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스가랴(언약적해석)

스가랴서14:1-21,그날에

호리홀리 2015. 4. 21. 12:35

야훼의 날, 그날에(슥 14:1-21)

 


 

1) 열국과 예루살렘 사이에 전쟁이 있어서 예루살렘 백성에게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다(14:1-8)

 


 

  여호와의 날에 그 심판은 이방 민족들을 도구(2상절)로 사용하여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백성에서부터 시작된다(참고 암 5:18; 사 22:5; 습 1:2-18; 계 16:14-16). 그날에는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백성 중 절반이나 사로잡혀 갈 것이나 남은 자들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스가랴 14:3 이하에서는 야훼의 날에 있을 구원을 묘사한다. 야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치러온 이방 민족들에게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시고, 친히 감람산에 임재하여 서시며 지진과 같은 자연계의 현상도 사용하셔서(참고 웃시야 왕 때 지진에 관해서는 암 1:1)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기 백성, 즉 구원받은 성도 및 천군천사와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피할 길을 내주신다(참고 마 25:31; 살후 1:7 등).

 

  야훼의 날, 그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왕국과 구원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6-7절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 질서의 변화가 있을 것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해와 달과 같은 세상의 빛들은 사라지고 야훼 하나님의 빛이 영원히 빛나는 세계가 온다는 말씀이다(참고 사 60:19-20; 계 21:25). 그날이 언제인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벧후 3:8-13; 행 1:6-7; 마 24:36) 이어서 8절에서는 그날에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 계절에 상관없이 동해와 서해로 흘러간다는 것이다(참고 계 22:1-5). 여기서 예루살렘은 종말에 나타날 새 예루살렘이며(계 3:12; 21:2 등), 동해와 서해도 각각 염해(사해)나 지중해로 축소할 이유가 없다.

 


 

2) 여호와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시고 예루살렘을 영화롭게 하신다(14:9-21)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왕권을 배척한 것은, 그들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던 그 때 부터이다(삼상 8:7). 그 후에 그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의지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수리아에게, 어떤 때에는 애굽에게, 어떤 때에는 앗수로에게 의뢰하였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한 행동 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필경 바벨론에 잡혀 갔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당하였으니 하나님의 왕적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함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대종말에 하나님께서만 왕으로 나타나실 터인데,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오직 참된 것 하나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현세에는 하나님을 잘못 깨달은 미신도 많고, 그릇된 종파들도 많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 이후에는,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님을 참되이 알기 때문에 그를 부르는 이름이 하나 뿐이다.

 

  여기 10절에 “아라바”는 “평지”를 의미 한다. 이 귀절의 주요한 뜻은, 예루살렘이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 두 번째로는 그것(예루살렘)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되리라는 것이다(Calvin). “게바”는 베냐민 지경의 북쪽에 있었고, “림몬”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다. 그러면 게바에서 림몬까지가 “아라바” 곧, 평지 같이 됨은, 성전이 있는 지점을 높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라는 말씀은, 이사야가 말한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사 2:2).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여호와의 종교가 이방나라에 주도권을 가지게 됨을 비유한다.

 

“그 본처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사로 잡혀 갈 때에 훼파 되었던 성전이 이제 스가랴 시대에 재건되어 원상회복 될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선지자는 그것으로써, 주님의 재림시에 신도 혹은 천국이 완성될 것을 가리킨다.

 

  “베냐민 문”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었고, “첫문”은 그 서북편 구석에 있었고, “모퉁 이 문”은 그 동북편 구석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넬 망대”는 예루살렘 북편에 있었고, “왕의 포도주 짜는 곳”은 그 남편에 있었다(W.C. Erdman).

 

  선지자가 위의 모든 지점의 이름들을 들어서 예루살렘의 한계를 가리킨 목적은, 앞으로 재건될 예루살렘의 영광이 본래의 그것과 같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겸하여 이 묘사는, 주님의 재림시에 나타날 천국의 영광을 예표하는 것이다.

 

 

  스가랴 14:12-15절에서는 예루살렘을 공격한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슥14:12).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던 원수들의 비참한 정경을 보여준다. 곧, 그들은 신벌을 받아서 살이 썩는 전염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 날에 하나님의 백성을 치려던 원수들이 서로끼리 원수 되어 공격하므로 자멸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원수들 중에 종종 있었다(삿 7:22; 삼상 14:20; 대하 20:23). 13절 역시 원수들이 겪을 지중지란의 혼란상을 말한다(참고 겔 38:18-23; 삿 7:22; 삼상 14:20). 14절엔 유다가 예루살렘 전쟁에 참가하여 원수들에게서 전리품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참고 대하 20:25; 겔 39:10). 15절은 적군이 사용하던 군용 가축(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가축)들에게 미칠 재앙을 말한다.

 

  마지막 14:16-21절은 스가랴서의 총 결론인 동시에 묵시적 종말론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과 그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16절 말씀에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신 뒤에 만국은 주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 받은 것

 

을 감사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만국의 민족들이 이와 같은 것을 지키는 목적은, 저

 

들도 세상에 살던 동안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신(특별히 영혼이 망하지 않게 해 주신) 은혜를 회고하며 감사하려는 것이다. 여기 “초막절” 이라는 것은 반드시 옛날 유대인이 지킨 절기와 같은 시기라고 할 것은 없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행위를 중점으로 말하는 것이다.  17-19절에 있는 말씀은, 천국에는 이방 국민이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감”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참된 신앙 행위를 구약적 표현으로 말함이다. “비를 내리지 아니함”은, 사람이 살 수 없도록 된 자연계의 재앙이다. 이런 재앙 아래서는 생명이 근절될 것이다. “창일함이”라고 쓴 소자의 어귀는, 히브리 원문에 없고, 그저 “(그들에게) 있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이는 곧 “비가 있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번역자들이 “창일함이” 라는 말을 가지고 보역한 것은 애굽에서는 농사를 비에 의지하지 않고 나일 강수의 창일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굽에도 비가 전연 내리지 않으면 못산다. 이 귀절들이 여호와의 세계적 왕권을 말하는 것은, 그 때 곧, 선지자 시대의 유대인들로 하여금 여호와 경외를 강화하게 한다. 유대인들은, 그 때에 자기들만이 여호와를 섬기고 있었으므로, 여호와 종교의 절대성을 아직 실감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선지자가 이렇게 장차 만국이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말할 때에, 그들(유대인들) 은 더욱 여호와에게 대한 신앙을 힘 있게 가지게 될 것이었다.

 


 

  야훼께 경배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세 번씩(16, 18, 19절)이나 “초막절” 축제(참고 레 23:34; 민 29:12 이하 등)를 지키는 것과 연관시키는데, 구약 전통에서 초막절은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구원하신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종말론적으로  초막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애굽이나 이방 민족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거절한다면, 재앙(슥 14:12, 15)과 벌(가뭄, 18절)을 받게 된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이것은, 주님의 재림 후에는 만물이 모두 다 거룩 되어, 성별 제도가 전연 없을 것을 가리킨다(계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참조). 속된 것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말 방울”과 또는 “하나님 전에 모든 솥”도 다 거룩할 것이다. 하나님 전에 모든 솥은 제단 앞 주발만큼 거룩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 이후에는 그 구분이 폐지된다.

 

“말 방울”이나 “솥”이나 “제단 앞 주발”은, 구약적 표현이니, 선지자는 구약 시대에 살았으니 만큼 말할 때에 이런 표현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표현들을 가지고, 그가 나타내는 것은, 주님의 재림 이후 세계는 만물이 마찬가지로 거룩할 터이니 성별 제도가 전연 없으리라는 뜻이다.

 

스가랴서 14:21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도 거룩하다는 뜻으로 말한다. “고기를 삶”는다 함은, 제사의 소용으로 고기를 삶음이다. 이것은, 역시 전에는 속되다고 하던 것이 이때에 와서는 거룩 되어지리라는 뜻이다. 이것도 구약식 표현이니, 우리는 그 표현의 형식에 착안하지 말고 그 내용을 취하여야 한다. 그 내용은, 주님의 재림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다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는 실제에 있어서 구약식 성전 제도나 제사 제도가 없다. (계 21:22 참조).

 

“그 날에는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여기 이른바 “가나안 사람”이라는 말은,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자를 가리킨다(창 9:25; 레 18:24; 신7:2, 9:4). 이는 혈통적으로 가나안 사람을 이름이 아니고, 마음으로 가나안 사람됨을 의미하나니 주님의 재림으로 세우신 영광 세계에는 그런 사람은 전연 없다는 것이다(계 21:22,27). 위의 모든 말씀은, 천국이 영광으로 완성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