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스가랴(언약적해석)

스가랴서11:1-17,하나님을 잊지 말라

호리홀리 2015. 4. 21. 11:03

5. 하나님을 잊지 말라(11:1-17) : 요단이 쓰러지다

 


 

1) 권력자의 파멸을 노래한 예언적 조롱(1-3)

 


 

  몰락하는 정치적 적대자는 지상의 어떤 세계적 권력자다. 그의 거창한 세력과 이로 인한 거드름 피우는 모습은 레바논의 백향목(히말라야 삼나무)이나 다른 화려한 나무들 또는 바산의 상수리나무에 비유되지만 이제는 자신을 파멸시킬 불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야 한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는 그의 저항적인 힘으로 유명하다(참고 사 2:13; 겔 27:5). 그러나 그도 비슷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세계적 권력자의 욕망과 착취의 모습은(특징상 동물 비유로 바뀌어)요르단 숲의 사자에 비유했다(3절). 목자와 사자의 비유는 예례미야 25:34-38(특히 36절)을 연상시킨다. 레바논의 백향목이나 바산의 상수리나무는 그들의 호화로움으로 자랑거리가 되었으나, 창조주의 뜻과 의도에 어울리지 않는 거만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몰락하게 된다. 그들이 몰락할 때 비참함은 그들이 화려함과 맞물려 더욱 처참하다(11:1-3). 세계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명이 다한 다음에는 그들 역시 하나님에 의해 뽑히게 된다. 


 

2) 은총과 연합 막대기의 파손(4-16)

 


 

  양떼와 그들의 목자들과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목자와의 관계를 예언자의 상징적 행동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달한다.

 


 

(1) 메시아적 목자의 파송(4-6절)

 

  하나님은 ‘너’라고 지칭하는 어떤 목자에게 양떼를 먹이라 명령하신다.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여기에서 너는 ‘메시아적 목자’라 칭한다. 이 이름 없는 메시아적 목자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잡아먹힐 양떼를 목양해야 한다. 그는 선한 목자와 같이 잡아먹힐 양떼의 가련한 상태를 직시하고 불쌍히 여긴다. 대개 양떼는 살아서는 그의 주인에게 우유와 양털을 선물하며,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을 선물한다. 따라서 그의 주인이 그를 도살할 때 특별한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은 당연하며, 돈을 받고 그들을 팔아서 그 소득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5절에서는 목자들이 양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떼는 실제 동물인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상징된 인간을 의미한다. 그들을 잡는다는 것은 지독하게 착취하고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의 소득(불의한 이익)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거리다. 따라서 죄의식이 없다는 것은 도덕적 양심의 마비를 의미한다.

 

  양떼는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 민족(10, 14절)이며 양떼의 소유자들은 예레미야 23:1-2와 에스겔 34장의 목자들과 같이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층 인물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메시아적 목자는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6절)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이미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목자의 활동이 실패로 끝났기에 양떼에게 처벌을 내리고 그 후에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자, 하나님 자신이 내린 처벌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결의를 천명하신다. 결코 치유될 수 없는 황폐함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이셨으나, 이제는 그들의 안전이 하나님에게 관심 밖의 일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2) 메시아적 목자의 하나님 명령 수용(7절)

 

   메시아적 목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였다(7절). 이스라엘 백성은 잡혀 죽을 양떼처럼 비참한 처지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목양하여 잘 되게 하려고 막대기 둘을 취하여 그들의 목자로서 활동하셨다. 이 두 막대기 중 “은총”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은혜의 관계라고 가르치는 것을 대표하고, 다른 막대기 곧, “연합”이라는 것은 유대인과 유대인 사이에 형제적 연합을 배양하려는 사역을 상징한다.

 


 

(3) 메시아적 목자의 직무 포기(8-9절)

 

 

 

  생각이 깊고 선한 주인은 자기의 양떼를 잘 돌보지 않고 게으르며 책임을 다하지 못한 목자를 마땅히 교체할 것이다.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여호와 하나님은 목자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목자를 한 달 동안 세 목자를 제거했다. 이유는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대리인의 실패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으며, 양떼도 그의 보호에 싫증을 느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자기를 낮추어 그 백성을 자신의 양떼로서 돌보셨으며, 모든 주의를 기울이셨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 했고 심지어는 조롱까지 했다. 8하절의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 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는 이유 설명으로 7절에서 말한 (메시아적)목자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을 알 수 있다.

 


 

(4) 직무 포기의 결과 : 은총막대기의 파손(10-11절)

 

  목자는 더 이상 그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을 것이며(9상절).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막대기는 부러졌다(10상절), 뿐만 아니라 메시아적 목자가 더 이상 그들과 상관하지 않겠다(9상절)는 설명에서 이제 무엇이 초래될 것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9하절). 그가 그의 직무를 포기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그는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꺾어 버렸다(10상절). 이러한 결과가 직무 포기로 나타난 것이다. 은총 막대기의 파괴가 ‘나의 언약이 파기되었다’(10하절).은총의 막대기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모든 민족에게서 지켜 주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외부에서의 침략 없이 평화로이 살 수 있었으며, 국가의 방어를 위해 어떤 무기도 필요치 않았으나, 이제는 사방에서 몰려올 수 있는 민족들의 침략의 공포 속에 살아가야 하며, 화평의 언약과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무력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의 지도자가 되시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증거한 것으로 보인다.

 


 

(5) 또 다른 죄악의 지적(12-13절)

 

  직무를 포기한 메시아적 목자가 깨달아 참회(돌이킴)하지 않음으로서 또 다른 죄악이 이어진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목자의 직무에 상응하는 품삵을 달라고 했다. 이것은 돈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품삯을 주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았으나, 품삯을 은 삼십 개로 정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메시아적) 목자의 직무를 천한 노예 값으로 본 것이다. 느헤미야 시절 총독이 하루 생활비로 지불받는 금액이 은 사십개다(느 5:15). 총독의 하루 생활비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수고를 무가치하고 하찮은 것으로 간주했다.

 

목자이신 여호와 곧, 메시야께서 그의 사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평가를 너무 낮은 것으로 보셨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토기장이 에게 던지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그 평가를 잘못된 것으로 알아 업신여긴  뜻이다 


 

(6) 다른 죄악의 결과(14절)

 

  “내가 또 연합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꺾었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리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더욱 심각히 내어 버리리라는 행동을 보여준다. “연합”이란 것은 유대인들끼리 서로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호와께서 연합의 “막대기를 꺾었으니”라는 것은, 저희들의 서로 합하는 은혜를 걷우셨다는 뜻이다. 이 예언과 같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저들의 국운은 날로 쇠하고 저들 사이에 불화와 충돌이 심각하여졌다. 이미 귀향 직후에 학개는 북쪽 사람이 성전재건에 참여하는 계획에 반대했으며(학 2:10이하), 기원전 4-3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역대기 역사서에서는 전적으로 반사마리아적인 경향을 띠었다.

 


 

(7) 무익한 목자에 대한 상징적 행동(15-16절)

 

  여호와께서는 메시아적 목자에게 명령하여 “어리석은 목자(쓸모없는 목자)로 분장하고 그 구실을 하라”(15절)고 하셨다. 이러한 위임은 참된 목자의 희화된 상으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함으로 4-5절에서 묘사된 양떼의 소유주를 훨씬 능가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는 무익한 목자, 이름만 목자라는 칭호를 갖고 그의 의무는 대충 무시해 버리는 ‘겉 모양 목자’라 불렸다.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압제를 전적으로 받게 되어 필경 멸망하게 되었다. 우리 본문에 “한 목자”는 로마 정권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여기 “한 목자”를 로마 정권에 국한시키지 않고 교회의 일군으로서 선한 목자의 책임을 하지 않는 자로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목자의 양태에 대하여 본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그는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한다.’ 세심한 목자는 양떼에게서 떨어지거나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 목자를 따라다니는 데 익숙하지 않은 연약한 어린 양들은 양떼를 떠나 헤매는 일이 많고, 쉽게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런 양들을 찾는 것이 선한 목자의 의무 가운데 하나다. 또 하나님께서 세우신 어리석은 목자의 몇 가지 악덕은 다음과 같다. 없어진 양을 기억도 하지 않으며, 흩어진 자들을 찾아오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않으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않으며, 살찐 자의 고기를 착취하며, 잔인하게 양떼를 취급하여 그 발굽을 찢는 것이다. 선한목자가 되려면, 위에서 기록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할 것이다. 곧, 없어진 신자를 찾아 올 것, 상심한 신자들을 치료하여 줄 것, 강건한 신자들을 먹여서 끝까지 강건하도록 하여 줄 것, 잔인하게 행하지 말고 언제나 선량하게 행할 것이다(16절).

 


 

(8) 저주의 선언(17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패역함을 응징하시며 보응의 도구로 사용하신 목자에게 일정 기간 권력을 허용하시고, 때가 지난 다음에는 권력을 다시 빼앗아 버리신다. 단순한 욕망과 탐욕과 포악성에 사로잡힌 이들을 하나님은 사명감도 없고 무지한 자들에게 봉사하는 도구로 쓰시기로 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는 불경건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때 하나님은 그를 혹독하게 처벌한다. 칼로써 그의 기관들을 잘라내 버리신다. “팔도, 오른쪽 눈도 칼에 맞아서 팔은 오그라들고 눈은 아주 멀어 버려라.” 이는 시드기야가 겪었던 운명과 같다(참고 렘 3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