한다. 예루살렘 주민, 곧 교회는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휘파람”에 응답해야 한다(슥 10:8). 그 첫 단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마음으로 무장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다.

 


 

3) 모든 우상과 우상의 예언자들이 사라질 것이다(13:1-6)(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하리라)

 


 

   “그날에”라는 구약의 묵시적이며 종말론적인 예언의 중심 주제인 ‘야훼의 날’( 욤 야웨)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죄악과 모순을 해결하시고 야훼 하나님이 통치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날, 그날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강림하시는 날이다. “그 날”은 이 땅의 죄악을 모두 씻고, 인간이 통치하는 이 세상의 모든 모순을 해결하시며,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는 날이다.

 

  13:1절에 ‘샘’은 히브리어로 ‘마코르"로서 구약에서 자주 생명의 근원에 대한 비유로(렘 2:13; 17:13; 시 36:9; 잠 10:11; 14:27; 16:22) , 그리고 기쁨의 근원에 대한 비유로(참 5:18) 사용한다. 생수의 샘(마코르)이 되시는 야훼를 버리고, 우상숭배죄에 해당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에 대해서 스가랴 13:1에서는 야훼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죄, 특히 야훼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모든 자의 죄를 씻어 주시는 샘을 열어 주시겠다는 복음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그날에’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하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며,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을 영원히 열어 주시는 야훼 하나님에 의한 것이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인간 원죄의 가장 악한 열매다. 여기서 ‘우상의 이름’은 우상의 실재와 본질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는 것은 우상 그 존재 자체를 완전히 소멸하겠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와 함께 ‘거짓 선지자들’과 ‘더러운 사귀’(  루아흐 하투므아, 그 더러움의 영)를 이 땅에서 제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우상과 거짓 예언자와 더러운 영을 제거하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전히’ 거짓 예언을 하면, 이제는 그 낳은 부모가 그 낳은 자식을 먼저 칼로 찔러 악을 제거할 것이다(3절). 또 거짓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4절), 이제 자신의 실체를 감추기에만 급급해진 그들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라 농부’라고 말할 것이다(5절). 거짓말을 통해 백성을 미혹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비참함과 비굴한 존재가 될 것이다.

 

  거짓 예언자들 또는 우상숭배자들이 종교 의식 중 황홀경 속에서 예언하면서 자해함으로써 생긴 상처들로, 자신이 우상숭배자 또는 거짓예언자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는데 그 상처를 ‘내 사랑하는 자들의 집에서 얻어맞은 것’(6절)이라고 말함으로써 여전히 구차스러운 변명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