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스가랴(언약적해석)

2. 스가랴서의 역사적 배경

호리홀리 2015. 4. 21. 09:30

2. 스가랴서의 역사적 배경

 


 

(1) 학개와 스가랴의 이전 상황(주전 538-521)

 

  학개와 스가랴는  포로 후 시대 선지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을 이해하려면 유다의 포로 귀환에 관한 역사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에스라서가 이 시대적 배경을 다룬다.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멸망시킨 바벨론 역시 페르시아(=바사)에게 멸망당하게 된다(주전 538년). 뒤에 바사의 왕이었던 고레스(Cyrus Ⅱ, 주전 559-530년)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다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조서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데, 이것이 바로 ‘고레스 칙령’이다(스 1:1-4). 이 조서로 정치적 지도자 스룹바벨과 종교적 지도자 여호수아(혹은 예수아)를 중심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노래하는 자 200명과 노예들 7,337명을 제외한 당시 귀환자가 대략 42,360명이라고 기록한다(스 2:64). 이들이 귀환한 것이 바로 1차 귀환으로 주전 536년에 일어났다. 새로 조직된 통치자로 임명된 세스바살(스 5:14)은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인솔하였고 (스 1:11), 여호와의 전을 재건축하기 위해서 성전 지대를 놓았다(스 5:16)

 

  이들은 귀환하여 번제와 제사를 회복하여 드렸다(스 3:1-7). 그러나 이러한 성전재건에 대한 역사는 반대에 부딪혀 중단되고 말았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종교혼합적인 사마리아인들을 배제하였는데, 아마도 거절당한 사마리아인들이 성전건축 작업을 방해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학개의 설교에 의하면 자신들의 집과 회복에만 관심을 가진 적극적이지 못한 태도들도 문제가 되었다(학 1:4, 6). 결국 이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혀 536-520년, 무려16년 동안이나 성전건축에서 손을 놓게 된다(스 4:24).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학개가 성전재건축을 위한 예언을 하게 되고 감동을 받은 백성이 모두 함께 성전 역사를 같이 해서 다리오 왕(Darius, 주전 522-486) 6년에 성전을 마침내 완성하게 된다(스 6:15).

 

 


 

(2).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당시 상황(주전 521/520-516년)

 


 

  ① 학개와 스가랴

 

  1차 포로 귀환(주전 536년)하여 성전재건을 시도하다가 실의에 빠져 16년이나 멈추고 있는 백성에게 선지자 학개는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그가 1차 포로들과 같이 귀환하여 왔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는지 성경은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준비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급박한 시간 가운데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보여 주어, 다리오 왕 2년 6월 1일(학 1:1, 대략 521/520년 8월 29일). 7월 21일(학 2:1, 같은 해 10월 17일), 9월 24일(학 2:10, 20, 12월 18일)까지 대략 4개월에 걸쳐 설교하고, 백성에게 일어난 반응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학개의 설교를 듣고 난 뒤 그들이 실제로 성전건축 역사에 착수한 것은 학개에게 말씀이 임한 뒤 23일 후의 일이었다(학 1:15). 또한 선지자 스가랴 역시 학개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였다. 본문에서는 연도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세 번 나타난다(학 1:1, 7; 7:1). 처음 언급인 학 1:1에는 “다리오 왕 2년 8월”이라고 하는데 학개가 말씀을 받은 지 불과 두 달 뒤의 일이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 말씀을 받았다(학 1:7). 학개가 같은 해에 계속 말씀을 받은 것과 달리, 스가랴에게는 2년 후(주전 519/518년) 9월(슥 7:1)에도 말씀이 주어졌다. 비록 정확한 연도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학개서 9:1의 언급은 주전 480년 이후라고 추정한다(레온 우드, 1990:528). 백성은 실제로 성전건축에 힘썼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와 교제에 대한 회복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었다(슥 1:2-6, Merrill, 1987:496). 환상과 메시지로써 종국적으로 회복될 하나님의 일을 잊지 않도록 격려하였다. 즉, 학개의 현재적인 하나님의 일, 그리고 스가랴의 종국적인 하나님의 일을 백성에게 보여 줌으로써 새롭게 회복하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학개와 스가랴의 본문을 연대별로 열거하면 아래와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가. 학개의 첫 번째 메시지(학 1:1-11; 스 5:1, 주전 520년 8월 29일)

 

나. 성전 재건축(학 1:12-15; 스 5:2,주전 510년 9월 21일)

 

다. 학개의 두 번째 메시지(학 2:1-9, 주전 520년 10월 17일)

 

라. 스가랴의 설교 시작(슥 1:1-6, 주전 520년 10/11월)

 

마. 학개의 세 번째 메시지(학 2:10-19,주전 520년 12월 18일)

 

바. 학개의 네 번째 메시지(학 2:20-23,주전 520년 12월 18일)

 

사. 성전 재건축에 관한 편지(스 5:3-6:14, 주전 519/518년)

 

아. 스가랴의 여덟가지 환상(슥 1:7-6:8,주전 519년 2월 15일)

 

자. 여호수아의 면류관(슥 6:9-15, 주전 519년 2월 16일(?))

 

차. 회개 촉구와 축복의 약속(슥 7-8장, 주전 518년 12월 7일)

 

카. 성전의 봉헌(스 6:15-18, 주전 516년 3월 12일)

 

타. 스가랴의 마지막 예언(슥 9-14장, 주전 480년, Barker, 1985:598)

 


 

②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역할

 

  학개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백성에게 성전을 짓도록 요청하였지만 그와 함께 하여 성전재건을 도운 자들은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였다(학 1:1). 스룹바벨은 고레스 칙령 후 즉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로 추정되지만(참고 스 2:2; 느 7:7), 정확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그가 고레스 시대에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관여한 자로 묘사되지만(스 3:1-4:4), 다리오에게 보낸 편지와는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다(스 5:7-17). 그가 정확히 언제 왔는지 알 수 없고 처음 성전건축의 기초를 놓은 것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는 그의 이름에 대한 언급이 없다(에 6:15).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학개가 설교할 때 그가 하나님의 전 역사를 감당한 자였다는 것이다(학 1:14). 또한 학개는 그를 향하여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의 인”으로 삼는다고 예언한다(학 2:23).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서(대상 3:16-19), 회복된 다윗의 왕가에 대한 소망으로 남는다   스가랴서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순”(the branch)으로 예표 되었다(슥 3:8).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은 주님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들로 묘사되었다(슥 4:14). 이런 면에서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메시아적인 인물들을 예표 한다. 즉, 스룹바벨은 다윗 왕가의 대표로, 그리고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적인 인물을 예표 한다는 것이다

 


 

(3). 학개, 스가랴 이후 상황(주전 516-445)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되고 백성은 하나님이 회복하실 메시아 왕국을 통하여 종국적인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이어서 유다 백성의 계속적인 귀환이 이루어졌는데, 바로 2차 귀환(주전 458년, 에스라)과 3차 귀환(주전 445년, 느헤미야)이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7년(Artaxerxes Ⅰ, 주전 464-423년)에 귀환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주전 458년에 귀환하여 성벽을 재건하였다(느 2:1).

 


 

(4). 포로귀환 후 성전재건

 


 

  주전 539년, 페르시아 제국의 대왕 고레스(주전 559-530년 통치)의 유다 포로 귀환령에 따라(참고 대하 36:22-23; 스 1:1-4), 제1차 귀환이 538년 세스바살의 지도하에 이루어졌으며, 에스라 3:10에 의하면 주전 536년에 예루살렘에 제2성전 기초를 놓았으나, 주변 이방 원수들의 방해 때문에 중단되고 있었다(스 4:24).

 

  제2차 귀환이 다리오 왕(주전 522-486년 통치) 즉위 다음해인 주전 521년에 다윗의 후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예수아)에 의해 주도되었으며(참고 스 2:2; 느 7:7; 12:1), 이들은 주전 520년경 그동안 15년이나 중단되었던 성전재건에 착수하여 다시 성전의 기초를 쌓았다(학 2:18; 슥 4:9; 8:9). 이때 학개 예언자가 나서서 성전재건에 백성을 독려하였고, 그와 함께 스가랴 예언자도 예루살렘 제2성전 건축을 위해 도왔다.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이방인들의 음해 공작이 에스라 5:3 이하에 기록되었는데, 당시 다리오 왕이 고레스의 조서를 조사한 후 예루살렘 성전건축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방해하던 이방인들로 협력케 하였으며,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기 때문에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하여 다리오 왕 제6년 아달월 삼일에(주전 516/515년 2월 18일경) 완공되었다(스 6:14-15).

 

  성전재건 당시 외부 원수들의 방해도 있었으나, 유다 사회 내부의 원수들의 방해도 있었다. 내부의 원수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서 귀환한 포로들의 경제 사정의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학개는 유다 사람들이 자기 집은 먼저 잘 지어 놓고 살면서, 성전은 황폐하게 방치하는 유다 백성의 잘못을 지적 하였다.(학 1:4). 또한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 백성에게 출애굽 언약의 신앙 전통을 상기 시키면서 안팎의 사정으로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믿음으로 굳세게 일하라고 권면한다(학 2:1-9).

 

  스가랴 예언자도 학개와 함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적대, 방해 세력도 꺾으시며,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불성벽”(슥 2:5)이 되어 지켜 주실 것을 환상을 통해 예언했다. 내부의 적으로는 유다 사회의 계속되는 죄악 현실로서 스가랴 예언자는 “날아가는 두루마리”로 상징되는 율법(슥 7:12)의 십계명 준수를 말하며, 특히 도둑질하는 것과 거짓 맹세(거짓증언)가 유다 사회를 혼란케 하는 죄임을 지적하였다(슥 5:1-3; 8:16-17). “에바 속의 여인”으로 상징되는 악의 세력은 이제 하나님께서 멀리 옮겨가심으로 유다를 정결케 하신다는 예언자의 말씀이다(슥 5:5). 가장 인상적인 스가랴 예언의 말씀은 4:6에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lyIj (하일)]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j'K (코아흐)]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j"Wr (루아흐)]으로 되느니라.”

 

  경제적 여건이나 모든 인력과 재력이 구비된 상황이 아니며, 신앙적으로도 죄악의 현실이 더 압도적인 형편에서도 학개와 함께 스가랴 예언자는 죄악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어 자기 백성의 죄를 정결케 하시고(슥 13:1), 무너진 성전을 다시 재건하게 하시며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스가랴 예언자가 활약한 주전 520년경 고대 중국에서는 공자가 활동했고(주전 551-479),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나왔으며(주전566-486년경), 한반도에는 고조선의 역사가 있었다. 제3차 귀환은 아닥사스다(2세?) 치하(주전 464-424년)에 에스라에 의해 주전 458년에 있었고(스 7:1), 제4차귀환은 느헤미야의 주도하에 주전 445년에 이어졌다(느 8:1, 비교 느 13:6의 재귀환).

 

 

  스가랴(“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는 뜻)라는 이름은 구약에 흔한 이름으로서 적어도 삼십 명에 가까운 동명이인이 등장하며, 신약에서는 그리스어 표기에 따라 ‘사가랴’로 표기된다(참고 눅 1:5).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스가랴서에서 예언자의 신상명세에 관해서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추정컨대 주전 520년경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서 예언자로 부름 받은 스가랴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초기 2년간 예언은 주로 여덟 개의 환상록(슥 1:8-6:8)에 수집되었고, 여기에는 구약 예언자 전통의 역사 낙관론을 바탕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이제 막 귀환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백성, 유다 공동체의 새 역사를 꿈꾸는 젊은 스가랴의 열정적인 예언자적 종말론이 나타나 있다. 나머지 6:9-8:23의 본문은 스가랴 예언자의 평상시 예언 활동을 엿보게 하는 내용이며, 9:-14:21은 노년의 스가랴 예언자의 묵시적 종말론으로서 전반부의 청년 시대와는 달리 내재적 역사 갱신의 한계를 철저하게 경험하고 인식하는 노인 스가랴가 이제 이 땅에서 생의 마감을 앞두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초월적인 역사를 계시 의존적으로 바라보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5). 스가랴

 


 

  스가랴서의 저자는 자신을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스가랴(스가랴 1:1)라고 밝힌다. 스가랴(hy:r]k'z] 제카르야)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라는 뜻이며 구약에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약 30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포로 후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가운데 흔한 이름이었다.에스라 5:1과 6:14에 따르며 스가랴는 아버지 베레갸의 이름이 생략된 채 잇도의 아들로 나온다. 이를 두고 스가랴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다. Jerome은 이것은 베레갸는 스가랴의 육의 아버지이고 잇도는 영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반면 Hengstenberg는 베레갸가 일찍 죽었기에 잇도가 스가랴를 양육하였을 것이라고 해석하였다.Sellin같은 학자들은 이사야 8:2에 나오는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인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 9-14장의 저자로 생각하였다.70인역이 이사야 8:2의 여베레기야를 베레갸로 줄여서 표기한 것에 근거하여 이사야 8:2의 스가랴가 스가랴서 9-14장의 저자이며 같은 스가랴의 이름을 매개로 스가랴서의 두 부분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하나의 추측일 뿐이다. 에스라서의 기록은 구약의 족보에 자주 나타나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구약에는 손자나 자손을 관용적으로 아들로 자주 표현하곤 한다.아마도 잇도가 스가랴 집안의 유명한 인물이었기에 족보에 나왔을 것이며 실제로 느헤미야 12:4에는 잇도가 바벨론에서 여호수아,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사장 가문의 대표로 기록되어 있다. 느헤미야 12:16의 기록에 의하면 스가랴 역시 대제사장 요야김 시대에(제사장 여호수아의 후계자) 제사장 집안의 족장이었던 것 같다. 이로 보건대 스가랴는 스룹바벨의 포로 귀환시 아마도 젊은이였을 것이며 에스겔과 같이 제사장 출신의 선지자로 보인다.

 


 

  스가랴는 학개와 같은 시대에 선지 사역을 시작하였다. 학개가 첫 메시지를 선포한 지 약 두 달 후에(다리오 2년 8월; B. C. 520년) 스가랴는 그의 첫 번째 예언을 선포하였다. 이 때는 고레스의 칙령(B. C. 538년) 이후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바벨론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첫 번째로 유다로 돌아온 지 약 20여 년이 지난 시기이다. 고레스의 뒤를 이은 캄비세스 2세는 B. C. 525년  애굽마저 정복하여 페르시아 제국에 합병하였다. 그는 원정에서 돌아오던 길에 고국의 반란 소식을 듣고 도중에 자살하고 만다. 캄비세스 사후 페르시아 전역에 걸친 반란과 평정하고 왕위에 오른 사람은 왕족 출신의 장군이었던 다리우스 히스타페스(Darius Hystaspes, 재위기간 B. C. 522-486년)였다. 이 사람이 학개와 스가랴서에 언급된 다리오 왕이다. 다리우스는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연이은 반란에 직면하였지만 약 2년 만에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을 안정시켰다. 이로 인해 그는 ‘다리우스 대제’ 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한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역은 페르시아 제국의 20개의 지방 구역 중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을 포괄하는 ‘강 건너편 땅(Eber Nahara)'에 속하였다. 유대인들이 귀환한 곳은 그 중에서도 옛 유대의 이름을 딴 예후드(Yehud) 지역으로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동서남북으로 약 50-60km에 불과한 곳으로 인구는 약 5만명 정도에 불과하였다.이곳은 처음에는 사마리아에 본부가 있는 더 큰 행정 구역에 속한 한 지역이었지만 유대인들의 귀환과 더불어 독자적인 총독을 가진 지역구가 되었다. 사마리아의 이방인 총독들이 예루살렘의 성전 건립을 방해한 것은 예후드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에도 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예후드 지역의 생활은 바벨론에 비해 훨씬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지역 경제권의 중심에서 멀어진 연유로 유대인들은 주로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뭄과 자연 재해는 수확을 어렵게 했고 생활은 곤궁했다.당시의 어려움은 학개와 스가랴서에도 나타난다. “너희가 많이 뿌릴찌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찌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찌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개 1:6)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 외에도 사회적 갈등도 유대 공동체를 어렵게 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과 본토에 남아 있던 이들 사이에, 또 귀환한 사람들 간에도 남쪽 유대 출신들과 북쪽 이스라엘 출신 간에 정통성과 민족적 순수성을 놓고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에스라 2:59-63에는 어떤 지역 출신의 귀환자들과 제사장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된 사례가 나온다. 또한 유대 공동체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변 이방인들과의 관계도 단순치가 않았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이방인들과의 통혼으로 인한 민족성의 훼손과 우상 숭배였다. 흔히 포로 후기 유대 공동체에 우상숭배가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귀환 직후 유대의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런 상황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 반영되어 있다.

 

  스가랴서 1-8장의 배경이 되는 성전의 재건은 이런 여건 속에서 이루어진 어려운 과업이었다. B. C. 538년에 돌아온 최초의 유대 공동체는 곧바로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 에스라 3장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돌아온 이듬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 성전의 기초를 놓았을 때 옛 성전을 기억하고 있던 노인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에스라 3:12-13). 그러나 이 건축 사업에 사마리인들이 동참하기를 원하였고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절로 말미암아 성전 건축은 이방인들의 방해를 받고 중단되었다. 적대적인 세력들에 낙심한 유대인들은 신앙의 열정마저 식고 성전은 기초만 놓은 채로 16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학개가 성전 건축을 재개하도록 회개와 용기를 불어넣은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다리오 2년(B. C. 520년)에 시작된 재건축은 또 다시 사마리아 총독 닷드내가 페르시아 당국의 확인을 요구함으로 인하여 잠시 중단 되는 듯 하였다. 스가랴의 메시지가 용기와 확신을 준 것은 아마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스가랴 4:1-14; 8:3-9).고레스의 조서를 확인한 다리오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다리오 6년(B. C. 516년)에 마침내 성전은 완공되어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스가랴의 예언 사역은 이 시기와 일치한다. 학개가 다리오 2년6월에서 9월까지 4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메시지를 전한 반면 스가랴는 다리오 2년(스가랴 1:1; B. C. 520년)에서 다리오 4년(스가랴 7:1; B. C. 518년)까지 최소한 2년여 동안 메시지를 전하였다.